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렁과 굴욕도 떳떳하게 수긍하며 살아가는 것”
아주 오래전 여름, 빈에서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우리 안의 선한 부분을 떳떳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것 못지않게 우리의 수렁과 굴욕도 떳떳하게 수긍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자만이 후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준다면 후자에 대한 인식만이 전자를 진실하게 만든다. (조르조 아감벤,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윤병언 옮김, 크리티카, 2023, 55쪽)
살다 보면 누구나 넘어가기가 힘든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가 온다. 몸이 심하게 아프거나 마음이 찢어질 만큼의 이별을 겪거나 정신을 붙잡고 있기도 힘들 만큼의 사건에 휩싸이거나 모욕감 또는 굴욕감에 휩싸이는 일을…. 이때 닥친 어려움을, 굴욕을, 직시하는 일이 힘들다. 견디기 힘든 만큼 떠올리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남 탓으로 돌리고 싶기도 하며,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가 혹은 환경이 혹은 때가 문제였다고.
나이를 먹어가며 바뀐 것 중 하나는 내가 어려움과 굴욕에 처했던 순간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어려움과 모욕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 자주 떠오른다는 것이다. 내가 수렁과 굴욕의 순간에 처할 때, 최근의 나는, 내가 다른 이를 그렇게 만들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대가 느꼈을 그 감정을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너무 괴로워진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말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삼업(三業)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의 수렁과 굴욕도 “떳떳하게 수긍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어려움과 모욕을 회피하지 않는 것, 내가 지금 이런 처지에 처했다는 걸 분명히 자각하는 것, 그것마저 내 생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내 안의 선한 부분을 당당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 오늘 내가 지키며 살아낸 선함이 내일 겪게 될지 모를 수렁과 굴욕을 당당하게 수긍하며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선함도 당당하게 지키고, 수렁과 굴욕도 떳떳하게 수긍하는 삶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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