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왕양명마이너리티리포트] 상소 사건 시말기 2 – 옳은 일은 저지르고 본다, 뒷일은 뒤에 생각한다

상소 사건 시말기 2

– 옳은 일은 저지르고 본다, 뒷일은 뒤에 생각한다



환관 유근, 그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유근은 섬서성 흥평(興平) 출신으로, 본래 성은 담(談)씨였습니다. 북경에서 우연히 태감 유순(劉順)을 알게 되고, 양자로 거두어져 입궁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신분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물론 환관이 되는 것이 무슨 대단한 변신이냐 할 수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최하층에 속하는 민(民)들에게 있어 삶은 구조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괴로운 조건일 뿐입니다. “좀 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이 보통의 삶인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현대 사회가 더 좋아졌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신분제가 사라졌을 뿐 여전히 아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교묘하게 사회는 저마다의 어떤 선들을 가르며 구획되어 있습니다. 금수저/흙수저, 정규직/비정규직, 청년/기성세대, 여성/남성, 국민/난민 등등. 다만 과거에는 이것이 표면적으로 신분적 차별로 노골화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하층민 생활을 전전하던 어린 유근은 환관 유순의 권력에 매혹됩니다. 비록 환관이었지만, 아니 환관이라는 점만 눈감는다면(사실 보통은 이걸 눈 감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만), 거기에는 매혹적인 특권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사는 궁 출입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봉록(월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앞에서는 아첨하는 사람들의 권력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근은 스스로 거세합니다. 이는 그가 어떤 목적(목표?)을 위해서라면 매우 독한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유근은 환관이 되어 입궁합니다.


명대 권력 기관은 크게 보아 두 곳, 즉 왕권(황제)과 신권(사대부)의 양두 체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 곳입니다. 황제와 사대부 사이(혹은 주변)로 환관 세력이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권력의 경쟁자는 환관부(사례감)와 조정 대신들이었습니다. 누가 황제의 마음을 차지하느냐(혹은 가리느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15세의 어린 황제(정덕제 무종)가 등장했을 때 유근은 팔호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 무대에 등장합니다. 유근이 권력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황제를 뒤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황제를 뒤에 두었다는 것은 황제의 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정덕제 무종은 등극 이후 국정 대신 여러 놀이에 탐닉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황제의 ‘뜻’은 그가 어려서부터 보아온 환관 대신 유근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마치 헤르메스가 올림포스의 제왕 제우스의 전령이었던 것 같은 상황이랄까요? 문제는 제우스의 말을 전하는 헤르메스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최악의 거짓말쟁이 신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제 헤르메스의 전언 중 어디까지가 제우스의 진의일까를 고민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무종 주후조의 입이 된 유근(및 팔호) 세력에 대해 가장 기민하게 대응한 곳은 당연하게도 사대부 집단이었습니다. 역법과 천문을 담당했던 오관감후 양원(楊源)과 호부상서 한문(韓文) 등은 곧장 황제 무종을 향해 유근 탄핵을 상소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관료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대부 관료들에게 고작 15세의 황제는 너무나도 쉬운 상대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는 정덕제 무종도 대신들의 들끓는 상소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무종은 일단 유근을 남경으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유건과 사천 등 조정의 원로대신들은 이 타협안조차도 용납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이 기회에 유근 세력을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황제 무종은 이 사건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하기로 합니다. 무종은 사례감(환관부) 장인태감(태감의 우두머리)이었던 환관 왕악(王岳)을 시켜 사대부들과 함께 이 사건을 조사시킵니다. 그런데 왕악은 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근에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권력싸움중인 라이벌(?)이었습니다. 왕악은 또한 나름의 대의와 명분에 따르는 합리적 인물이었습니다. 하여 그는 결국 사대부들과 뜻을 같이 하고, 유근 탄핵을 지지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철부지 아니 막무가내 황제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다급해진 유근은 팔호 세력을 거느리고 무종을 찾아갑니다. 유근은 오랜 세월 궁에서 닳고 닳은 노회한 인물입니다. 과거 무종과의 오랜 인연을 끄집어내어 감성을 자극하고, 지금 현재 무종의 취미와 향락을 설계하고 제공했던 자신의 공을 내세웁니다. 결정적으로는 자신이 사라진 이후 미래에 닥칠 우환을 은밀한 위협을 섞어 과장했겠죠. 지금 자신(들)이 떠나게 되면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사대부 세력은 물론 사례감 환관 세력들까지도 갑갑해질 것.


무종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어떤 국면이 자신에게 더 유리할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는 결코 흐릿하지도 느릿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여 그 하룻밤 사이에 사건은 또 다시 극적으로 반전합니다. 바로 전날까지도 완벽한 승리처럼 보였던 사대부 대신들 그리고 유근에 반대했던 환관들은 이튿날 오히려 사례감 장인태감으로 승진한 유근을 보며 경악하게 됩니다. 사대부에 동조했던 장인태감 왕악은 남양으로 귀양이 결정되었고, 유건과 사천은 사직하고 낙향합니다(이 사건으로 효종의 고명대신으로 무종을 부탁받았던 세 명의 원로 대신중 이동양만 남게 됩니다). 유근 등 팔호 세력은 왕악을 귀양길에 피살합니다. 그들은 사례감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황제의 친위 부대인 금의위까지 세력을 뻗칩니다.


사대부 사회는 당연히 요동쳤습니다. 유건, 사천 등 원로대신들이 환관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고, 분노한 북경과 남경의 사대부들은 황제에게 거세게 상소로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정덕제(무종)가 유근을 앞세우고 뒤로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종이 나이가 어리고 나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덕제 주후조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명민(!)했고 교묘했습니다. ‘그는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청년 왕양명 - 1506년 겨울, 베이징, 장형 40대


권력을 장악한 이상 유근은 더 이상 눈치 따위를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황제와의 암묵적 계약이 있었습니다. 어리고 방탕한 황제에게 소비와 쾌락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조정대신(사대부)들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여하튼 유근은 이에 자금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성 내 관리들의 품계를 뇌물의 액수로 결정하는가 하면 측근들을 아예 전국으로 파견해 관직을 팔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종 세금 등 이권에 개입하고, 심지어 지방관들이 공무로 황궁에 입궁할 때에도 도성 출입 비용을 내도록 했습니다. 유근의 방자함은 금세 임계점을 넘어 폭발 지경에 이릅니다.


남경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대선(戴銑)과 감찰어사 박언휘(薄彦徽)는 다시 상소를 올려 유근에 대한 탄핵과 강력한 처벌을 요구합니다. 대선과 박언휘의 상소는 앞선 사대부들의 경우와 조금 성격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상소가 신분이나 정파 등의 이해관계에 따른 탄핵 이전에, 급사중과 감찰어사라는 그들의 직무 안에서 이루어진 정상적인 업무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급사중과 감찰어사는 일종의 ‘공수처’(고위공직자수사처) 관리입니다. 조정 대신들의 비위를 감찰하고 직언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간관(諫官)들이었습니다.




본래 간관은 비판에 따른 책임을 따로 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고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송나라는 태조 조광윤의 유지에 ‘절대 언로를 이유로 사대부를 죽이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고 송나라는 후대까지 이것을 잘 지켰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태조 주원장 스스로가 사대부를 눈엣 가시처럼 미워하고 견제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권리와 지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간관 대선과 박언휘의 경우도 결국은 그런 영향의 연장선 위에서 발생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어떤 가치를 지켜 움직여지는가 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때였다면 당연히 이런 정도의 쓴소리는 별 문제가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암묵적인 사회 분위기 위에서, 게다가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유근 일당은 대선과 박언휘를 금의위에 잡아 가둡니다. 잡아 가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종종 곤장을 때리고 모욕을 주어 징벌했습니다. 사대부 관료들에게 이것은 아픔 이전에 치욕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인 처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대선과 박언휘는 곤장을 맞아 투옥되었는데, 대선은 결국 옥사하고 박언휘는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정덕 원년(1506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한꺼번에 쏟아지듯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정덕 원년, 바야흐로 공포정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환관이 사대부 관료를 잡아들여 매질을 하고, 간관은 정당한 직무상의 언로를 이유로 투옥될 수 있는 시대.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비정상적인 상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게 되는 시대. 그 표면에서는 권력욕에 눈이 먼 노회한 마이너(주변부) 환관 유근이 날뛰고 있었고, 그 이면에는 도취와 향락을 쫓아 탐닉하고 있던 젊고 영민한 메이저(주류) 황제 무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소란 속에서, 아니 이 모든 소란이 급속하게 정국을 공포로 얼어붙게 만든 그 시절에 그 차가움과 침묵을 뚫고 얼어붙은 정신을 깨우는 날카로운 목소리. 그것은 당시 35세의 병부 주사 왕양명이었습니다. 왕양명은 대선과 박언휘를 위해, 유근의 탄핵을 위해, 아니 국가의 봉록을 받는 사대부 관료로서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부끄럽지 않는 인물이 되기 위해 거침없는 상소를 작성합니다. 사실 지위로 보나 정황으로 보나 왕양명은 전혀 당시의 정국을 대표할만한 위치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양명의 상소가 있음으로써 최소한 이 시기의 사대부들은 그나마 체면 치례를 하게 됩니다. 우리 역사가 엄혹한 독재 시절에 다수의 침묵 속에서도 피어올랐던 민주화 운동 열사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왕양명은 이 일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유근에게 일개 병부주사 따위는 적수로조차 보였을 리 없을 것입니다. 왕양명은 유근에 의해 즉각 체포되어 구금됩니다. 그리고 치욕적이게도 장형 40대의 형벌을 받습니다. 때는 겨울이었고, 비록 3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고는 하나 당시 왕양명은 몇 해 전 심한 낙마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수년간 요양 생활을 거쳐 이제 겨우 회복된 몸을 이끌고 관직에 복직한 지 겨우 두 어 해가 지났을 뿐이었습니다.


곤장 제도는 명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주원장이 고안(?)한 형벌입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관리를 처벌하는데 쓰였는데, 주로 자금성 남문 밖에서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죄인의 볼기를 내리치는 형벌이었습니다. 형벌의 감독자는 사례감의 장인태감과 금의위의 지휘사였고, 실제 집행은 금의위 교위가 맡습니다. 때리는 정도에 따라 뼈가 부러지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발생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하고 잔인하며 또 모욕적인 형벌입니다.


유근은 왕양명의 바지까지 벗겨냅니다. 매질을 가하는 교위에게 일러 사정을 봐주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대과 시험을 합격한 사대부 관리가 환관의 명령에 무려 40대의 곤장형을 받게 됩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사방으로 튀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양명은 기절합니다. 그리고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양명의 상소문이 얼마나 조목조목 시비를 가렸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근의 분노는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글_문리스(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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