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속의 위기, 제후들을 다스려라!
문경지치(文景之治), 아버지의 원칙을 계승한 경제
문제의 아들이요 두황후의 소생인 유계가 황제에 등극했다. 문제가 대나라 왕이었던 시절의 왕후는 문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고, 이후 왕후의 소생 네 아들도 모두 죽었다. 그리하여, 후궁 소생의 아들 중 유계가 가장 연장으로 태자가 되고, 그 어머니 두희는 황후가 된다.
두희는 여태후 시절 궁궐로 들어왔는데, 궁인 5명씩을 여러 제후국에 보낼 때 대나라로 가게 된다. 두희는 고향이 조나라였기 때문에 담당 환관에게 조나라로 보내 달라 부탁했다. 아뿔싸! 환관이 부탁을 잊어버리고 두희를 대나라로 가는 명단에 올리고 말았다. 울며불며 가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사람이 권하자 마지못해 대나라로 향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두희에게도 인생은 반전의 연속! 대나라 왕 즉 문제가 오직 두희만을 총애하여 딸도 낳고 아들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황제가 되고, 덕분에 자신은 황후가 되었다. 한나라 초기 황실 사람들의 인생은 이렇게 드라마틱했다. 『한서』를 읽어갈수록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임을 실감하게 된다.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도 황제로 길러진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황제에 오른 케이스이다. 그렇지만 인품과 능력 면에서 모자람이 없었다. 아버지를 뒤이어 경제 때도 풍요와 안정을 구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이 두 시기, 한나라 최고의 안정을 이뤘기에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부른다.
역사가 반고에게 있어 통치의 제일은 백성의 안정이고, 백성의 안정은 황제들의 검소한 생활과 공경하고 인애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이었다. 한나라 최고의 안정기를 이끌었던 문제와 경제가 바로 그런 황제였다. 문제와 경제가 검소, 공경, 인애를 바탕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한나라 백성은 풍족하고 편안하게 살았던 것이다. 반고는 문제 본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경제 본기에서도 검소하고 인애한 경제의 통치에 주목한다.
한이 건국되고서 번잡하고 가혹한 조문을 많이 없애면서 백성과 함께 휴식했었다. 효문제는 여기에 공경과 검소를 보태었고, 효경제는 문제의 원칙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랐기에 건국 후 50, 60년에 풍속이 바뀌어 백성들은 순박해졌다. 주에서는 성왕과 강왕의 성세를, 한에서는 문제와 경제 시대를 말할 수 있으니, 훌륭하도다!
「경제기」, 『한서』1권, 282쪽
반고는 아버지 문제의 통치 원칙을 바꾸지 않고 지켜간 경제를 칭송한다. 그리고 그런 원칙을 천명하고 실천했던 증거로써 경제의 ‘조서’를 많이 수록한다. 사마천의 「효경제본기」에서는 경제의 조서를 직접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정책만 정리해서 보여준다. 이에 비해 반고는 경제의 조서 내용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왕조의 정책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조서에서 백성을 걱정하지 않는 경우는 없겠지만, 반고가 보기에 백성을 대하는 경제의 원칙은 상기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여름 4월 조서를 내려 말했다.
“무늬를 놓고 나무나 쇠를 조각하는 일은 농사를 못 짓게 하고, 비단에 수를 놓고 매듭을 짜는 일은 여인의 길쌈에 손해가 된다. 농사를 못 지으면 굶주리고 길쌈을 못하면 추위에 떨게 된다. 굶주림과 추위가 한꺼번에 닥치면 나쁜 짓을 안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짐은 친경하고 황후는 친히 누에를 치며 종묘에 바칠 곡식과 제복을 준비하며 백성에게 솔선하고, 헌상하는 물건도 물리치며 음식을 줄였고, 요역과 부세를 줄였으며 백성들이 농사와 길쌈을 권하여 평소에 비축으로 재해를 대비케 했었다. 또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지 못하게 하고, 부자가 빈자에게 포악한 짓을 못하게 했으며, 노인네가 천수를 누리고 어린애나 고아도 자랄 수 있게 하였다. 금년에도 흉년이 든다면 백성들의 먹을 것이 크게 부족할 터인데 그 허물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경제기」, 『한서』1권. 278쪽
통치자는 기본적으로 사치를 경계해야 한다. 사치는 서민들의 기본 생활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윗사람이나 부자가 검소해야 백성들의 일용이 보장된다. 이러면 재해에도 대비할 수 있다. 통치자가 먼저 의식주에서 필요 이상의 사치를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요역과 세금을 줄여주면, 천하는 편안하다. 흉년에 대비하는 것은 이 원칙을 잊지 않고 지켜가는 것이다. 반고는 이 조서에서 드러나는 경제의 솔선수범과 백성을 향한 정성스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고는 또한 청렴한 관리를 뽑으려는 경제의 의도에 주목한다. 본기에 실린 다음 조서는 갑질 사회 때문에 떠들썩한 요즈음 내 안의 ‘을’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5월 조서를 내려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고 속임수에 당할 것을 걱정하며, 자신이 용기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포악한 자에게 당하는 것을 걱정하며, 빈곤을 걱정하지만 탐욕을 걱정하지 않는다. 청렴한 사람은 욕망을 억제하여 쉽게 만족한다. 지금 자산이 10만전 이상이어야 겨우 관리가 될 수 있는데 청렴한 지사라면 재산이 많을 필요는 없다. 상인 명단에 오른 사람은 관리가 될 수 없지만, 재산이 없는 사람도 관리가 될 수 없어 짐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재산이 4만 전만 되어도 관리가 될 수 있도록 고쳐서 청렴한 인재가 오랫동안 관직을 얻지 못하거나 탐욕한 자가 큰 이득을 챙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경제기」, 『한서』1권, 280쪽
경제는 갑질을 양산하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을 문제 삼는다. 경제의 지적처럼 우리는 누군가한테 사기당할까, 억압받을까는 걱정하지만 스스로 지혜롭고 두려움이 없는 자로 살고 있는지를 고민한 적은 없다. 또한 못사는 것은 걱정하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의 탐욕을 부끄러워 하거나 염려해 본 적은 없다. 을의 마음으로 두려움을 안고 살 때, 사기 치고, 억압하고, 탐욕스런 갑이 되지 않고는 을에서 벗어날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이러면 누군가에게는 갑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을이 되는 배치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하여, 갑질에 대한 을들의 근본적인 반란은 내 안에 새겨져 있는 수동적인 ‘을’의 위축되고 결핍된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이 사회의 무수한 갑들을 폭로하고 물리치는 동시에 내 안에 숨어 있는 갑이고자 하는 마음과 을의 마음가짐을 깨뜨려야 진정 이 사회에서 독단과 폭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경제가 말했듯 스스로 지혜로워지고, 스스로 용기를 갖고, 스스로의 탐욕을 걱정할 때, 갑을 관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청렴한 사람을 인재로 뽑으려 했던 이유는 명약관화했다. 청렴한 자는 욕망을 다스리고 이득을 챙기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자이다. 탐욕은 폭력을 불러온다. 갑을 관계라는 배치를 만드는 건, 우리 안에 활활 타고 있는 탐욕과 독점의 욕망이다. 그러니 관리의 독단과 폭압을 방지하려면, 갑을 관계를 넘어서려면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인재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의 원칙이자, 이 시대 황로학의 비전이었던 것이다.
동성(同姓)의 제후를 경계하라!
문제와 경제의 시대, 천하는 안락했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안락과 풍요 뒤에 늘 위태로움이 뒤따른다. 개인도 그렇지만 한 나라의 역사도 그런 것 같다. 아무 일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정말 어렵다. 모든 게 편안하면 몸이 근질거려 기꺼이 일을 만들고 위태로운 상태로 가려고 발버둥치지 않는가?
한나라도 그랬다. 전쟁의 시기 항우라는 공동의 적을 합심해서 물리쳤으나 정작 통일이 되자 초나라의 회음후 한신, 회남의 경포, 양의 팽월, 한왕 신, 조나라의 장오, 연나라의 노관, 대나라의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다. 건국 후 10여 년에 반란이 9번이나 있었다. 그후 여씨를 물리치고 이성 제후들이 일으킬 분란의 씨앗이 완전히 제거되어 천하가 안정되자, 이제는 종실의 제후들이 들썩거렸다. 그래서 문제 때의 정치인이자 문사였던 가의는 한나라 초기의 역사에 의거하여 하나의 명제를 만들어냈다. “이성제후는 위험하고 동성제후는 틀림없이 분란을 일으킨다.”
문제는 백성들에게도 인애의 군주요, 인척들에게도 너그러운 군주였음에도 동성의 제후들은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휘두르며 갈등을 일으켰다. 회남왕 유장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굴다 궁지에 몰려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자살했다. 유장은 고조의 8남이자 문제의 동생이다. 제북왕 유흥거는 문제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불만 때문에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되어 자살했다. 유흥거는 고조의 2남인 유비의 아들이자 문제의 조카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세력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당시 다른 지역의 동성 제후들도 독립적인 힘을 과시하며 암암리에 황제 권력을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문제 주변의 신하들은 제후들의 움직임에서 위기를 감지했다. 문제가 신임했던 신하 가의는 <치안책(治安策)>을 올려 제후들을 경계하고 강력하게 다스릴 것을 건의하였다. 가의는 현재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제후국을 다스리지만, 앞으로 제후국들이 힘을 키워 자립한다면 단속이 어려울 것이라 예측하고, 그 조짐이 보일 때 싹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지금 천하가 잠시 안정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큰 제후국의 왕이 아직은 어려서 한에서 보낸 태부와 승상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 뒤에 제후국의 왕이 장성하여 관례를 치르고 혈기가 왕성해지면 한의 태부와 승상은 병을 핑계로 은퇴하고 제후는 그 아래 군승이나 군위 등의 관직에 자기 사람을 심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회남왕이나 제북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면 비록 요순일지라도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가의전」, 『한서』3권, 358쪽
가의가 보기에 지금은 제후국의 왕들이 어려서 큰 혼란은 없지만 앞으로 장성하면 황제의 권력을 넘볼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동성의 제후들은 황제에 대해 명분은 신하지만 실제로는 평민 형제들의 심정으로 황제의 법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천자처럼 생각한다는 것. 그리하여 마음대로 벼슬을 내리고 죄인도 사면하고 심한 경우에는 황색 수레 덮개도 사용하리라는 것. 그러니 제후국 왕들이 혈기왕성해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이 약했다. 형제나 사촌, 친족들의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회남왕과 제북왕의 경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바로 제압해야 했는데, 황제가 인정에 이끌려 다니다가 반란으로 일을 키우게 된 것이다. 가의는 황제의 우유부단함을 문제 삼았다. 가의의 판단으론, 제후와 왕들은 모두 엉덩이와 허벅지 뼈인데 도끼를 쓰지 않고 칼을 쓴다면 칼날은 망가지거나 부러진다. 회남왕과 제북왕의 경우도 칼날이 아니라 도끼를 써야 했다. 도끼를 쓰지 않으면 한나라는 위태롭다.
가의는 제후국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회남왕과 제북왕은 자살했고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앞으로 제후국들의 반란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오왕 유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비는 고조의 둘째 형 유희의 아들이자 문제의 사촌이다. 황제는 장년이고 통치에 아무 과실도 없고 제후들에게 많은 은택을 주고 있지만, 제후국들 또한 풍요롭고 안락하며 경제적으로 성장세에 있었기 때문에 힘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들끓었다. 한나라는 살만해졌고, 풍요와 안락이 넘쳐났다. 이럴 때 스멀스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위기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때 오나라는 예장군에 구리광산이 있어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고, 동쪽에서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제조하여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도 국고가 풍족한 상태였다.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인심을 얻었고, 돈으로 병졸을 구해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상, 제후들이 황제로 자칭할 날이 멀지 않았다.
위기를 예측한 가의는 처방전을 내려준다.
여러 왕들이 충성을 다해 따르게 하려면 장사왕처럼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고 신하로서 참형을 받지 않게 하려면 많은 제후들을 분봉하되 그 힘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국력이 약하면 의리로 쉽게 부릴 수 있고 나라가 작으면 사심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전, 한서3권, 371
제후국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제후국들이 강대해지면 통제가 불가능함은 분명한 사실. 그리하여 가의는 봉지를 삭감하여 많은 친족들에게 나눠줄 것을 제안했다. 독자적인 군대를 갖추고 제후의 사람으로 관리를 세우면 중앙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제후의 영지를 삭감하는 것이었다. 가의의 현실 분석은 예리했으며, 예측은 정확했다. 이 시기 조조도 봉지 삭감을 건의했다. 그러나 황제는 환부에 메쓰를 대지 않았다. 친족인 제후들에게 야박하게 할 수 없었고, 여기에 따르는 항명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후들을 다스리는 과제는 경제에게로 넘어갔다. 조조는 경제에게 건의했다. 고조는 서얼인 도혜왕을 제나라 72개 성의 왕으로 삼았고, 동생인 원왕을 초나라 40개 성의 왕으로 삼았으며, 형의 아들을 오나라 50여개 성의 왕으로 삼았다. 그 결과 이 3명이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 오나라가 국고의 풍족함과 사병에 의지하여 황제에게 항명하고 있는데, 제나라 초나라와 연합하면 그 혼란은 막을 수 없다. 영지를 삭감해도 반역할 것이고, 삭감하지 않아도 반역할 것이다. 그러나 삭감하면 피해가 작지만, 삭감하지 않으면 한나라의 피해는 심각하다. 조조는 영지의 삭감만이 혼란을 막는 최선의 방법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조조의 건의는 경제를 움직였다. 경제는 조조의 대책대로 과감하게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했다. 초나라 왕 유무는 문제의 어머니 박태후의 복상기간에 상청에서 간음했기에 사형 대신 동해군을 삭감하는 것으로 사면됐고, 조나라 왕은 죄를 지어 영지인 상산군을 삭감당했고, 교서왕 유앙은 작위를 팔아먹은 죄를 지어 6개 현을 삭감당한다. 오나라 왕 유비는 위기를 느꼈다. 삭감이 여기서 끝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반기를 들었다. 가의와 조조의 예측대로 제후들은 황제 권력에 맞섰다. 이렇게 오초칠국의 반란이 일어났다. 아버지 문제가 위태로운 조짐이 드러났을 때 해결했으면 오초칠국의 난으로 확대되지 않았을까? 아들 경제가 도끼를 들자 제후들의 힘이 폭발했다.
오초칠국의 난에 얽힌 세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글_길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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