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익숙함’
김고연주, 『우리 엄마는 왜?』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문탁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혼 여성이 상당히 많고 그분들 중 대부분은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문탁네트워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니 가끔은 나와 함께 공부를 하거나 여타 활동을 함께하는 선생님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로 인해 나는 때때로 매우 미묘한 상황에 처한다. 한 번은 세미나 시간에 다른 선생님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가르치는 녀석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녀석은 그 선생님의 자녀이기도 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 아이의 어머니에게도 해도 될까? 무릇 아이들에게는 다른 어른에게는 말할 수 있어도 어머니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는 법이다. 또한 어떠한 부모라도 자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보다 민감해지는 법이다. 그 순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선생님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고 평소와는 뭔가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압박감과 맞닥뜨렸다. 그 낯설음과 압박감을 만들어낸 건 내가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어머니로서의 정체성, 가족으로서의 정체성.
내가 『우리 엄마는 왜?』라는 책을 통해 다루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회가 규정한 어머니는 어떠한 존재인가? 어머니는 왜 그러한 존재가 되는가?
그리고 이 수업은 지금껏 내가 했던 수업들 중 가장 힘겨웠던 수업 중 하나로 남았다.
1.
『우리 엄마는 왜?』는 여러모로 여성학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과 사회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그것들이 어떠한 사회 구조 속에서 형성되는가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실제 아이들과의 인터뷰를 여럿 활용하는데다 사용하는 말들도 쉽고, 무엇보다 화자인 작가가 아이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형태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는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 한 노력을 곳곳에서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녀석들은 ‘매니저 엄마’에 대한 내용에 적잖게 공감했다.
「……아이의 하루 일과 뿐 아니라 학기, 방학, 학년에 맞춰 세세한 계획을 세웁니다. 학기 중에는 학교 수업과 학원, 과외를 병행시키다가, 방학 중에는 아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과목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전문 입시 학원에 보내거나 고액 과외를 시키고, 봉사 동과 각종 경시대회에 참가시켜 대학 진학에 유리한 스펙을 쌓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마들은 마치 연예인을 관리하는 매니저 같다는 의미로 ‘매니저 엄마’라고 불립니다.」 (28p)
원우와 연희가 앞 다투어 말을 꺼냈다.
"저희 동생은요, 완전 연예인 취급을 받거든요.”
“엄마가 이렇게 해주면 성적 올라가는 부스터? 뭐 그런 역할을 해주는 건 좋은데,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요. 저도 엄마 때문에 학원 갔다가 스트레스 너무 쌓이고 기분도 상해서 끊어버렸어요.”
“제 친구 엄마는요. 다른 애들을 완전 다 성적가지고 따진대요. 걔가 친구를 데려오면 그 친구가 성적이 얼마나 나오는지만 물어보고, 더 높으면 다음에는 그 친구 이겨야 한다고 하고, 점수 낮으면 그 친구랑 어울리지 말라고 하고…….”
또, ‘워킹맘’에 대해서도 녀석들은 할 말이 많았다.
“저는 이 부분이 공감 갔어요. 여기 실린 인터뷰요. 다른 엄마들은 다 집에 있는데, 우리 엄마는 일해서 학교 끝나고 데리러 오거나 이럴 때 못 오는 거…….”
놔두면 이야기가 끝도 없을 것 같아 중간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오이대왕』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기 버거워했던 것과 달리, 어머니에 대해서는 기억도 감정도 할 말들이 많은 듯 했다. 하지만 서로 이야기를 풀고, 비슷한 기억들을 견주며 공감만 하라고 이 책을 고른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내가 던질 질문,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쩌면 『오이대왕』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녀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자, 그래서. 책에는 엄마에 대한 어떤 내용들이 나왔지? 매니저 엄마, 일하는 엄마, 주부인 엄마, 희생하는 엄마……. 그 외에도 엄마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지?”
“““네.”””
“그래. 그럼, 책에서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묻는다.
“엄마가 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오이대왕』의 아버지는 너무나 낯설고, 『우리 엄마는 왜?』의 엄마는 너무나 익숙하다. 지나친 낯설음도, 지나친 익숙함도 몰이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엄마에 대한 그 몰이해를 극복하는 것이다. 제목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 엄마는 왜?”
왜, 엄마는 매니저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나?
왜, 엄마는 일해야만 하는가?
왜, 엄마는 아이를(여러분을) 키우고 희생하는 존재가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위하여 이 책은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과, 그 속에서 어머니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들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그러한 분석들은 작금에는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세기보다 가부장적 아버지들이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패러다임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처럼, 집안에서 어머니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강해지고 직장에서 일하는 어머니들이 늘어났다 해도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패러다임 역시 여전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 학벌과 스펙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에도,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에도, 핵가족 체제가 붕괴되고 있는 시대에도. 문제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어머니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책의 분석을 차례차례 짚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설명했고, 아이들은 그 때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이 수업을 버겁게 느끼게 만든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 자, 이걸 보렴. 사회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엄마들은 이럴 수밖에 없어. 엄마들도 이렇게 많은 고통을 받고 있고…….
그리고 그 다음.
그래서, 나는 녀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지?
그럴 수밖에 없는 ‘매니저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 뜻대로 따라드려라? ‘일하는 엄마’가 너희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라? 아니면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와 그런 사회를 따라가는 엄마에게 반항해라?
엄마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구조와, 엄마들이 느끼는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지?
나는 결국 녀석들에게 해줄 말을 찾지 못했고,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 날의 수업을 마쳤다.
2.
그 날 수업에서 날 힘겹게 만들었던 건 어떠한 무력감이었다. 나는 학원에서 문제집을 풀어주듯 책의 내용을 해설하고 설명해줄 수는 있었지만, 어머니란 사회적 존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줄 수는 있었지만 그 앎이 실제 녀석들의 삶에 어떻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나 자신마저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그 수업 뒤에도 나는 몇 번이나 각자의 어머니에 대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 중 대부분은 ‘매니저 엄마’에 대한 변함없는 불만과 고통의 호소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입장을 받아들여 수긍하거나, 아니면 그 뜻을 거슬러 반항을 하는 두 가지 선택뿐이고 그 어느 쪽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 것이며,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언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시스템을 분석하는 일 자체는 쉽다. 구조와 메커니즘,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 “왜?”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그 다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를 자문할 때이다.
이것은 누군가에 국한된 어려움이 아니다. 『우리 엄마는 왜?』도 그랬지만,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앞서 『오이대왕』을 돌이켜보며 나는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도 언젠가는 은퇴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가 공적 영역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은 급감할 것이며, 그는 더 이상 가족과 사회의 경계에 머무를 힘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평생을 그 자리에만 머물러온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경계에서 스스로 버틸 힘을 잃은 그는 가족에게도 사회에게도 외부인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가족들을 두렵게 하면서도 그러한 자리가 아니면 자신이 설 곳이 없다는 두려움을 스스로도 품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오이대왕』을 읽고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그것이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라,” 『우리 엄마는 왜?』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를 이해하라.” 그렇다면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립을 열망하는 아이들을 이해하라.”
이해하라는 말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그 다음으로 생략된 수많은 침묵의 명령들이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서로를 위로하라.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가족의 본질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우리는 문제를 치워버리기보다 그것을 끌어안은 채 고통을 감내하고 그 감내할 힘을 얻기 위해 서로에게서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렇기에 ‘해결하라’, ‘깨뜨려라’가 아닌 ‘이해하라’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족의 이름이 갖는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가족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 개인의 삶의 차원으로 가져오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내가 가족 제도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인문학적 담론들을 접하고 그 논거들에서 설득력을 느낀다 해도 그것을 우리 부모님 앞에서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처럼. 그와 같은 내용들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한 동료들이 있음에도 ‘어머니인 그들’에 대해서는 낯설음과 함께 무언가 그 주제로 말을 꺼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사실, 녀석들이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라는 사실, 그 분들이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라는 사실은 불변하는 고유의 무언가가 되어 발을 잡아 끈다. 그것을 떨쳐내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변혁을 시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또 하나 우리가 의심해야 할 지점, 우리가 감내해야 할 어려움은 가족이란 개념에 있어 ‘이해하라’는 발화가 실제로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 엄마는 왜?』와 같은 책들은 어머니, 아버지, 혹은 자녀들이라는 역할을 둘러싼 사회적 요구와 압력, 고통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지식만으로 과연 우리 각각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이들을 이해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적인 조건들은 사회적인 조건으로 실재하는 것이고, 그와는 별개로 각각의 가족들에게는 그 가족들만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맥락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세부적 맥락들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 없이 다만 사회구조적인 일반론만을 가지고 나의 가족들을 이해했다고 믿는다면, 그 피상적 이해는 되레 가족에 대한 전통적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결과만을 낳을 수도 있다.
『우리 엄마는 왜?』를 읽다보면 아이들의 시선에 맞추려 한 저자의 노력에 감탄하게 되는 동시에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각자의 어머니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인터뷰를 읽을 때 느껴지는 생생함에 비해, 그것을 하나의 일반적 사회 담론에 적용하여 전개하는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말라붙은 나뭇가지를 씹는 것 같은 무미건조함이 다가온다. 이것이야말로 아마도 가족 문제에 있어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현실과 일반적 지식담론의 괴리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많이 접했을 저자가 이 괴리를 느끼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설령 저자가 그것을 느꼈다 해도 가족을 하나의 사회 문제로 제기하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포괄성을 갖춘 일반담론의 언어로 바꿔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이를 극복할 언어가 있을까? 아이들과 진정으로 함께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언어가 우리에게 존재할까?
3.
나는 이 해의 다른 그 어떤 주제보다도 ‘가족’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많은 고뇌와 자기검열을 했다. 아이들에게 가족에 대하여 이 정도로 진보적인 담론을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내가 너무 보수적인 관점에 매달리는 것일까? 가족의 문제는 모두 제각각인데, 내가 너무 일반론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 이 글을 읽는 사람들, 특히 어머니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걱정이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어머니들을 향한(또한 아버지들을 향한) 사회적인 요구와 부담, 그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에 대하여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혹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에 대하여 알게 된 지금, 우리가 보다 능동적이고 근본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며 그에 대한 어려움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일종의 도약이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가 내딛어 온 땅을 박차고 구름에 휩싸인 허공으로 뛰어드는 도약. 그 날 아이들에게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하지만 언젠가는 함께 그에 대해 말해볼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도약에 대한 이야기이다.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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