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아담의 저항
권위를 혐오하면서 승인하는 나
나는 권위에 저항한다! 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 머릿속에서 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삐딱한 아웃사이더다. 이러한 자기규정을 토대로, 나는 거기에 부합하는 나 자신의 면모들만을 본다. 10대 시절 ‘진보 꼰대’ 선생들과 마찰했던 나,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윗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았던 나, 알바를 하면 늘 사장이나 점장에게 막대하기 힘든 불편한 존재가 되었던 나, 지시와 명령에 무의식적 차원의 거부감을 느끼는 나, 타인에게 함부로 힘을 행사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나. 나는 이런 조각들을 그러모아 ‘수직적 위계질서에 저항하고 자율과 수평적 관계를 선호하는 나’라는 이미지를 조립했다.
그런데 이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 조각들이 더러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조용하고 건실한 청년으로 알고 있다. 어디서든 ‘윗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눈에 특별히 거슬리는 존재였던 적도 없다. 군대에서도 간부들이나 선임들과 별 다른 트러블 한 번 일으킨 적이 없었으니. 명령을 받는 걸 싫어 하지만 그렇다고 능동적으로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살겠어!’라고 외치며 학교나 집, 직장으로부터 뛰쳐나오는 타입은 결코 아니다. 난 늘 권위의 ‘부당함’에 대해 불평해왔지만, 사실은 그것과 너무나도 매끄럽게 공존하고 있었는지도.
아무렴 어떠랴, 나는 고결한 아웃사이더를 꿈꾼다. 어떤 권위에도 무릎 꿇지 않을 거다! 그런데 요즘 들어,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져버린 나의 반응양식이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말이 되었든 ‘명령’이라는 형태로 주어지면 거부감부터 느끼고, ‘의무’라 생각되면 금세 의욕을 상실해버리는 나. 한마디로 나는 ‘강제’에 너무나 취약하다. 쓰고 싶었던 글도 마감이 정해지고 나면 버거운 ‘과제’가 되어버린다.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 어떻게든 미루고만 싶어진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꼭 권위와 위계질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관심은 때때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명령이나 규칙보다도 훨씬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러한 호의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때도 종종 있다. 나를 향한 호의와 관심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아니 감당하지 않으려드는 나. 이런 나의 모습을 긍정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어디서 뭘 하든 다종다양한 힘들이 내 삶에 작동할 텐데,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나는 언제까지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저항은 어째서 점점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정말 권위에 ‘저항’하고 있었나? 어쩌면, 권위를 노려보면서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나, 또 다른 아담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은 단지 이러할 뿐이다. 즉, 신이 우리에게 자연적 지성을 통해 독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계시해주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담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계시한 것뿐이다.”(스피노자, 19번째 편지)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담이 자신의 자유를 상실한 것은 그가 신의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금지’로밖에는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인간의 신체와 결합할 때 인간의 그것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뿐이다. 신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유용한 앎을 계시했을 뿐인데, 아담은 그것을 복종이나 위반을 내포한 도덕적 명령으로 ‘해석’한 것이다. 아담과 같은 무지한 해석자는 모든 것들을 도덕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무지야말로 이들이 받고 있는 벌이며 부자유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해석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나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도 금지는 금지 아닌가? 신이 그렇게 말하는데, 벌거벗은 나약한 인간 아담에게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었을까? 아담의 사유를 불가능하게 한 것은 ‘신의 목소리’가 지닌 위압적인 힘이 아니었을까? 명령과 금지, 억압,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 이런 것들은 우리 주변에 실재하지 않나? 분명히 지금 여기에는 ‘쓸모’를 가질 것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고, 우리에게 힘을 행사하는 사회적 코드들이 있고, 소비와 결부된 환상을 생산하고 주입하는 자본이 있다.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를 금지로 받아들인 아담을 탓할 수 있을까? 신의 계시를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공허한 긍정론과 어떻게 다른 거지? 이 정도가 내가 느낀 반발심이다.
분명 우리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규정짓고 제약하는 힘들은 실재한다. 내 문제는, 이러한 힘들이 ‘실재한다’는 데에서 멈췄다는 데 있다. 나로 말하자면, 내게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는 부모님의 영향 아래에서, 자율을 중시하는 대안학교를 다니며 상대적으로 구속력이 덜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자유로웠느냐고 묻는다면 ……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대안학교에서 마주한 것은 결국 여기에도 권위와 강제가 ‘실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들을 내걸어봐야 학교인 한 구속과 억압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이만큼이나 자유롭구나’가 아니라 ‘여기도 다르지 않구나’를 느꼈다. 어디에서도 ‘구속’과 ‘권력’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옥죄었다. 여기가 내 생각이 멈추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실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과 거부의 방식으로밖에는 달리 저항을 할 수도, 다른 저항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강제력은 어디에든 있다. 모든 외부적인 힘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면 이불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다. 때문에 나의 저항은 작동 불가능했다. 맞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권력이 실재한다’는 것은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권력은 언제나 매우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나를 가로지르는, ‘나’로 규정되기 이전의 힘들의 투쟁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어떤 실체로서의 권력도, 그것과 무관한 자리에 있는 나도 없다. 내게 작용하는 힘들 이전의 나는 없고, 내 해석과 무관한 힘(권력)도 없다. 따라서 유효한 질문은, ‘거기에 권력이 존재하는가’나 ‘그것은 정당한 권력인가’가 아니라, ‘권력은 지금 나를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는가’, ‘나는 권력을 어떻게 해석(혹은 재생산)하고 있는가’이다. 스피노자는 ‘그가 할 수 있었던 것’과의 관계에서 아담을 비난하거나, 그가 신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아담의 해석이 얼마나 무력하고 궁핍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아담은, 그리고 (아담도 아닌) 나는 권력을 ‘주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권력을 ‘해석 불가능한 실체’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위반’과 ‘거부’ 외에 어떤 다른 저항의 가능성도 차단해버린다. 다른 해석과 다른 관계 맺기의 시도가 불가능해져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권위와 의무, 강제가 싫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안학교라는 공간이 지닌 가능성들을 활용하지도, ‘학교’라는 틀 자체를 떠나보는 실험을 하지도, 나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도,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거부와 부정 외에는 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거부하는 동안, 나는 내가 거부하는 것들에 길들여져가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무력한 방식으로. 은밀하게 권위에 복종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나를 본다. 가령 ‘텍스트’의 권위에 복종하는 나. 즉, 나의 구체적인 느낌들과 경험들 속에서 니체를 만나기보다는 그의 말들에 붙들려서 그럴듯한 말들만을 되풀이하려 드는 나. 또 사소한 명령들에는 기분나빠하면서 정작 관성에 복종하며 ‘되는 대로’ 살아온 나. 모든 구속력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나의 해석은 무력한 복종들을 생산했고, 역으로 복종들은 무지한 해석을 강화했다.
권위에 대한 나의 반감과 의무에 대한 거부는 저항이라기보다는 회피에 가까웠다. ‘나는 그런 걸 원한 적 없다’고 변명하면서 내가 마주친 힘들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회피란 결국 복종일 뿐이다. 그리고 권력의 부당함이나 나의 (상대적인) 무력함은 나의 복종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뭐든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라,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다’ 따위가 아니라, ‘신조차도 너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게 아니었을까.
무력한 거부
우리 세대는 거부에 능하다. 좋아하는 건 애매해도, 싫어하는 게 뭔지는 확실하다. 명령하고 강요하는 꼰대들,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무의미한 노동,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공허하고 기만적인 긍정론, 너무나 고된 가장 보통의 삶 ……. 나와 내 친구들은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 혹은 거부하고 싶어 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힘들, 사회적 코드들의 부당함과 규범적 삶의 비루함에 대해 떠들다보면 왠지 좀 더 결백하고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의 거부와 부정은 유쾌하지가 않다. 우리의 싸움은 목숨을 건 전면전보다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적을 노려보는 냉전에 가깝다. 싫은 건 분명한데, 다른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마땅히 답할 말이 없다. 막상 우리는 뭘 하고 있지? 더 나은 직장을 꿈꾸고,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유학을 고민하고, 개처럼 벌어서 여행 다니는 삶을 반복하고, 취직을 하고 싶지 않다며 알바를 전전한다. 어디에도 저항의 활력은 없다.
제도의 바깥에서 사회적 가치와는 무관한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어떠한가. 내 공부가 나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환을 일으키지 못하는 한,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쓸모도 갖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쓸모에 대한 저항이 아니다. 아무생각 없이 놀러 다니는 것이 노동에 대한 저항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식의 반응적 행위양식은 어떤 새로운 해석도 구성해내지 못한다. 그저 거부하고 외면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존 및 재생산하고 있을 뿐. 우리의 존재는 투쟁과 저항을 통해 고양되는 대신, 거부와 부정을 통해 쪼그라든다. 우리가 집요하게 다른 힘들을 쳐내는 동안 새롭게 구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둔다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둔다―“이것을 행하지 마라! 단념하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라고 말하는 모든 도덕은 내게 근본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일을 행하도록 하고, 밤에도 그 일에 대해 꿈꾸게 하는 도덕, 이 일을 가능한 한 잘해내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도덕에 나는 호감을 느낀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삶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그는 아무런 미움이나 반감 없이 미풍이 나무에서 낙엽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과 작별을 고한다. 혹은 그는 작별을 고한다는 사실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의 눈은 단호히 목표와 앞만 바라볼 뿐 옆도, 뒤도, 가장자리도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우리가 내버려두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둔다.”―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요, 나의 원칙이다. 그러나 나는 두 눈을 뜬 채 가난해지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부정적인 덕, 그 본질이 부정과 단념인 덕을 나는 싫어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304절)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두기. 니체의 저항방식이다. 나도 니체처럼 ‘이것을 행하지 마라! 단념하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라고 말하는 도덕에 반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명령들에 ‘대해’ 저항했다. 하지만 실은 내내 내가 혐오하고 부정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취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하기 싫은 것들로부터 가능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머물기 위해 노력했다. 즉, ‘행함으로써 내버려두었던’ 니체와는 달리, 나는 내가 혐오하는 것을 중심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결정해왔던 것이다.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그것들에 의해 더 강하게 규정되고 마는 역설.
니체는 부정과 단념을 요구하는 도덕들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나와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는 ‘단념하라’고 말하는 도덕의 명령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대신, ‘어떤 일을 행하도록 하고, 가능한 한 잘해내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도덕’의 명령에 따른다. 니체는 ‘거부하는 것들’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 만족을 느끼는 생활습관, 예기치 못한 경험에 대해 느끼는 감사함에 등등에 대해서. 그런 구절들에서는 도저히 감추어지지 않는 니체의 기쁨과 경탄이 흘러나온다. 니체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오로지 그것들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저하시키는 모든 것들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미움이나 반감도 없이.
니체는 기독교, 형이상학, 교양주의, 도덕 등등과 사유의 혈전을 벌인다. 그러나 그의 전투는 적의 부당성을 증명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 행복, 이성, 신체, 도덕... 니체는 이 모든 가치들을 근저에서 의심하고, 그로부터 다른 가치들을 입법했다. 이것이 ‘행위함으로써 내버려두는’ 니체의 투쟁방식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스스로 명령하고 능동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위하여, 그 자신을 이루고 있는 ‘부정의 힘’들과 벌인 투쟁이었으리라. 그 때문일까. 니체의 날카로운 비판과 잔인한 공격에서는 증오의 악취가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나는 왜 그토록 내가 거부하고자 하는 권위와 명령에만 사로잡혔던 것일까? 그것을 노려보고 있어봐야 나의 역량이 고양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저항’을 너무나 거룩하고 원대한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내게 가해지는 모든 강제력을 뒤집어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만 의무, 명령과 결별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의 저항은 무겁고 우울하며 냉소적인 것이 되어갔다. 권위와 강제는 너무나 싫지만 그렇다고 달리 하고픈 것은 딱히 없고, 솔직히 나처럼 밋밋한 인간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푸념하기를 반복해왔다. 그러는 동안 내게 남은 것은 증오와 체념뿐. 니체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후까시 잡지 말라고, 저항하기 위해 비장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고, 그깟 자의식 따위 던져버리라고. 푸코 역시 말하지 않았던가.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슬퍼야 한다고 생각하지”(푸코, 《안티 오이디푸스》 서문) 말라고.
사실 공부를 시작한 뒤 나는 많은 것들과 결별하고 있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나의 일상은 조금씩 단순해지고 있다. 내가 ‘논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던 것, 즉 ‘친구들과 만나 돈 쓰면서 멍 때리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딱히 ‘원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헛헛해서 하게 되는 일들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놀랄 만큼 줄었다. 얼마 전 집에 가는 길에 규창이와 얘기하다 깨달은 건데, 어느 순간부터 ‘권태롭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었다. 단순히 전보다 바빠졌기 때문은 아니다. ‘미풍이 나무에서 낙엽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나를 이루고 있던 잉여적인 것들에 작별을 고하고 있다. 이것은 저항이 아닌가? 나는 ‘저항’이라고 말하기엔 이런 것들이 너무나 사소하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사실 무엇도 사소하지 않다. 내가 사소하다고 여긴 그 모든 곳에서 권력과 저항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내가 ‘사소함’이라는 말로 평가절하 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일을 시도해보자.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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