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칠국의 난, ‘게임’이 불러온 ‘대재앙’
도화선, 게임과 원한 감정
오나라 왕 유비는 초나라, 조나라, 교서, 제남, 치천, 교동의 여섯 나라와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앞서 언급한 바, 반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조조가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는 정책을 급진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영토가 줄어들면 세력이 축소되니, 제후국의 왕으로 불안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그렇듯 오나라 반란의 원인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난 원인과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는 많은 곡절이 얽혀 있다. 그 사연들의 저변에는 ‘감정’이 얽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체못할 감정의 선분들 때문에 끝내는 죽거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오왕 유비는 고조 둘째 형의 아들이다. 고조는 한나라 건국 후 둘째 형 유중을 대왕으로 봉했다. 대나라는 흉노의 땅과 가깝다. 흉노가 대나라를 공격하자 유중은 끝까지 방어하지 못하고 샛길로 도망쳐 낙양으로 와버렸다. 고조는 형을 법대로 처리할 수 없어 왕에서 폐위하여 합양후로 삼고, 그 아들 유비를 패후로 삼았다.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비는 20살로 영포의 반군을 토벌한다. 형나라의 왕이 피살되어 자리가 비자 고조는 유비를 오왕으로 삼아 5군 53성의 왕이 되게 했다.
고조는 유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유비를 오왕으로 봉하고 직인을 수여한 뒤에야 불러서 얼굴을 본 것이다. 고조는 유비의 얼굴을 직접 본 뒤 후회가 밀려왔다. 유비의 생김이 반골 상이었던 것이다. 이때는 개인의 운수뿐만 아니라 국가의 운수도 반드시 점쳤다. 고조 또한 한나라 운수를 점쳤던 바, 건국 이후 50년에 동남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나왔다. 이 점괘에 유비의 반골 상이 겹쳐지니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유비를 오왕으로 봉한 이상 바꿀 수 없었다. 고조가 할 일은 딱 하나. 유비를 어루만지며 ‘일가이니 반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간절한 조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유비는 건드리면 터질 수 있는 기질을 안고 태어난 듯하다.
혜제, 여태후 시기를 거치며 한나라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갔고, 제후국의 왕들도 각자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힘썼다. 20살 유비의 성장과 함께 오나라도 나날이 성장했다. 오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더없이 풍요로웠다. 구리광산과 소금 생산으로 세금을 거두지 않아도 풍족했다. 도망자들을 불러들여 화폐를 주조하고, 급여를 주고 사졸을 기용하여 국력은 날로 강대해졌다. 사실 이때까지 오왕 유비는 착실한 제후였다.
이런 기운 속에 문제가 등극했다. 이때는 젊었던 제후들이 제법 나이를 먹어 혈기왕성한 장년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이런 풍요 속에 황제와 종실의 제후들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나 인애를 베푸는 문제 덕분에 제후들은 장안의 황실을 자연스럽게 오갔다.
오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나라 태자, 즉 유비의 아들이 장안에 와서 황제를 알현하고 황태자와 술을 마시며 쌍륙 놀이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오나라 태자의 사부 또한 초나라 사람이었는데 경박하고 사나웠으며 평소 교만했다. 중국은 역대로 초나라 사람들의 기질을 경박하고 사납다고 인식했다. 반고가 초나라 사람의 기질을 강조한 건, 오나라 태자 또한 그런 기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오나라 태자는 쌍륙에서 길을 다투면서 공손하지 못했다. 게임을 하며 흥분하여 거칠게 굴었던 것이다. 이에 황태자가 화가 나서 쌍륙판을 오나라 태자에게 던져 태자가 죽었다. 오나라 태자가 깐죽거리고 성질을 부리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질 못 다스린 황태자로 인해 죽고 만 것이다.
오나라가 삐딱선을 탄 건 이때부터였다. 황실은 태자의 시신을 돌려보내 오나라에서 장례를 지내게 했다. 이런 황실의 처사에 오나라 왕은 화가 나서 “천하는 한 집안이거늘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묻어야 한다”며 시신을 다시 장안으로 보내버린다. 황실은 하는 수 없이 오태자의 시신을 장안에 묻는다. 오늘날의 관습으론 집으로 돌려보내 장례를 치러야 맞는 것 같은데, 이때는 장안에서 장례 지내는 것을 정당한 절차로 인식했던 것이다.
황태자가 쌍륙을 던져 오나라 태자를 죽인 건 명명백백 잘못이다. 그러나 오나라 태자도 게임 때문에 선을 넘은 건 마찬가지였다. 게임으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황태자를 자극했으니, 오나라 태자도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느 쪽도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황실도 오나라도 서로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원한을 쌓게 된 것이다.
오나라 왕은 감정을 풀지 못했다. 고조가 본 관상이 맞았는지, 오나라 왕은 이때부터 조정을 원망하며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고 병을 핑계로 내조하지 않았다. 오나라의 국력을 믿었기에 오왕이 이렇게 버틴 것이다. 황실도 아들에 대한 원한 때문에 오왕이 내조하지 않는 것이라 여겨 진짜 병인지 탐문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신을 잡아 가두고 문책하며 죄를 물었다. 이러자 오나라 왕은 더욱 두려워하며 음모를 꾸몄고, 이에 따라 황제의 화도 풀리지 않았다.
다시 오나라 사신이 내조했고, 이번에 온 오나라 사신은 숨김없이 말했다. 두려움 때문에 오왕이 문을 닫은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을 듣고 문제는 너무 쉽게 오왕을 용서해준다. 왜 그랬을까? 강대한 오나라가 반역하면 한나라가 위태로울 터, 이 선에서 갈등을 봉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나라의 모든 죄를 사면하고 심지어 오나라 왕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리며 연로하니 내조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까지 내린다. 문제는 갈등을 싫어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되도록 안정과 평화를 추구했다.
이렇게 황실과 오나라 사이의 갈등은 일단락되었지만 감정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황실은 오나라를 불신했고 오나라는 황실을 불신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감정의 골이 깊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황실도 오나라도 서로를 두려워하고 불안해 했다. 양쪽 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오왕은 넉넉한 국고를 밑천으로 인재를 기르고 군사를 길렀다. 황실은 오나라가 흉악하게 힘을 축적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제후국을 누를 대책을 강구했다.
조조가 건드린 뇌관, 건드리면 폭발한다!
문제는 차마 할 수 없었으나 경제는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조조의 영지 삭감 정책을 수용한 것이다. 제후국의 기운 빼기! 만약에 있을 반란에 대비해 경제는 망설이지 않고 초나라 조나라 교서국의 영지 삭감을 단행했다. 영지 삭감의 칼끝이 오나라로 좁혀왔다.
건드리면 폭발한다. 제후국의 강성함과 오만방자함에 불안해하는 황실, 황실에 잡아먹힐까 두려워 떠는 제후국 사이에 감돌던 긴장이 폭발했다. 조조가 용감하게 그 도화선에 불을 놓은 것이다. 조조는 영지를 삭감해도 터지고, 삭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 예상하며 삭감을 강행했다. 삭감하지 않은 경우는 알 수 없으니, 조조의 말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삭감하면 반란을 일으킬 거란 조조의 말은 적중했다.
오나라가 황실을 향해 반기를 든 발단은 쌍륙 게임이었다. 원한 감정에 쌓여 서로를 불안하게 만들고 불신하게 만든 것이다. 기가 막히지만 게임으로 인해 생긴 감정이 도화선이 되어 죽음을 부르고 국운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거시적인 이념이나 대의명분이 오초7국의 난을 불러온 게 아니다. 허망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부터 이런 엄청난 일들이 시작된다. 감정싸움, 기싸움의 근저에 도사린 것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비등한 힘을 겨루다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급기야는 소유권 다툼으로 번진다. 그리하여 반고와 사마천은 오나라 태자로부터 반역이 싹튼 것으로 보았다. 사마천은 이렇게 비평했다. “기예를 다투는 데서 재앙이 발생하여 마침내 근본을 망하게 하였다.”(「오왕비열전」, 『사기열전』중, 747쪽)
오왕이 일어났다. 조조는 오왕의 원한 감정에 불을 당겼다. 초나라, 조나라, 교서국, 치천국, 제남국, 교동국의 왕들을 설득했다. “어사대부인 조조는 천자를 현혹시키고 제후를 침탈하며 충신과 현인을 가로막아 조정이 모두 원망하고 제후들은 모두 반역할 마음을 먹고 있으니 사람이 할 수 있는 막다른 곳에 왔습니다. 혜성이 나타나고 황충도 발생했으니 이는 만년에 한 번 있을 일이라 걱정하고 수고로우니 성인이라도 일어나야 합니다.”(「형연오전」, 『한서』2권, 명문당, 275쪽)
오초 7국은 조조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반역의 깃발을 들었다. 영지 삭감을 단행한 조조가 청산 1호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왕도 그렇고 다른 제후국의 왕들도 최후의 목표는 황제였다. 때마침 혜성도 나타나고, 황충도 발생하여 민심이 불안한 터, 황제 권력을 탈취하고자 들고 일어섰다. 62살의 오왕은 군사를 몸소 지휘하고, 14살의 막내아들을 사졸로 앞장세우고, 20만의 대군을 일으켰다.
경제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총력전을 펼쳤다. 그렇지만 오초의 병력은 막강했다. 이에 경제는 원앙을 불러들여 계책을 들었다. 원앙은 7국의 목표는 조조를 죽이고 옛 땅을 회복하는데 있으므로 이대로 해주면 병란이 그칠 것이라고 아뢰었다. 원앙의 대책은 오초 7국이 내세운 명분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계책에는 원앙의 사심이 들어 있었다.
문제 때부터 원앙은 조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욱이 경제 즉위 직후 원앙은 조조로 인해 서인으로 강등된 까닭에 원한이 사무쳐 있는 상태였다. 원앙이 오왕에게 뇌물을 받았는데 이 일이 법에 저촉되는지를 심사케 한 장본인이 조조였고, 이로 인해 원앙이 서인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반란이 일어난 직후에도 조조는 원앙을 잡아들이려 했으나 정신이 없어 유예하고 말았다. 원앙이 오왕의 거사 계획을 이미 듣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이 사실을 황제에게는 숨기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원앙을 잡아들이지 않은 것이 조조에게는 결정적 패착이었다. 황제가 조언을 구할 때 원앙은 조조의 참수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조조는 참수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나라 황실을 위해 영지 삭감을 단행한 조조는 제물이 되어 사라졌다. 조조의 아버지는 제후들의 원성을 듣고 걱정이 되어 장안으로 올라와 조조를 데려가려 하였다. 조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를 높이지 못하고 종묘가 불안해집니다.” 조조의 아버지는 비극적인 사태를 예감했다. “유씨야 안정되겠지만 우리 조씨는 위태로울 것이다.” 나중에 조조의 아버지는 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자기 몸에 화가 미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들의 죽음까지 예감했으리라. 조조는 원앙의 원한과 7국 제후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은 채 죽고 말았다. 제후국의 세력을 축소시킬 방법은 영지 삭감이라는 게 중론이었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장본인의 삶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신속하고 과감했지만 제후들의 정서를 읽어내지 못한 조조에게 최후는 이런 것이었다.
물론 조조의 사형으로 7국이 반란을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앙 또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황실의 뜻을 전했지만 오히려 감금되었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오게 된다. 원앙이 의도한 바, 일석이조의 성과는 있을 수 없었다. 조조에 대한 개인적 원한은 갚았지만, 원앙의 계책은 제후들의 의도에 전혀 맞지 않았고, 원앙 자신에게도 위험한 것이었다. 조조의 처단은 명분일 뿐, 제후들은 황실에 대한 도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황실의 군사들과 맞서 3개월 동안 싸웠으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조는 참수로 사라졌지만 경제는 두영, 주아부 등의 장군을 앞세워 칠국을 격파하고 10여만 명을 죽였다. 오왕 유비를 추격하여 단도현에서 죽였다. 교서왕 유앙, 초왕 유무, 조왕 유수, 제남왕 유벽광, 치처왕 유현, 교동왕 유웅거가 모두 자살했다.
조조에 대한 엇갈린 시선, 사마천 VS 반고
오초 7국의 난에 대한 평가에서 사마천과 반고의 시선은 엇갈렸다. 반고는 반란을 물리쳐 왕실을 안정시킨 경제와 조조의 치적을 강조했고, 사마천은 오초 7국의 반란을 불러온 조조의 실책에 주목했다.
사마천은 “제후의 세력이 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점진적인 방법으로 대처해 나가지 않았기 때문”(「효경본기」, 『사기본기』, 까치, 358-359쪽)에 왕실이 위태롭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천하의 안정과 위태로움의 관건은 모책에 달렸다고 보고 조조의 계책이 너무 성급했음을 비판했다. 제후국의 영지를 강제로 삭감하면 항명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중앙정부가 한편에서는 제후의 후손들에게 땅을 나눠주면서 또 한편에서는 제후국의 영지를 삭감하면, 힘은 힘대로 쓰면서 인심만 잃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사마천이 오왕 유비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오나라가 주동한 반란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오왕 유비를 <세가>가 아니라 <열전>에 수록했다. 오왕 유비는 제후였으되 제후의 실질이 없는 자이기에 <세가>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사마천이 보기에 오왕 유비는 산과 바다의 이익을 맘대로 취해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조조를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는다. 영지를 삭감하자는 조조의 제안이 멀리 내다본 계책이었음은 긍정한다. 하지만, 조조에게 지나친 점이 있었다. 성급하게 이득과 성과를 내려는 마음, 사마천은 이를 권모라 단정한다.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해 나라를 생각하고 제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원앙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원앙은 훌륭한 유세가였지만 그의 계책 또한 권모에 불과했다고 사마천은 평가했다. 원앙이 사적인 원한을 앞세워 조조의 참수를 주장했으므로 이미 시작부터 권모였던 것이다.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책략가는 마음을 헤아린다. 제후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는 제후들을 움직여야 한다. 사마천은 무제 때 주보언의 모책을 높이 평가했다. 제후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성을 나눠주고 왕으로 봉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제후국이 여러 나라로 쪼개지면서 저절로 제후국의 세력이 축소된다. 무제는 주보언의 모책으로 중앙집권을 공고히 했다. 사마천은 모책의 차이가 왕실의 안정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건을 통해 보여주었다.
사마천은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힘을 빼는 ‘지혜로운 방책’의 필요를 역설했다. 인간은 정말 감정의 동물이다. 강압적으로 뺏기는 것보다 스스로 나눠줘야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주보언은 그걸 알았던 것이다. 물론 주보언의 모책은 조조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 때 조조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주보언은 섬세한 사유와 밝은 통찰을 할 수 있었다. 시간과 경험이 모책을 새롭게 만든다. 이것이 역사를 통찰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지혜는 누적되는 경험에 의해 거듭난다. 사마천이 역사를 통해 전하려는 요체가 바로 이것일 터. 사마천은 모책의 차이나는 반복에 초점을 맞췄다. 하여, 사마천은 오초7국의 난이 진압된 이후 제후국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사평에서 특별히 강조했다.
고조 재위시에는 제후들이 모든 세금을 자기 소유로 하였고 스스로 내사(민정관리) 이하의 관리를 임명하였다. 조정에서는 다만 승상만 파견하였고 그 승상은 황금 인신을 패용하였다. 왕이 직접 어사, 정위정, 박사 등의 관리를 임영하였으니 이는 황제와 유사하였다.
오초7국의 반란 이후 오종(경제의 다섯 부인 소생의 아들들)이 왕으로 봉해졌던 시대에는 2,000석급의 관리들은 모두 조정에서 파견하였고, ‘승상’은 ‘상(相)’으로 바뀌어 은으로 만든 인신을 패용하게 되었다. 제후는 세금만을 거두었고 정치 권력은 박탈되었다. 후일 제후 가운데 빈한한 자는 소가 끄는 수레나 탈 수 있었다.
사마천, 「오종세가」, 『사기세가』하, 까치, 624-625쪽
반고는 대체로 사마천의 평가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반고가 강조한 바는 오초 7국의 난을 제압하고 황실을 안정되게 이끈 경제의 치적이었다. 결정적으로 반고는 조조에 대한 평가에서 사마천의 견해와 달랐다.
조조는 나라를 멀리 내다본 방책을 꾸몄지만 자신이 당할 줄은 예상 못했다. 그의 부친이 예견했지만 도랑에서 자살하여 가문의 멸망을 막지 못하였으니, 조괄의 모친이 아들을 지목하여 자기 종족을 지킨 것만도 못했다. 슬프도다! 조조가 끝을 잘 보지는 못했지만 세상은 그 충성심을 애도하였다. 그래서 그가 건의한 여러 대책을 여기에 옮겨 적었다.
「원앙조조전」, 『한서』3권, 명문당, 489-390쪽
반고는 조조의 아버지가 자살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전국시대 조나라 장군 조괄은 전략전술에 뛰어나지 못했다. 조나라 왕은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해 진나라의 백기와 싸우게 했다. 결과는 조나라 군대의 전멸. 백기가 장평에서 조나라 병사 40만을 생매장했던 그 엄청난 사건의 상대 장군이 조괄이었다. 조괄의 어머니는 그가 전쟁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조괄의 패배를 예감했다. 왕에게 조괄을 내보내서는 안된다고 간언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이에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패배해도 조씨 집안은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니의 예감은 사실이 되었고, 조씨 집안은 유지될 수 있었다. 반고는 조조의 아버지도 아들의 참사를 예감했다면 조괄의 어머니처럼 최소한 집안은 지켜야 했다고 비평한다. 반고는 이런 위기에서 자신도 살고 집안도 지켜내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여겼던 것이다.
반고는 조조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사마천은 조조의 계책이 성급하고 일방통행이었음을 비판했지만 반고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조조가 자신의 끝을 보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그의 충심만은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한나라 황실을 지켜내려는 충심은 누구도 깎아내릴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영지삭감에 관해 더 지헤로운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당시 조조의 입장에서 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에 반고는 그 마음 그대로를 인정한 것이다. 성급하게 효과를 내려다 무리수를 둔 조조의 행위를 비평할 수 있지만 황실의 안녕을 위해 전력투구한 진심까지 간과할 수 없었다. 반고는 그 충심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조조의 글들을 간추렸다. 사마천에게 조조의 대책문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고에게는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자료였다. 이에 반고는 조조의 대책문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했다.
문제에게 대책을 올린 자들이 100여 명, 오직 조조만이 상위에 뽑혔다고 한다. 문제는 조조의 계책을 다 채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조조의 대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정치를 펼친 황제는 경제였다. 문제와 경제 시대, 황제들은 신하들의 건의를 대책문으로 받아 소화했다. 조조는 대책에서 삼황오제 시대의 정치를 상기시켰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그 흐름을 같이 했던 시대, 조조는 황제에게 그런 정치를 펼치기를 건의했다. 우주와 몸과 정치가 하나라는 것, 그리하여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가기를 제안했다. 반고가 전하고자 한 조조의 충심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동정이 위로는 하늘의 뜻에 맞으시고 아래로는 지덕에 순응하셨고 그 중간에 인심에 순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라지는 생명이 없었으며 뿌리를 가진 모든 생명이 열매를 맺었고, 촛불처럼 모든 곳을 밝혀 치우침이 없었으며, 은덕이 위로는 날아다니는 새들이나 아래로는 물속과 초목의 모든 생명이 모두 그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사계절이 순조로웠으며, 일월이 빛나고 풍우가 때를 맞추었고 감로가 내렸으며 오곡이 잘 익었고, 요사한 기운이 없었으며 음양의 부조화에 따른 나쁜 기운도 사라져서 백성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 이는 천지의 뜻에 맞은 것이며 치국의 대체에 따른 공적이었습니다.
(「원앙조조전」, 『한서』3권, 명문당, 466-467쪽)
반고는 조조가 오초 7국의 난을 불러온 장본인이지만, 조조의 정책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오초 7국의 난을 불러온 원인이 조조의 정책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지 삭감을 통해 나라의 위기를 막고자 한 마음, 반고에겐 이것이 중요했다. 더구나 조조의 정책에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반고는 확신하고 있었다. 반고는 오초7국의 반란이 전적으로 조조가 불러온 사태라고 보지 않았다.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마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반란을 막아낸 경제를 칭송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고에게 더 중요한 건, 천하를 살리고자 하는 충심이다.
이렇듯 반고와 사마천은 조조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이 중요했다. 다만 그 마음이 향하는 곳이 달랐다. 사마천은 황실을 안정시킬 성과만 생각하고 제후들의 마음을 통찰하지 못한 조조의 성급함이 반란을 불러온 것이라 진단했다. 스스로 영지를 나눠줘서 축소되는 것과 강제로 영지를 뺏기는 것은 천지만큼이나 큰 감정의 차이를 일으킨다. 상대를 헤아리는 통찰과 지혜가 계책의 심급이다. 반고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한 것인지를 따졌다. 개인의 원한이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마음! 이것이면 충분하다. 적어도 조조에게 이런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 반고는 이런 마음을 인정했다. 반고의 『한서』와 사마천의 『사기』는 그 역사서술이 같은 듯하나 이런 미묘한 차이로 재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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