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배달부 키키》 ① 공간편
자기만의 방에서 한 걸음
시계 없는 마을과 시계 있는 마을
《마녀 배달부 키키》에는 두 개의 포스터가 있다. 하나는 아래로 바닷가 마을이 펼쳐져 있는 하늘 위를 키키가 부웅 난다. 다른 하나는 어두운 빵집 안에서 키키가 턱을 괴고 유리창 바깥의 풍경을 바라본다. 둘이 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반대의 분위기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키키는 가벼운 생기와 무거운 고독을 함께 껴안은 인물이다. 그래서 《마녀 배달부 키키》는 확 뚫린 창공과 꽉 닫힌 방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두 개의 포스터가 필요할 정도로 소녀의 복잡한 수련기가 된다. 미야자키는 이 강도 높은 차이를 고향 마을과 바닷가 도시로, 도시와 숲으로 나누어서 심도 있게 다룬다. 우선 바닷가에 붙은 항구 도시의 특징을 음미해보자.
항구 마을이 키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소녀의 고향 마을과 비교하면 더 잘 드러난다. 《키키》의 고향마을에는 호수가 있었다. 오프닝 씬에서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호수 표면을 스친다. 어떤 특별한 일도 없어 보이는 조용한 고장이다. 키키는 맑은 하늘 아래, 바람 부는 들판에서, 가만히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오늘이 떠나야 할 날임을 알아차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키키는 나무들 사이, 목책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해, 꽃이 가득한 엄마 마녀의 정원이자 연구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메이와 사츠키도 나무터널을 통해 새집이나 토토로의 굴로 들어갔었다. 키키의 고향도 마녀 한 사람쯤은 있어도 괜찮은 여유있고 다정한 곳이다.
키키네는 집도 아름답다. 들어서는 정원에서부터 많은 꽃과 허브가 아름답다. 풀들은 모두 엄마 마녀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약으로 쓰일 테다. 집안은 구석구석도 꽃무늬 벽지로 아늑하다. 아빠가 전화를 거는 테이블이라든가 키키의 방에도 어김없이 화병에 꽃이 놓여 있다. 엄마의 연구실 겸 진료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면 키키의 방이 나온다. 역시, 핑크핑크다. 포근한 느낌의 노란 색 꽃무늬 벽지와 격자무늬 침대 커버를 비롯해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고, 창가에는 옅은 붉은색 제라늄 화분이 두 개 있다. 책장에는 가지런히 책들이, 책 뒤편으로는 귀여운 철제 박스 등이, 책장 옆에는 그림이 돌돌 말려들어 있는 커다란 병까지 모든 것이 아기자기하고 귀엽다. 소녀 감상 만땅이다.
키키는 13살.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한 세상으로부터 갑자기 날아올라 독립의 첫발을 내딛는다. 키키는 한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기에 남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키키는 한번도 겪은 적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 첫째, 시계다. 고향 마을에서는 일기 예보가 틀렸고, 아버지는 딸과 약속한 캠핑을 갈 수 없었다. 키키는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려고 소를 데리고 이동하는 기차에 무임승차를 한다. 그러나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는 키키를 시계탑 높이 솟은 마을로 데리고 간다. 키키는 시간표를 어기지 않는 기차를 타고 시계탑을 자랑하는 항구에 들어선 것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까지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장이 펼쳐져 있고, 그 주위로 빽빽이 자동차들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는 시계를 정확한 맞추고 살아야 하는 마을, 정확해야 하기에 돈으로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 마을이다.
숫자를 정확히 따지는 세계란 어떤 곳일까? 위에서 보면 알록달록 화려하지만 키키의 착륙은 쉽지 않았다. 차도와 인도로 명백히 나뉜 도시에, 어떤 선도 그어지지 않은 하늘을 무대로 사는 마녀란 신기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닥 환영할 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지가 경계가 나뉜 장소라는 것, 따라서 비행이란 이 모든 가능과 불가능을 나누는 선분 위로 날아오르는 행위라는 점도 여기서 설명된다). 그래서 도시에서 가장 먼저 키키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경찰이다. 마녀가 경찰과 대립한다는 점은, 《토토로》에서 아이들이 경찰이 쫓아올까봐 삼륜차 짐 사이에 숨을 때를 떠올리게도 한다. 경찰과 군대는 미야자키 하야오 전 작품에서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존재이다. 바닷가 마을의 경찰은 키키가 교통법규를 어겼고, 미성년자라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키키의 빗자루는 도시의 규범과는 차원이 다른 셈이다. 부모 없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하기에 키키가 마을에 들어설 방법은 없다. ‘이 도시에 살아도 될까요?’ 누군가에게 인사를 해 보지만 그 누구도 적절히 답해주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숫자를 잘 따져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키키의 마트씬이다. 키키는 묵찌빠 빵집 주인 오소노 아줌마의 도움으로 겨우 지낼 곳을 마련하게 되자,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간다. 쇼윈도우에는 아름다운 옷이나 구두가 가득하고 사춘기 소녀의 눈은 거리의 세련된 차림들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마트에 도착하니 또 필요한 물건은 얼마나 많은지! 후라이팬도 컵도 종류나 모양이 몇 개씩이다. 키키는 저금통에 모아둔 돈을 거의 다 쓰고 만다.
이런 상품 세계를 미야자키는 어떻게 보는가? 미야자키의 작품 전체 세계에서 상품이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배경을 산업 사회, 즉 상품이 생활을 지배하는 세계로 거의 삼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키키》이고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상품 세계에 대한 미야자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돈 문제가 다르게 제기되는 작품은 《붉은 돼지》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앞에서는 대공황으로 화폐 가치가 종잇쪼가리가 되어버린 이탈리아가 그려지고, 뒤에서는 현금이며 카드만 믿고 예의 없이 남의 식당에 들어가 마구 먹었다가 돼지가 되어버린 부자 아빠가 나온다. 어느 쪽이든 돈은 인간의 예의와 유머를 잃게 하기에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키키의 경우, 돈은 나쁜 물건이 아니다. 키키는 호기롭게 자기 돼지 저금통을 털고 오소노네 2층에서 하나하나씩 자기 돈을 세기도 했다. 키키는 돈은 귀하게 생각다. 키키는 전화 한 대를 놓는데 돈이 얼마 드는지 알고 싶어한다. 돈이란 도시 생활에서는 반드시 필요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먹을 것도 잘 곳도 얻을 수 없다. 키키도 《라퓨타》의 파즈처럼 현실주의자다. 다만, 키키가 마트에서 돈을 낼 때 계산원의 돈 통 아래 영수증과 각종 포장지로 꽉 차 있는 쓰레기가 보인다. 빗자루를 타고 날며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방청소를 하는 키키가 주인공인 영화이니, 어지러이 쌓여만 가는 마트 쓰레기통은 키키와 대척점에 놓인 사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말하면, 키키에게 돈이란 귀하지만 이해하기도 적응하기도 쉽지 않은 물건이다. 그러니 키키가 항구 마을에서 적응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키키는 어떻게 적응하게 될까? 결국 키키도 돈의 흐름을 이용하게 된다. 빗자루 타는 기술을 배달일에 쓰기로 하면서다. 키키는 배달일을 하면서 고객과의 약속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톰보의 초대로 또래들이 모이는 멋진 파티에 초대된 것도 거절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키키의 배달은 등가교환의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빵집에 공갈 젖꼭지를 두고 간 손님을 돕는 배달은 하숙집을 얻게 해주었고, 배달하다 숲에 고양이 인형을 떨어뜨린 덕분에 우르술라라는 멋진 예술가 언니와 친해지게 되었다. 원래는 생일 케이크만 배달하면 될 일을, 고장 난 오븐까지 고치며 부탁하신 할머니를 도운 덕분에 서로 생일을 챙겨주는 친구가 된다. 키키의 배달은 돈을 벌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친구를 사귀게 하는 방편도 된다. 이렇게 미야자키는 우리가 날마다 부르짖는 그 돈의 목적이란 결국 친구를 사귀는 데 있지 않냐고 말한다.
살다 보니 키키도 바닷가 도시가 돈만 밝히는 괴물 같은 곳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소노도 말했지만 대도시는 대도시대로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 덕분에 키키는, 고객마다 물건마다에 따른 자기만의 루트를 짜서 바람을 타고 배달한다. 하나씩 하나씩 고객들의 마음을 실어 나를 때마다 키키 나름의 지도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덕분에 비행 능력을 잃은 뒤에도 그동안 번 돈으로 버스도 타고, 또 새로 알게 된 골목길 등을 통해 마을 외곽으로까지 나갈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느냐 못버느냐가 아니다. 번 돈으로 삶에 어떤 지도를 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키키는 도중에 비행 능력을 잃는다. 하지만 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기 목숨을 던져 비행 능력을 되찾는다. 심지어 잘 숙련된 엄마의 빗자루도 아니고, 자기가 깎은 자기 빗자루도 아니고. 빌린 쇠솔 막대기를 타고서다. 키키는 탑에 걸려 찢어진 에어 비행기 ‘자유의 모험’호에 끌려 간 톰보를 구하기 위해 항구에서 가장 높이 걸린 시계를 향해 날아간다. 에어 비행기는 도라의 타이거모스처럼 풍선으로 된 비행기다. 시계탑에 비행기가 걸려 터진다는 설정도 재미있다. 풍선 비행기에게 날기란 바람을 가르는 일, 시간을 제대로 맞춘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사태 속에서 시계와 비행의 대결에 끼인 톰보는 죽을 뻔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이때 나무 빗자루가 아니라 쇠솔 빗자루로도 날게 된 키키가 톰보를 향한다. 이 모든 상황이 시시각각 중개되고, 키키는 오소노 아줌마와 아저씨, 청어 케이크 할머니와 그 하녀, 고양이 인형을 전달했던 소년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톰보를 구한다. 원래 미야자키는 마지막 장면을 할머니와 키키의 조용한 대화로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계탑이 있는 도시에 환영받으며 입성하지 못한 키키가, 마지막에는 군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으며 영화를 마무리할 필요도 있었다고 한다. 키키가 친구를 구하자 사람들 모두가 크게 기뻐하며 축하한다. 도시의 하늘에서는 키키를 도시의 식구로 받아들이는 의미의 종이꽃 비가 한가득 내린다. 화사한 엄마의 정원 대신 도시의 종이꽃이 키키를 품는다. 시계 마을에서, 시계에 걸린 친구를 무조건 구하면서 키키는 비로소 이 마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마녀를 굽는 빵집
키키에게 보다 중요한 공간은 빵집 2층 다락방이다. 일단 오소노의 빵집부터 이야기하자. 오소노 빵집은 시계탑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아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내려다보며 멀리로는 바다를 향해 있다. 완전히 돈으로만 사람들과 연결된 메이커 빵집이 아니라, 동네에 있기에 이웃 손님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려고 주인이 가게를 비워도 크게 걱정이 없다. 서로서로 돕는 골목 빵집이다. 여기에는 신선한 빵 냄새가 하루종일 풍긴다. 따뜻하고 친절한 주인 오소노는 지금 임신중이다. 오소노의 남편은 하도 표정이 없어서 일꾼인가 싶지만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장면을 통해 듬직한 가장임이 나중에 드러난다. 이 빵집은 여러모로 고향의 엄마집과 닮았다. 단골이 주로 찾는다는 점도 그렇지만 빵집 내부 벽지가 엄마네 집 노랑-세로 벽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오소노의 주방에는 엄마가 꾸민 것처럼 말린 꽃과 그림 액자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엄마가 약초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오소노는 빵으로 사람들을 먹인다. 두 엄마 모두 누군가의 건강을 돌본다는 점에서 닮았다.
키키가 얻게 되는 방은 오랫동안 짐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방으로, 까만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 그래도 화덕도 있어 불을 피워 팬케이크 정도는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철제 침대가 놓여 있어 완전히 낡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트북에는 처음에 나무 침대를 그려넣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잠깐 나온다. 어둡고 칙칙한 방에 침대까지 나무로 되어 있으면 너무 올드한 느낌이 들게 될까봐, 침대 프레임이 철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밖에, 방에는 특별한 장식이 하나도 없다. 고향에서 키키의 방은 그림이며 장난감이며 가득했지만, 여기 검은 다락방에는 후라이팬 하나, 자기 컵과 접시 하나, 조리개 몇 개뿐이다. 정리장 하나가 나중에 나오는데 옷장도 아니고 책장도 아니고 식품이나 조미료가 조금 들어 있는 정도다.
미야자키는 이 방의 창을 하나만 뚫었다. 그리로 바다가 보이고 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방 안에는 전깃불 하나가 낮게 내려와 있을 뿐, 전체가 1층 빵집처럼 환하지 않다. 이 방에 꽃이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심지어 거울도 없다. 왜일까? 키키의 방은 키키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곳은 어둡다. 키키는 거리의 화려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싶고, 멋진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녀로서의 자기 운명에 대해 아무런 자각도 반성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있다. 오래된 전통은 13살 마녀이니 혼자 수련하라고 하지만, 왜 그런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 그 후에는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해 막연하다.
이런 사춘기 마녀의 깜깜한 마음을 빵집에서 혼자 손님을 기다리는 키키의 포스터가 잘 보여준다. 여기서 키키는 마녀 배달부로 날지 않는다. 키키는 빵을 구울 줄도 모르고 빵을 파는 것은 마녀의 일도 아니다. 그 공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지만 딱히 다른 곳에 가서 하늘을 나는 모습이 아니라, 빵집에서 창밖을 보며 손님을 기다리거나 혹은 바깥은 관찰하는 그 모습이 왜 또 하나의 포스터로서 선택된 것일까? 게다가 이 포스터에서 키키는 유리창 안에 있다. 하단에 가게 유리창으로 창밖이 비치는 것이 그려지고, 때문에 독자는 창 밖에서 키키를 바라보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키키와 감상자 사이에 거리가 만들어진다. 키키의 마음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고, 그런 만큼 키키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키키가 턱을 괴고 기다리는 그 빵집은 오소노의 분위기와 달리 어둡고 음침하다. 새벽도 저녁도 아니고, 빵들의 크기도 과장되어 있다. 13살 귀여운 마녀의 성장기 같지만 실은 심리적 어둠을 묘사하는데 상당히 공을 들인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이 방에서의 첫날밤도 기억해 둘 만하다. 키키의 방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지 않아, 1층 밖의 화장실을 이용한다. 미야자키는 공주 그리기를 좋아해서, 나우시카나 시타처럼 예쁜 아이들은 화장실도 안 갈 것이라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비판에 정면 대응한다는 마음으로 미야자키는 키키가 양변기에 앉아 있는 포스터도 그려 보았다고 한다. 물론 채택되지는 않았다. 당연히! ^^ 하지만 이런 의도와는 무관하게 첫날 아침 화장실에 갔다 나오다가, 기지개를 키며 출근하는 오소노네 아저씨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는 키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타인과 은밀한 공간을 나누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바로 제시되는 장면이다. 성장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런 존재들을 하나하나 자기의 속마음 속에 들여오는 일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성숙한 마녀가 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만 가능하다. 두려움과 불편함을 견디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품고 타인에게 안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키키는 번민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한다. 참, 미야자키는 마법사의 방과 주방을 그리는 것을 이후에도 즐기게 되는데,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온갖 욕망으로 드글드글 정신없는 마법사의 마음 그 자체로 나온다.
키키는 일상을 소흘히 하지 않는다. 돈이 부족한 날, 비를 흠뻑 맞은 날, 보람 없는 배달일과 멋진 파티에 가지 못한 일, 마법을 잃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복잡한 시간, 키키는 이 모든 것을 이 방에서 견디며 보낸다. 지지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물론 아파 드러누울 때도 있고 정신없이 쉴 때도 있다. 답답하고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에는 식사를 하고 햇빛에 빨래도 널면서 보낸다. 미야자키는 낡은 부엌과 몇 개 안되는 조리도구가 갖는 힘을 어설프게 탄 팬케이크로 보여준다. 이렇게 소박한 일상을 잘 살아가면서 키키는 숲속의 예술가 우루슬라의 방문도 받고 점점 더 친구를 사귀게 된다.
사춘기에는 어떤 공간이 필요하다. 키키는 엄마가 알뜰살뜰히 돌봐주는 유년의 방에서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수련에 힘쓰는 우르술라의 자기만의 아뜰리에로 나아가는 사이에 깊은 어둠을 통과한다. 키키의 방은 시계탑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바다를 향해 있는 창을 두었다. 어둡지만, 사회의 광폭한 시선에 바로 노출되지 않아도 되고, 혼자 고민하지만 끊임 없이 믿어주는 누군가에 의해 매일 새롭게 스스로 기운을 일으킬 수 있는 공간이다. 이때에는 부모의 전전긍긍이 아니라 오소노와 아저씨처럼, 늦게까지 배달하는 키키를 키다리고 밀가루로 배달마녀 모양의 빵을 구워 멀찍이 응원하는 거리감 있는 책임의 시선이 필요하다.
예전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는 간난신고 끝에 획득하는 경제적 자립이 정신적 자립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날 프리 아르바이터, 모라토리엄, 트라바유 등의 유행어가 나타내듯이 경제적 자립은 반드시 정신의 자립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빈곤이 물질적 가난함보다 마음에 대해 더 많이 오르내리는 시대입니다.
부모 곁을 떠나는 것도 통과의례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타인들 속에서 생활하는 것도 편의점 한 곳으로 충분한 시대에, 소녀들이 직면하는 자립이란 어떻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발로하며 자기실현을 하느냐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곤란한 과제입니다. [중략] 어머니가 사용하던 빗자루가 지켜주고, 아버지가 사주신 라디오로 기분전환을 하며, 분신인 검은 고양이가 따라다니고 있는데, 키키의 마음은 고독과 인연에 흔들립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그 경제적 원조까지 받으며 도시의 화려함을 동경해 도시에서 자립하려 하는 많은 소녀들의 모습이 키키와 겹쳐집니다. 키키의 무른 각오도, 얕은 인식도 오늘날 세간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원작 속에서 키키는 타고난 천성으로 난관을 해결해나갑니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자기 편을 많이 넓혀가기도 합니다. 영화화에 앞서 저희는 약간의 수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재능이 훌륭히 펼쳐지는 모습은 확실히 기분 좋지만, 지금 이 도시에서 사는 소녀들의 마음은 좀 더 굴절되어 있습니다. 자립이란 벽을 돌파하는 싸움은 많은 소녀들에게 곤란 그 자체로, 한번의 축복조차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영화에서 자립의 문제를 보다 깊이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좋든 싫든 현실감을 갖기 때문인데, 키키는 영화 속에서 원작보다 훨씬 강한 고독과 좌절을 맛보게 되겠지요.(『아트북 마녀 배달부 키키』, 7쪽)
스스로 빛나는 자의 아뜰리에
키키에게 대단히 중요한 공간으로 숲속 예술가 우르술라의 아뜰리에가 있다. 우루술라의 공간은 어둡다. 토토로가 사는 녹나무처럼 키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 있기 때문이다. 앗? 그런데 숲이야말로 마녀의 장소가 아닌가? 이 숲은 키키의 방처럼 어둡다. 또, 우르술라의 오두막은 작다. 그녀가 여름 한 철만 이용하는 곳이다. 앗? 그러고보니 키키에게는 그 다락방도 계속 머물 곳은 아니었다. 우르술라는 작은 오두막 지붕 위에서 까마귀를 사귀며 관찰하고 그린다. 앗? 그러고보니 동물들과 친한 것 역시 마녀의 습성 아닌가?
우르술라의 방 안으로 들어가보자. 문 바로 옆에는 커다란 밀짚모자와 우비 같은 장옷이 있고, 그 옆 식탁은 부엌인 듯 막 먹다 만 듯 커다란 빵에 브레드 나이프가 꼽혀 있다. 심지어 딸기쨈은 스푼이 꼽힌 채 뚜껑도 열려 있다. 꺾었거나 주운 꽃이 놓여 있고 오른쪽 끝으로 푸르고 싱싱한 사과가 두 알이나 있다. 역시 숲에서 살아 그런지 똑같이 임시 거처에 컴컴한 방에서 살지만 우르술라쪽이 훨씬 더 잘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안을 보면 왼쪽 창문 아래 침대가 놓여 있고 옷이 아무렇게나 벗겨 있다. 바닥의 의자 위에는 언제 마셨는지 알 수 없는 컵이 놓여 있고, 바닥에는 새 그림 스케치가 여러 장 있다. 많은 붓들이 마구 꼽혀 있고 색깔을 새로 만들기 위해 꾹꾹 눌러 짠 물감들과 엄청나게 덧칠하고 시험한 팔레트가 있다. 미야자키는 지저분한 이 화구를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방의 정면에 완전히 비어 있는 캔버스가 있다. 바로 이 캔버스에 키키가 그려지게 될 것이다. 캔버스 뒤로 책도 몇 권 보인다.
우르술라의 원룸은 마녀 키키의 원룸과 많은 면에서 닮았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우르술라의 빈 화폭 아래 싱싱한 꽃이 놓여 있는 것이다. 작품 전체로 보면 키키가 가질 수 있는 꽃으로는 엄마의 정원의 것과 도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이꽃이 있었다. 두 꽃 모두 누군가가 키키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르술라는 비어있는 그 화폭을 위해서 스스로 꽃을 갖고 온다. 두 번째 차이는 창문이다. 키키의 창문은 먼 바다를 향해 있었다. 우르술라의 창문 밖은 여전히 어두운 숲이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깊은 숲 아래로 저 위의 하늘 빛이 내려오는 것을 은은하게 표현한다.
우르술라의 오두막은 사실 전깃불도 없다. 키키의 원룸보다 더 어둡다. 하지만 우르술라가 전깃불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그것을 찾아가야 할지 알고 있기에 우르술라는 자기 마음의 인도를 받고 있는 셈이다. 타인의 축복이나 인정 없이도 우르술라는 혼자 빛난다. 그래서 우르술라의 방에는 전깃불도 시계도, 당연히 돈도 보이지 않는다. 우르술라는 나중에 고민 많은 키키를 자신의 오두막에 데려와 쉬게 하고 기운도 복돋아준다. 우르술라의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엄마의 조재실, 오소노의 빵집을 잇는다. 엄마가 약으로 치유하고, 오소노가 빵과 스프로 힘을 내게 하듯, 찢어진 인형을 고칠 수 있었던 우르술라 역시 키키를 치유하는 힘을 지녔던 것이다.
바다, 모든 길들의 고향
마지막으로 키키의 바닷가로 내려가보자. 키키가 이 고장을 선택한 이유는 바다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키키가 바다를 즐겨 찾지는 않는다. 살기 바빠 조금만 골목길을 내려오면 되는 일인데도 여유 있게 나설 수가 없었다. 톰보가 비행선이 불시착했다며 보러 가자고 권하지 않았더라면 키키는 바다를 아주 나중에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야자키는 바다를 어떻게 그리나?
바다는 길이 없는 곳이다. 바다까지 가는 길은 톰보의 패달 자전거로 달렸고 돌아가는 길은 삐쳐서 혼자 도로를 걸어 올라와야 했다. 가는 길에서나 오는 길에서 키키는 빠르게 달리는 크고 작은 차에 위협을 느꼈다. 결국 갈 때에는 패달 자전거가 부서져 길 바깥 허공에서 떨어져야 했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대형차들을 피해 돌들이 울퉁불퉁 있는 갓길로 잠깐 피해서 걸어야 했다. 바다에는 이런 길이 없다. 어쩌면 많은 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에 이르러 뻥 마음이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키키는 도시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배꼽을 잡고 웃고 속마음도 탁 털어놓게 된다. 어두운 자기만의 방 바깥에는 의무와 약속이 가득한 도시도 있지만 이렇게 활짝 열린 미래도 있는 것이다.
비행선이 불시착한 곳이지만 그래서 바다는 비행선이 이륙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모든, 나 있는 길들을 보라. 자전거는 함께 달릴 수 없고 차들도 방향을 따져 달려야 한다. 바다는 다르다. 바다에는 돛단배도 어선도 심지어 비행선도 제각각 떠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톰보와 키키는 앤딩씬에서 함께 바다 위를 난다. 그 밑으로 요트도 하나 지나간다. 패달-비행기와 마녀의 빗자루가 함께일 수 있는 하늘 아래로 바다가 푸르게 펼쳐져 있다.
13살 마녀는 수련이 끝나면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수도 있고(중간에 공장도시 위 하늘에서 만났던 점치는 마녀처럼), 수련처 마을에 정착할 수도 있다(키키의 엄마처럼). 키키는 차차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앤딩씬을 보면 키키는 오소노의 빵집을 나와 새로 어떤 2층집을 구하는 듯하다. 그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나의 창문을 갖고 있던 키키는, 이제 본인의 키만큼 큰 양문형 창문을 갖는다. 빵집 아저씨가 밀가루로 구워 만들어준 배달 간판도 있지만, 새로 쇠간판도 하나 튼튼히 단다. 키키는 계속 항구에 살지 않을 수도 있다. 바다를 늘 보고 사니까. 하지만 당분간은 여기에 머물지도 모르겠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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