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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던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미스 리틀 선샤인』- 가족이라는 ‘홈 패인 공간’

by 북드라망 2019. 3. 5.

가족이라는 ‘홈 패인 공간’

조나던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미스 리틀 선샤인』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1.  

‘성공으로 향하는 9단계’를 강의하는 아버지는 보잘 것 없는 출판 계약 하나만 바라봐야 하는 실패자다. 어머니는 몇 주에 걸쳐 저녁 식사를 패스트푸드와 종이 식기로 때우는 중이다. 할아버지는 마약 중독자에다 아이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섹드립을 일삼고, 문학교수이자 게이인 외삼촌은 동성 애인에게 차여 자살을 시도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런가 하면 아들은 항공학교에 들어가 파일럿이 되겠다며 아홉 달째 침묵시위 중이며 일곱 살짜리 막내딸은 오매불망 미인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만을 꿈꾼다.

대충 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이 콩가루 집안이 바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가족이 정상이 아니란 건 비단 우리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등장인물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가족이 제대로 된 가족은 못됨을 알고 있다. 단지 그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버리고, 입을 다물고, 애써 모른 척할 뿐이다.

 

그런데, 이 가족은 왜 ‘정상’이 아닌가?

 



왜 우리는, 또한 그들은 이 가족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일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그 까닭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일 것이다. 벌이를 제대로 못하는 아버지부터 애들답지 않게 미인대회에 정신이 팔린 딸까지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들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가족은, ‘답지 않다.’

부모는 부모답지 않고 애들은 애들답지 않으며 할아버지와 외삼촌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이도 가족 내의 자기 책임을 다하면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할아버지나 막내딸 올리브는 그 사실에 그나마 둔감한 편이지만, 아버지 리처드와 엄마 쉐릴은 매우 민감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그들은 답지 않은 자신을 돌아볼 때 자격지심을, 답지 않은 다른 가족들을 바라볼 때는 분노와 답답함을 느낀다.


“……올리브. 음, 프랭크 삼촌은 말야. 사실은 사고를 당한 게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음……삼촌은 자살하려고 했었어.”

“그랬어요? 왜요?”

“어, 미안하지만, 올리브. 그건 적절한 이야깃거리가 아닌 것 같다. 삼촌이 편하게 식사하게 해드리자. 알았지?”

“삼촌, 왜 자살하려고 했어요?”

“안 돼. 대답하지 마, 프랭크.”

“……내가 자살을 하려고 한 이유는 행복할 수 없어서야.”

“삼촌 말 듣지 마라. 삼촌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여보!”

“미안! 하지만 이건 식탁에서 하기에는 부적절한 대화라고. 특히 일곱 살짜리 꼬마한테는!”

 

-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중

 

 물론 우리는 세상 모든 정체성에 대하여 ‘다움’을 요구한다. 하다못해 사람도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그러나 가족에 있어 ‘가족다움’은 다른 그 어떤 경우보다도 특별하고, 민감하고, 세세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 해도 가족은 여전히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며 가장 사적인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가족다움을, ‘홈 패인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2.   

‘홈 패인 공간’이란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두 철학자가 주장한 개념인데, 얼핏 난해하게 들리지만 실은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이다.

아주 평평한, 예를 들면 거울이나 유리 같은 매끄러운 표면을 상상해보자. 그 위에 물을 붓는다면 물은 어느 방향으로라도 흘러갈 수 있다. 이런 ‘매끄러운 공간’ 위에서 물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어떤 도랑(홈)을 길게 파놓는다면 어떨까? 부어진 물은 그 도랑으로 흘러들 것이고, 오직 도랑이 파인 길을 따라서만 흘러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몇 번 물을 붓는다 한들 똑같은 결과가 반복될 것이다. 이 ‘홈 패인 공간’에서 물은 반복된 움직임 속에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바로 홈 패인 공간의 속성이다. 홈 패인 공간에는 이미 정해진 규칙과 목적, 역할이 있고, 사람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이 그 정해진 홈을 따라 일정한 움직임을 반복한다. 설령 외부로부터 새로운 요소가 더해진다 해도 이미 파여 있는 홈으로 흘러들어 다른 것들과 같이 공간의 규칙과 목적에 따라 역할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치와 의미를 얻는다. 규칙에 익숙해짐을 통해 안정감과 생활을 보장받지만, 규칙을 거부하려 한다면 공간에서 추방된다. 공간으로 흘러들어 붙들리는 건 쉬우나 모든 걸 버리고 빠져나가기는 어렵다.




이 설명에 가족을 대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정은 ‘가족다움’이란 홈을 따라 흐르는 홈 패인 공간이다. 부모는 부모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이미 패인 홈을 따라 돌고 돌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길 강요받는다. 아버지는 오직 집안을 부양할 수 있는 가장일 때 가치가 있으며, 어머니이길 거부하는 어머니에게 집에 설 자리는 없고, 9개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가족에게 질려버린 아들이라 할지라도 모든 걸 버리고 떠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엇나가지 않고 홈을 충실히 따르는 그 순간이 바로 홈 패인 공간의 정상 상태다. 정상 상태의 가족이야말로 ‘제대로 된’ 가족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미스 리틀 선샤인』으로 돌아가 보자. 비정상적인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과연 이 길 잃은 이들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담아내고 있는가?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가족들 모두가 서로에게 지쳐갈 무렵, 막내딸 올리브가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인대회 <미스 리틀 선샤인>의 본선 출전자격을 얻어냈다는 연락이 온다. 일요일까지 캘리포니아로 가야하는데 집안에는 돈이 없어 비행기를 타는 건 무리다. 결국 작은 미니버스 하나를 아버지가 직접 운전해 가기로 하고, 미인대회를 꼭 봐야겠다는 이유로 할아버지가, 자살 시도한 사람을 혼자 놔둘 수 없다는 이유로 삼촌이, 항공학교 허가서를 써준다는 조건부로 아들까지 온 가족이 캘리포니아를 향한 여정에 오른다.


물론 출발한 뒤에도 이 가족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온갖 사건이 잇달으면서 가족들은 제각기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에 몰리고 다른 가족들과 자기 자신을 향해 분노와 자기혐오를 폭발시킨다. 그 끝에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 그들의 처지를 구제해주지도 않는다. 단지 모든 위기에 확정 선고가 내려졌을 뿐이다. 삼촌은 휴게소에서 옛 애인과 맞닥뜨린다. 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출판 계약은 끝장이 났고, 아들은 색맹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항공학교에 갈 가능성이 사라졌으며, 급기야 할아버지는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런데도 이들은 캘리포니아로의 여정을 계속해나간다. 죽은 할아버지가 올리브의 미인대회를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과, 여기서 포기하면 패배자가 될 뿐이라는 아버지의 주장과, 이미 700마일이나 달려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그 순간 이들을 묶어주는 건 그들이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가족이라는 역할과 책임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홈 패인 공간이 완전히 박살난 가운데, 좁아터진 미니버스라는 제한된 공간과 어떻게든 미인대회장까지 가야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목표가 그들을 함께 있도록 하는 오직 두 가지 조건들이다. 오직 제한되고 단순한 현실이 운명공동체로서의 그들을 유지시킨다. 또한 그럼으로써 처음으로 ‘가족이기 때문에’가 아닌 다른 이유로 함께 있게 된 그들은 가족의 홈 속에서 벗어난 채 서로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크게 두 장면에서 그 과정을 묘사한다. 하나는 각자의 꿈과 사랑에 있어 완전히 좌절한 삼촌과 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게이이자 실패한 작가였던 프루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실패의 순간 또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란 대답에 함께 도달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지금껏 달려온 이유, 최종 종착지인 <미스 리틀 선샤인> 미인대회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도착한 미인대회였지만 막상 대회를 보게 된 가족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참가자인 일곱 살짜리 아이들은 하나같이 짙은 화장과 비쩍 마른 몸,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채 구태의연한 장기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동통한 몸매에 화장도 안하다시피 하고 남장에 가까운 옷차림을 준비한 올리브는 그 무대에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애써 웃으며 대회를 지켜보던 아버지, 그리고 삼촌과의 대화 끝에 다시 말을 하기로 결정한 아들은 결국 분장실로 뛰어들어 어머니와 올리브를 붙든다.


“주위를 보세요, 여긴 엿같다구요! 봐요! 난 이런 인간들이 올리브한테 점수매기는 거 싫어요! 엿 먹으라고 해요!”

“너무 늦었어―.”

“늦지 않았어요! 당신은 엄마잖아요. 올리브를 보호해야 하잖아요! 다들 올리브를 비웃을 거에요. 엄마, 제발 못하게 해요.”

 

두 남자는 아버지로서, 오빠로서 딸이자 여동생인 올리브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주변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두 사람은 체면이나 다른 그 무엇보다 가족으로서 올리브를 소중히 여겼기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 동시에 쉐릴에게도 어머니의 의무를 다해 올리브를 보호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쉐릴은 울먹이면서도 그들 앞에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듀웨인. 내 말 들어. 올리브는 그냥 올리브야. 열심히 연습했고, 모든 걸 여기 쏟았어. 이걸 빼앗을 순 없어. 그럴 순 없는 거야. 동생을 보호하려는 거 알아. 안다구. 하지만 올리브는 올리브로 놔 두자구.”

“올리브, 날 봐. 이거 하기 싫다 해도 괜찮아. 네가 이걸 그만두고 싶어 해도 우린 괜찮아. 그래도 네가 자랑스러워.”

 

무대에 올라가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한 상황, 올리브를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와 오빠의 주장에 대해 쉐릴은 그 선택을 온전히 올리브 자신의 몫으로 맡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겼다고, 어른이자 어머니로서 무책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허나 쉐릴은 ‘보호’라는 어머니의 방식으로 올리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보다 올리브의 꿈과 쌓아온 노력은 존중하는 방식으로 올리브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의 태도에서 읽을 수 있는 건 그녀가 오직 어머니로서만 올리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어머니이기 때문에 올리브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올리브는 쉐릴과 두 남자의 소중한 가족이지만, 올리브는 또한 그저 한 사람의 올리브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애정은 가족이라는 형식으로 못박아둘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다. 두 남자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문다. 침묵 속에 올리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무대로 나아가 입을 연다.

 

“음, 이 춤을 우리 할아버지께 바치고 싶어요. 이걸 제게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그리고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그들의 <미스 리틀 선샤인>은 막을 내린다.

파란만장했던 미인대회를 마치고 그들은 마침내 귀갓길에 오른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다울 수 없고, 어머니도 삼촌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비정상적인 가족이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가족이라 부를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함께하는 이유를 ‘가족이기 때문에’라고 간단히 줄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들을 묶어내는 건 혈연이나 가족이란 이름이 아니다. 캘리포니아로 오는 길 위에서 그들은 묶어준 건 좁아터진 차와 미인대회였고, 미인대회가 끝난 뒤 영화의 엔딩에서 그들을 묶어준 건 가족이란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그 무언가Something였다.

나는 그 무언가를 가족❜(가족-프라임)이라고 부르겠다.

 


 

3.  

가족❜가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가령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왜 『미스 리틀 선샤인』의 엔딩에서 주인공들이 가족으로 묶여 있는 게 아니라고 하죠? 오히려 그들은 이제 서로 사랑하는 진정한 가족이 된 게 아닌가요?”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클리셰를 받아들이기는 방식이기도 하다. 무언가 비정상적인 가족이 있고 그들이 함께 위기를 겪은 끝에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그들의 ‘변화’가 아닌 가족의 ‘회복’으로 읽어낸다. 즉, 가족이란 원래부터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인데 비정상적 가족은 그것이 결핍된 상태였고 위기를 거쳐 사랑을 회복해 정상 가족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니까 당연히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족다움’이라는 관점인데, 헌데 이 때 가족의 사랑이란 자연의 산물로서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사회의 산물로서 ‘수행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모순이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의무로 수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을 법률로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모순은 가족다움이라는 환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은폐한다 : 설령 가족 관계라 하더라도 애정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러 구체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며, 따라서 ‘가족다움’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통일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형태와 함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하고 본다면 『미스 리틀 선샤인』의 주인공들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사랑을 ‘회복’한 게 아니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홈 패인 공간에서 벗어나 캘리포니아로의 길 위에 내던져짐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는 과정 속에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러한 자신들로 ‘변화’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가족❜로 만난다. 


그래서, 그 무언가Something, 가족❜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고,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것을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미스 리틀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들과 대화들을 일일이 묘사해야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가족❜는, 그들이 처한 맥락에 따라 결코 한 가지로 일반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유대감이다. ‘가족이기 때문에’라는 이유와 ‘가족이라면 마땅히’라는 의무 없이도 - 가정이라는 익숙한 홈 없이도,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구체적 과정이자, 그 과정이 행해지는 하나하나의 관계들 그 자체다.


이러한 가족❜는 혈연으로 전혀 이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형성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유사가족’으로 표현하는 관계인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만비키 가족』이나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이 이러한 관계를 다룬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음에도 함께 살며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보살피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직 그와 가장 유사하고 익숙한 공동체에 대해 우리 갖고 있는 유일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막상 그들이 왜 가족인가를 설명해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많은 이들은 대개 그럴 듯한 대답을 찾지 못하거나 제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족❜는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그 무언가다 그럼에도 그것을 구태여 가족❜라고 부르는 까닭은 오직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유한하고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밖에 때문이다.




나는 앞서 독립을 원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와(『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더 이상 가부장일 수 없는 아버지들의 이야기와(『오이대왕』) 이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어머니들의 이야기와(『우리 엄마는 왜?』), 급변하는 현실 속에 변화하는 가족의 형태와, 집안마다 다른 각 가족들의 사정과, 그 모든 이유로 인해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제는 그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할 때인 듯 싶다. 내가 사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가족의 비밀은 이미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가족 형식은 불가피하게 해체되고 있고, 그처럼 수많은 형태의 관계들이 있음에도 그 홈으로 무리하게 회귀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결핍과 좌절 속에 가족❜의 가능성마저 상실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몇몇 ‘진보적인’ 이들이 ‘가족을 해체하라’는 발화를 할 때 사람들은 경악하거나 경멸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 말이 이 시대의 인간적 관계의 마지막 보루인 가정을 파괴하고, 세상 모든 인간들을 타인과 같이 대하라는 의미로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족을 해체하라’는 발화는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그 형식을 해체하라는 것으로, “모든 가족을 타인과 같이 대하라”, 즉 고립된 개인이 되라는 의미가 아닌 “그 어떤 타인과도 가족❜가 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의미다. 가족이라는 홈 없이도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던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라는 뜻이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가운데 어떻게 가족❜를 만들어갈 것인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이것은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이것은 어쩌면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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