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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리포트

쿠바리포트(1) : 도착하다, ‘벌써’가 아니라 ‘고작’

by 북드라망 2018. 5. 29.
공동체의 프로젝트로 갑자기 뉴욕에 떨어지게 된 청년 백수 김해완을 기억하시나요? 뉴욕에서 보낸 3년 반의 시간을 <뉴욕과 지성>이라는 책으로 갈무리한 저자는, 지금 한참 쿠바의 아바나에서  매일 ‘진정한 아바네라(Habanera)’로 갱신되고 있는 중입니다. 

쿠바 하면 혁명, 열정, 의료, 교육, 낭만... 이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떠오르는데요, 이제 시작하는 <쿠바리포트>에서는 '여행자'의 쿠바가 아니라 '생활인'의 쿠바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화요일에 김해완 작가의 쿠바이야기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쿠바리포트(1) - 도착하다! 

‘벌써’가 아니라 ‘고작’


 


 

뉴욕에서의 탈진, 캐나다에서의 표류


날짜를 보니 한국을 떠난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벌써’라고? 생각해보니 ‘벌써’가 아니라 ‘고작’이다. 내 몸과 마음은 그 사이에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은 늙은 것 같다. 9월 동안 세 개의 국가, 세 개의 대륙, 일곱 개의 도시에 갔다. 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행광인 줄 알겠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이렇게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내 사주팔자에는 역마살이 하나도 없다.) 내가 뉴욕-토론토-아바나로 동선을 짠 것은 오로지 쿠바 유학을 위해서였다. 뉴욕에서 아직 챙기지 못한 내 짐을 픽업하고, 토론토에서 아바나로 비행기를 환승하는 동생을 만나 나머지 짐을 받고, 함께 쿠바로 가면 끝나는 문제였다.


뉴욕에 갈 때까지만 해도 계획은 정상적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뉴욕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잠만 잤다. 간난아기처럼 침대에 머리만 대면 잠에 빠져들었고, 밤만 되면 다시 급격히 피곤해졌다. 지난 두 달 간 한국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느라 빨빨거리며 체력을 고갈시킨 대가였다. 그렇지만 마음은 너무나 평온했다.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관광객도,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한량’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휴식을 취하고 나면 쿠바에서도 더 기운차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내가 뉴욕을 떠나면서 함께 떠나갔다. 캐나다로 떠나는 날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태풍 어마(Irma)였다. 카리브해에 상륙한 어마는 북아메리카 동부 지방의 기류를 급격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 비행기는 기약없이 연착되더니 결국 5시간 후에야 출발했고, 토론토에 도착해서도 짐을 찾는 데까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내가 토론토의 허름한 호텔에서 동생과 조우한 것은 새벽 1시 반이었다.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였는데 말이다.


다음 날 수요일, 나는 쿠바행 비행기표 날짜부터 바꿨다. 어마에 대한 무시무시한 뉴스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마가 카리브해를 지나 플로리다에 토요일에 도착한다고 하니, 안전하게 월요일로 바꾸자. 이렇게 중얼거릴 때만 해도 나는 아직 어마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 옷밖에 없었던 나와 동생은 캐나다의 추위에 덜덜 떨면서 유니클로 옷을 샀고, 캐나다의 높은 물가에 벌벌 떨면서 저녁을 컵라면으로 떼웠다. 그렇게 일요일까지 버텼다. 그런데 일요일,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있는 차에 나에게 메일이 한 통 왔다. 월요일 쿠바행 비행기가 어마 때문에 또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에어캐나다에 황급히 전화를 거니, 표가 남아있는 가장 가까운 날짜가 목요일이라고 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후 두 시간 뒤에 다시 전화를 거니, 그 사이에 목요일 좌석마저 다 차버렸다. 이제는 금요일 밖에는 자리가 남지 않았다. 금요일!!!!! 오 마이 갓!!!!!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트렁크 세 개, 박스 두 개, 배낭 두 개의 짐을 가지고 도대체 어디를 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돈도 없고 할 일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쿠바에 전기가 모조리 끊겼다는 뉴스를 읽자, 내가 아직 와이파이를 빵빵하게 쓸 수 있는 캐나다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번에 깨닫게 되었는데 캐나다는 정말 조용한 (...) 나라다. 캐나다에서 제일 크다는 도시 토론토를 둘러보는데 딱 하루면 충분했다. 셰익스피어 연극 축제를 한다는 스트라포드(Stratford) 도시에도 일부러 가봤으나, 도시의 지리를 익히는데 딱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캐나다는 사람이 아니라 물과 산을 보러와야 한다. 아니면 은퇴한 노인분들이 쉬러 와야 한다. 나와 동생은 이 갑작스러운 여행의 일정을 알차게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동생은 이번에 나를 도와주기 위해 택견 관장님에게 2주의 귀한 휴가를 받아온 터라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토론토에 사는 어머니 선배 분 집에 짐을 맡겨놓고 킹스턴과 몬트리올에 가는 버스를 탔다. (막 면허를 딴 내가 차를 렌트해서 국립공원까지 운전하기에는 목숨이 소중했다.) 각 도시를 하룻밤씩만 둘러보았는데, 시간이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역시 캐나다.)


이렇게 캐나다에서 10일을 보냈다. 토론토로 돌아와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내가 정말 쿠바에 갈 수 있는 것인가 의심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무사히 하늘을 날았고, 나는 팔 개월만에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에 와 있었다. 짐을 찾고 택시를 타고 예약한 카사(하숙집)에 도착하자 벌써 자정이었다. 동생과 나는 짐도 풀지 않고 곧바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방은 습했고 매트리스는 삐걱거렸지만 상관 없었다. 그런 것을 따지고 잴 여력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여름에 만난 쿠바


여름의 쿠바는 겨울과 많이 다르다. 당연한 말이지만 덥다.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덥다. 겨울에도 덥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습하지는 않았다. 밤이면 바람이 쌀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쿠바는 말 그대로 찜통이다. 구름에 햇빛이 가릴 때조차 길에 서 있으면 숨이 막힌다. 게다가 폭풍의 여파로 전기도 종종 끊긴다. 전기가 없다함은 선풍기를 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집에서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날 내가 찬물에 샤워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동생은 쿠바에 5일 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나는 의무감에 차서 동생을 데리고 관광을 다녔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의욕을 잃었다.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햇빛이 눈을 찔러서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무조건 바가지를 씌우려는 택시운전사들과 매 순간 싸워야 했다. 그렇게 밖에서 세 시간만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둘 다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었다. 더 나쁜 소식은 쿠바에 정착하는데 꼭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 날씨에도 밖에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 ATM을 쓰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30분, 환전소에서 기다린 시간이 1시간, 핸드폰 심카드와 인터넷 카드를 구매하기 위해서 기다린 시간이 1시간 반...... (더위를 안 먹을 수가 있는가?)


동생이 떠난 후에도, 나는 관광객으로 쿠바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을 매일 발견하고 있다. 집에서 두 블록만 나가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들. (일주일에 한 번씩 포크레인으로 치우는 것 같다.) 오래된 자동차에서 필터 없이 시커멓게 뿜어내는 매연. 젊은 여자, 늙은 여자, 아시아, 백인, 흑인, 가리지 않고 추파를 던지는 남정네들. 동생 왈, “여기는 남미의 필리핀인 것 같은데?” 맞다. 나는 지금 교육과 의료는 캐나다, 그 외의 것들은 필리핀과 수준이 같은 나라에 와 있다.


생활면에서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곤란한 일들도 많다. 예를 들면 음식. 우리 카사에서는 아침과 저녁을 제공한다. 그런데 식사 메뉴가 매일 완벽하게 똑같다. 고기 종류만 달라질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카사 주인이 자린고비여서가 아니라, 그냥 이게 쿠바의 가정집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신다. 그런데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도 신기하게도 뒤돌아서면 배가 고프다. 또, 쿠바는 물의 질이 안 좋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물갈이 중이다. 학교 화장실은 변기 물이 내려가는는 곳도 있고 안 되는 곳도 있기 때문에 (Oh, mi madre! Por favor!) 나는 수업이 끝날 즈음이면 꾸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뛰어간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와이파이. 쿠바에서는 ‘집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모든 와이파이는 공원에 있다. 즉, 1시간 이상을 기다려서 인터넷 카드를 샀다고 해도 인터넷을 쓰려면 (덥고 습하고 모기가 있는) 공원까지 컴퓨터나 핸드폰을 들고 가야 한다는 소리다. 카톡을 확인하려고 해도, 이메일을 쓰려고 해도, 뉴스를 읽으려고 해도 일단 두 다리를 써서 공원까지 가야 한다. 지금 이 글을 MVQ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공원에 가야 한다. 그러나 공원에는 쿠바의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가로등이 별로 없다. 그래서 밤에는 가기가 꺼려진다. 인터넷을 쓰기 위해서 일부러 스케줄을 잡아야 하는 일상. 상상이 되는가?


체력이 딸리는 여행객이나 체 게바라의 자취를 낭만적으로 만나고픈 여행객이라면, 나는 과감하게 말하겠다. 겨울에, 관광지 근처의 쾌적한 카사에서, 짧고 굵고 편하게 머물다 가시라! 내가 이렇게 지쳐버린 것도 내가 쿠바에서 여행객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욕이든 아바나든, ‘일상’을 만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아바나 시트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 나는 낮은 태도로 천천히 적응하고 있다. 아기가 된 것 같다. 더듬더듬 스페인어 낱말을 익히고, 매일 밤 알아들을 수 없는 격정적인 남미 드라마를 시청하고, 먹고 싸고 자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하는 일이라고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숙제를 하는 게 다다. 아바나를 둘러보러 나가지도 않는다. (너무 덥다.) 그러나 밤 7시만 되면 눈이 뻑뻑해지면서 안압이 오르고, 10시면 침대에서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아침 8시에는 몸이 무거워서 일어나지 못한다! 이 시체놀이 혹은 아기-되기 놀이는 앞으로도 한참 더 지속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무능한 몸으로 2주 간 해낸 일도 많았다. 가장 큰 수확은 룸메이트인 일본인 여자아이와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이름은 나나코다. 내 동생과 동갑이고 재주 많은 이 19살 소녀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쿠바로 직행했고, 현재 나보다 5개월 먼저 온 쿠바 선배로서 이것저것 유용한 팁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나코는 영어를 아예 못한다. 그래서 우리 집 저녁 식탁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앉아서 답답하기 그지 없는 브로큰-스페니쉬(Broken Spanish)로 대화를 나누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서로의 가족사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의 정치상황에 대하여, 뉴욕 이민자의 삶에 대하여, 쿠바 사람들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한 달 후면 나나코는 학교를 옮겨서 다른 카사로 이사를 한다. 벌써 섭섭하다.


또 나는 벌써 두 명의 인간을 구제해주었다. 나처럼 스페인어를 공부하러 왔지만 나보다 더 스페인어 기본이 없는 말레이시아 청년과 노르웨이 소녀다. 그들은 쿠바에도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있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아바나에 왔다가 큰 코 다쳤다. 영어는 고사하고 스페인어마저도 쿠바 특유의 악센트 때문에 알아듣기 힘든 것을...... 결국 그들은 자기네 집 근처에 영어를 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여기 온 지 고작 이 주 밖에 안 되는 나를 선배로 모시며 여러 정보를 얻어갔다. 심지어 이제 겨우 간신히 의사소통을 하는 나를 내세워 통역을 부탁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노르웨이 소녀는 떠나기 전에 내 핸드폰 번호를 따며 절박하게 말했다. “너는 내가 쿠바에 와서 말이 통하는 첫 번째 사람이야!” 이건 거의 시트콤이다.


벌써 저녁시간이다. 똑같은 샐러드, 스프, 바나나칩, 고기를 먹으러 간다. 돌이켜보니 남이 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공부만 했던 때가 벌써 8년 전 일이다. 이 단조로운 일상이 정말 낯설고, 또 진심으로 소중하다. 이 고요함이 얼마나 얻기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나는 쿠바에 시간을 찾으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이 가능한 집 앞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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