콩알과 거대한 바위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히데요시가 조선을 친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 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를 가볍게 굴복시키고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이익에 눈이 멀어 있었다. 자기 이익을 성취하기 수단으로 아무 상관 없는 이웃 나라 조선을 노렸고, 조선을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조선이 거대한 힘을 갖고 있어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조선을 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하는 자는 멍청이이다. 하면 반드시 깨지고 자기 파멸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굳이 하는 자는 구제불능의 병자이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조선을 그렇게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고, 해외 침략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실제로 조선을 얼마나 졸로 봤는지 히데요시는 군대를 파견하면서 군량은 6개월 치만 준비하면 된다고 명령했다.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향하는 것은 옆 동네 마실 가는 것과는 질이 다르다. 항구에 군대를 집합시키고, 수백 척의 배를 준비하고, 바람이 제대로 부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열흘이 지나도 제대로 된 바람이 불지 않을 수도 있다. 조선에서 되돌아오는 것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오가는 시일을 빼면 조선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은 많아야 5개월 정도 밖에 안 된다. 군대가 무리를 지어 무기를 휴대하고 먹을 것을 짊어지고 부산에서 함경도 끝까지 걸어가는 데 최소한 한두 달은 잡아야 한다. 이런 저런 것들을 고려하면, 그는 조선은 그냥 한 번 쭉 걸어서 돌면 그냥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의 조선의 영토는 일본과 거의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의 홋카이도는 일본의 지배 밖이었다. 오키나와도 외국이었다. 인구로 쳐도 아무리 크게 잡아도 조선의 두 배가 되지 못하였다. 당시 일본이 무슨 앞서 가는 산업국가인 것도 아니었다. 모두 땅을 파서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 놈은 마치 조선이 무슨 코딱지만 한 존재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원래 히데요시는 조선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조선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지식도 없었다. 전장에서 늘 상대를 죽이는 것을 능사로 알고, 여기에 실력을 발휘한 그는 거의 무학자였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그는 겨우 50개 정도의 한자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워낙 전쟁질을 많이 하다 보니 전쟁 살육 기술은 일본을 석권할 정도로 터득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최고의 전쟁 기술자인 히데요시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치기로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면 히데요시는 어떻게 조선이 “졸”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조선을 히데요시에게 접맥시켜 준 존재는 쓰시마였다. 조선을 치기 5년 전 규슈에 진출한 히데요시에게 쓰시마는 한 방 맞기 전에 먼저 가 스스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잘 봐 달라고 가져온 선물이 호랑이 가죽이었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일본에서 호랑이 가죽은 정말 얻기 힘든 귀중품이었다. 그런 귀중한 호랑이 가죽을 받은 히데요시는 그 가죽이 조선이 쓰시마에 바친 “조공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해에는 쓰시마의 애매한 태도도 한 몫 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호랑이 가죽은 조선이 쓰시마에 복속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콩알만 한 쓰시마에 조공을 바치고 있는 나라, 도대체 그 좁쌀 같은 나라는 어디서 들은 것처럼 나라 같지 않게 보였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쓰시마에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무조건 끌고 오라고 명했다. 끌고 오면 조선 국왕을 옆에 두고 자기의 졸로 삼겠다고 했다. 콩알만 한 쓰시마에 머리를 조아리는 조선은 히데요시가 보기에 분명 좁쌀만 한 나라였다. “끌고 와” 하는 명령을 받은 쓰시마는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러 변명을 둘러 대며 어떻게 하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히데요시의 꼴통은 변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쓰시마는 서울에 건너와, 일본에 새로운 국왕이 탄생했으니 축하 사절을 보내 달라고 계속 애원했다. 왜구에 골머리를 앓던 조선은 갑론을박을 거쳐 왜구의 침탈을 미리 막는데 도움이 된다면 축하 사절 정도는 보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선국왕을 끌고 오라고 했는데, 국왕의 신하 몇 명이 방문한 것에 히데요시는 내심 “분노”했다. 아무리 쓰시마가 말을 꾸며 대도, 조선이 스스로 자기에게 복속할 것이라고 믿었던 히데요시는 이런 조선을 그냥 놔둘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국왕이 스스로 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군대를 보내 잡아오고 말겠다는 “장미빛 꿈”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어느 하나에 잘못 미치면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빠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조선을 치라고 군대에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침략 명령을 내린 후, 히데요시는 조선을 접수하러 가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임시로 지휘소가 설치된 규슈의 서북단에 위치한 나고야로 향했다. 교토를 떠나기 앞서 그의 심복들은 한 장의 그림을 구해와 이를 보고 가라고 가져와 바쳤다. 아첨이었다. 그것은 일본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신공황후를 묘사한 그림이었다. 일본에서 오랜 세월 회자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에 그려진 내용은 히데요시의 귀에 좀 익은 이야기였다. 임신 중의 신공황후가 군대를 끌고 한반도에 건너가 신라,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고, 그들 국가의 왕들을 일본의 “개”로 만들었다는 공상적인 이야기였다.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조선반도의 왕국들은 일본에 조공을 바쳐왔는데, 어느새인가 게을러져 조공이 끊겼다는 구전이 횡행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그런 조선을 손본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망상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후에 서울을 점령하고 임진강에 이른 일본군과 동행하던 한 일본인 승려는 신공황후의 전설을 자기의 일기에 적으면서, 조선은 원래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옆길로 샜기 때문에 이러한 조선을 바로 잡으려 온 것이라고 침략을 정당화했다. 히데요시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은 몽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워 떡먹기일 것이라 생각했던 조선은 그러나 6개월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쉽게 굴복되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흐를수록 승기는커녕 일본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조선의 군사력이 세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많은 요인이 있었다. 외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거대한 바위를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근대 인류사에 있어 바다 건너 외국을 침략한다는 것은 늘 그래왔다. 남의 땅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를 통해 거대한 바위를 뛰어 넘어 승리를 손에 쥐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아마 좁쌀만 하다고 생각했을 베트남을 북으로 치다가 미국도 손을 들고 물러나고 말았다.
조바심을 태우던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아마 땅을 치면서 저승으로 갔을 것이다. 아, 내가 왜 나 자신을 죽이는 멍청한 짓을 했을까 하고 말이다. 회한 속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짓으로 자기 아들과 애첩도 후에 정적들의 공격을 받고, 오사카성의 불 속에서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좁쌀로 생각했던 땅에서의 살육전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자신을 내리친 격이 된 것이다. 침략 전쟁의 천벌이란 이렇게 끝나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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