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비열한 거리(distance), 북경에서 귀주까지; ‘나 뿐’ 놈들 전성시대 - 1)
정덕제 무종(1) - 음탕하고 사사롭지만 무기력하지 않은!
무종은 사사롭고 무능력하지만 절대 무기력한 군주는 아닙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우리에게는 보통 부패한 황제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연관 이미지들 같은 게 있습니다. 보통은 엄친아나 금수저 등으로 태어나 궁중에서 모든 이의 시중을 받고 자란 탓에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며 타인에게 무례하고 타자의 삶이나 타자와의 관계에 무감동하며 개인적으로는 무능력하고 유약한 인물 같은 게 떠올려지곤 하죠. 그런데 무종이란 인물에게는 반전이랄까, 아이러니랄까, 어쨌든 그런 게 있습니다. 무종이 어렸을 때엔 선왕과 대신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품격과 능력을 겸비한 예비 제왕이었다는 뭐 그런?
정덕제_무종
얼핏 다른 예를 떠올려보면 이런 경우가 아주 별종인 것만은 아닙니다. 음란 폭정의 대명사인 은나라 주(紂)왕이나 성인 요임금의 못난 아들 단주 등도 악명을 떨치기 이전에는, 비상한 재주와 총명한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좀 더 극적으로 악(惡)의 부당성과 괴악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문학적 구성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못된 인간이었고 죽을 때까지 못된 인간이기만 했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동화나 판타지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진실은 오히려 우리 인간이(혹은 인간뿐이 아니라도 어떤 존재 단독이) 자기 운명에 대해 생각만큼 주체적이거나 주요한 결정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쪽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환경결정론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본심이니 의지니 정신이니 하는 말로 개인에게 각자의 운명의 상태를 떠넘기거나 환원시키기에는 훨씬 더 주변 조건에 영향 받는 존재가 인간일 거라는 사실입니다.
여하튼 역대급으로 최악의 황제라 평가받는 무종 주후조(朱厚照), 이지만 그도 한 때는 “원기가 왕성하며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하여 자못 제왕의 기품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스승 삼아 각종 경전을 정성껏 익히던(특히 공부할 때엔 명석한 이해력을 보여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던) 총명하고 촉망받는 태자 시절을 보여주기도 합니다.(물론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총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공부에 싫증을 내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경연을 피해 도망(?)다녔습니다.).
하여 무종의 선제였던 아버지 홍치제(효종)는 장남이자 외아들이었던 무종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사실 무종은 명나라 전체 역사 속에서 이어진 총 16명의 황제 가운데, 유일한 적통 장자 계승자라는 독보적인 이력도 있습니다. 요컨대 출신 성분의 순도는 최고이고 그 출발점에서의 평가도 제법 높았다는 말입니다. 총명하고 인자한 자질, 그리고 선제의 적통 혈육인 장자. 무종의 특이함이랄까, 명민함이랄까, 혹은 그의 남다름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범어(산스크리트)에 능통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원을 지배하는 한족 황제에게 범어에 능통한 게 어떤 유익한 점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종 주후조의 특이함과 남다른 비상함일까요?
여기에 더해 무종은 수렵과 전쟁놀이도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종의 이러한 자질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착실히 유학 경전을 훈련받는 총기 넘치는 황태자가 백면서생이 아니라 말타기와 야전의 생활 역시 소화해낼 수 있는 건강한 체력과 용기의 소유자였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대로 왕조가 안정에 접어들게 되면, 창업 황제들은 대체로 야전 무인 장수 출신이었던데 반해 이후 궁에서 나고 자란 후손-후계자들은 상대적으로 문약(文弱)해지기 일쑤여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신체성이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무왕(주후조)은, 그의 시호가 무(武)인 점에서도 드러나듯, 씩씩하고 활달한 에너지가 넘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문무가 겸비된, 드물고 이상적인 금수저 군주의 탄생이었던 셈입니다.
한 마디로 정덕제 무종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결여가 없는 완전한 조건 속에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에너지도 넘치는 인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정덕제 무종의 이후 세월은 선제(先帝)인 홍치제(弘治帝) 효종과 내각 대신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못했, 아니 않았습니다. 홍치 18년(1505), 무종 주후조는 15세의 나이에 대명천자(大明天子)에 오릅니다. 부족함 하나 없는 최상승 금수저 황세자가 15세에 세계 황제(전 근대 시기 중국은 하나의 세계입니다)의 지위까지 차지한 것입니다. 막상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진짜 어마어마한 스펙이네요.
하지만 이 무렵 이미 무종 주후조는 질풍노도의 시기는커녕 사냥과 여색 및 음주 등에 빠진 ‘질펀노도’의 시기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아버지 홍치제는 죽기 전에 자신의 충신들인 유건, 사천, 이동양 등에게 아들 무종의 길잡이 역할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또 부탁까지 했지만, 정덕제 무종은 보란 듯이 그 길을 벗어났습니다. 무종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좌했던 최측근 환관 유근(劉瑾) 등을 중용했고, 유근을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들을 앞세워 조정 대신들의 역할을 간접화하고 또 제한했습니다. 잔소리꾼인 선제의 유신들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아울러 무종은 황궁 바깥에 표방(豹房)이라는 ‘나뿐인’ 별궁을 새로 짓고 아예 표방에서 생활했습니다. 당연히 별궁의 생활은 엄숙한 정궁 문화가 아닌 화려하고 난삽한 밤문화의 삶이었습니다. 이 별궁 생활은 대략 즉위 정덕 3년부터 정덕 16년까지 이어집니다. 정덕 16년 3월에 무종이 표방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입니다.
정덕제 무종(2) - 장군 놀이가 하고 싶은 ‘나 뿐’ 황제
정덕 14년(1519년) 6월, 정덕제 무종의 명나라에 또 하나의 큰 일이 발생합니다. 강서성 남창(南昌)을 거점으로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란 인물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주신호는 명태조 주원장의 5대손입니다.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봉할 때, 영왕은 열일곱 번째 아들 주권(朱權)의 봉호였습니다. 주씨 집안의 항렬로는 영왕(주신호)이 무종(주후조)보다 높아서 집안 할아버지뻘입니다. 이 집안 할아버지는 손자뻘 무종이 자주 황궁을 비우고 주로 표방에서 생활하거나 아니면 아예 전국 각지로 먼 사냥 수렵을 다니는 인물이었던 데 반해, 자신의 봉지(封地)인 남쪽의 남창보다 북경 생활을 더 좋아하고 그 꿈을 이루어보고 싶었습니다.
영왕 주신호의 쿠데타는 여러 해 동안 신중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반란은 규모는 물론 이들이 바라는 목표 역시 여타의 농민 반란 등과 크게 달랐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황음무도한 손자뻘 황제 무종은 만만해 보였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치밀하게 조직한 자신의 사병은 충분히 사기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금세 천하의 주인을 뒤집어엎을 것 같았던 영왕 주신호의 쿠데타는 허무하게도 당시 4개 성 군무제독(軍務提督)이었던 왕양명에 의해 불과 두 달이 안 돼 진압되었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말이 4개 성 군무제독이지 사실상 직접 지휘할 병사가 한 명도 없었던 왕양명에게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일찌감치 변란이 마무리된 좋은 소식이었어야 했는데, 이 사건은 뜻밖의 변수를 만납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영왕의 반란 소식에 봉천정토(奉天征討) 위무대장군(威武大將軍) 진국공(鎭國公)을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토벌대를 남방으로 출정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압권입니다. 바로 이 봉천정토 위무대장군, 즉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반군을 토벌한다는 대장군은 바로 정덕제 주후조 자신이었습니다. 황제가 스스로 자신에게 자신보다 낮은 직책을 수여한 것입니다.(황제보다 높은 직책은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한 말입니다만, 어쨌거나 황당한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정덕제 무종은 이제 대장군 주후조, 즉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여 스스로, 황제의 명에 의해, ‘총독군무 위무대장군 총병관’이란 직책을 책봉한 총병관 대장군이 되어 출병한 것입니다. 황제 무종은 주후조를 총독군무 위무대장군 총병관(이후에는 다시 진국공으로 책봉합니다)으로 임명하고, 총병관 주후조는 정덕제 황제의 명에 의해 출병을 하고…… 희대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지만, 실제 사실입니다.
정리하자면, 평소 남방 순행할 기회를 엿보았던 무종은 주신호의 쿠데타에 환호(?)했던 것입니다. 남방 순행을 하면서 남쪽의 아름다운 경승도 즐기고 아름다운 궁녀들은 물론 혹은 남방의 미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종의 이런 싸이코 패스적인 기질은 정덕 9년(1514) 정월 대보름 때 황궁에서 불꽃놀이를 거행하다가 실화가 발생하여 건청궁(乾淸宮)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드러난 적이 있습니다. 건청궁은 여타의 황궁 건물 가운데 하나쯤인 건물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중화문명 명나라의 정치 행정을 주관하는 제일 정전이고 상징성이 큰 건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종은 오히려 이 화재를 즐깁니다. 그는 일부러 화재 진압을 더디게 만들고, 자신의 표방에서 건청궁이 불타는 모습을 감상(?)합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가 아니라 “오오! 이 얼마나 거대한 불길인가!”
사실 이 모든 게 왕양명 잘못입니다. 그래도 쿠데타인데, 그렇게 빨리 사건을 해결해버렸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큰 전투나 살육도 없이! ^^ 상황이 이렇게 상식을 벗어나 버렸으니, 정덕제 무종 아니 위무대장군 주후조는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그가 평소에 좀 나대던 인물입니까? 그가 좀 북경을 떠날 기회만 있으면 좋겠다고 껀수를 찾던 인물이었느냔 말입니다. 그런 그로서는 일생에 한 번, 공식적으로 남방을 순행할 기회를 잡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만 그 기회조차 왕양명이 싹둑 잘라버린 셈이니 말입니다. 이게 다 왕양명 잘못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여하튼 주후조로서도 황당하긴 한 상황입니다. 온갖 퍼포먼스를 하고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집을 나섰는데, 나서자마자 전쟁이 종료되어 버린 상황이니 말입니다. 하여 위무대장군 주후조는 왕양명의 상황 종료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남진을 계속합니다. 그 사이엔 이런 일들에 으레 개입하기 마련인 소인배들이 끼어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이 사건은 위무대장군 주후조와 왕양명이 정면에서 충돌한 사건입니다. 당시 위무대장군측이 원한 최상의 희망 시나리오는 어느 지점에서 왕양명이 포로들을 놓아주고, 그 순간 곧바로 자신들이 반란군을 다시 사로잡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왕에 먼 원정을 감행했으니 뭔가 명분이 필요했을 테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이없다는 말을 쓰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니, 우리가 이들을 보며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과연 위무대장군 주후조의 이런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언제나 엄청나고 그럴 듯한 명분이 내세워지곤 합니다만, 그 이면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사사로움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니 어쩌면 오늘날이야말로 더욱더 잗다란 소인들의 시대를 맞고 있는 건 아닐까요. 굳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얼핏 떠올려만 보더라도 바로 십 수년 전 4대강 사업을 강조하며 명분을 만들던 사람들이 사업 목적을 강조하며 수질 개선이 된다는 말까지 했던 걸 기억합니다. 아무말 대잔치. 무종도 그 참신하고 무절제한 억지에는 무릎을 치며 고개를 숙이며 겸손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국가 고위 공직자가 멀쩡한 사람들을 별장에서 성접대 시키고도 무죄가 되는 시대이고, 선거가 있을 땐 분단국가인 나라에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자신들에게 손해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정치 정당과 같은 시대의 숨을 쉬며 살아야 하는 게 2019년 현재 우리들의 민낯입니다.
왕양명은 위무대장군측과 영왕 포로 처리 문제 및 황제의 순행 철회 등을 놓고 갈등하고 충돌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왕양명이 이들에게 저항했던 것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십 수년간 민란이 이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민심의 동요는 물론 지역 경제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게 되면 그들을 접대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지역민들의 수탈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더구나 순도 높은 음란 황제 아닙니까. 천하는 향락에 빠진 천둥벌거숭이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기록에 따르면, 돼지띠였던 정덕제 무종은 전국에 돼지고기 취식을 금지했다고도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오직 ‘나 뿐’이었던 나쁜 인물입니다. 무종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도 누구나 자기 조건에서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라도 우리는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누린 특혜였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을 받게 될 때 그걸 알아차릴 준비 정도는 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만 되어도 조금은 살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정덕제 무종을 한 번 보세요. 천하의 모든 것을 가진 자 아닙니까. 그냥 겉으로 보고 생각하기엔 대관절 그에게 부족함이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이런 어마어마한 조건을 갖추고 사는 인물의 삶이 고작 이 정도였다는 건 왜일까요. 우리, 저 조건에 저렇게 사는 걸로 만족하면 되는 걸까요. 저는 왕양명의 삶과 철학이 이 지점에서 진중한 문제제기를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왕양명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에게 왕양명을 이어주게 되는 또 한 사람의 결정적인(!) 주연급 조력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환관 유근(劉瑾)입니다.
(계속)
글_문리스(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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