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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베짱이의역습

솔직함, 혼돈을 살기

by 북드라망 2018. 3. 20.

솔직함, 혼돈을 살기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누군가 내게 여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까?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여자들은 보통 ‘주변’을 중요시한다. 남자들은 모두 얼마간 자기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산다. 텅 빈 관념에 사로잡히거나 자기원칙만 고집하거나 허황된 꿈을 좇는다. 때문에 어딜 가도 관계에 무능한 쪽은 대개 남자다. 그에 비해 여자들은 훨씬 현실적이다. 옆 사람의 기분이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거대한 망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한다. 그 때문에 세속적인 가치에 더 많이 붙들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건 대체로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다.




‘여성’을 주제로 글을 쓰기는 글렀다.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겨우 한 문단, 여덟 개의 문장을 쓰는데도 수도 없이 멈칫거리게 된다. ‘이건 여성혐오인가?’, ‘이런 말은 지나친 일반화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너무 편협해 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가로막는다. 분명 내가 만나본 구체적인 여성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나의 생각과 느낌이 있는데도, 나를 가로지르는 시선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다 보면 잘 끄집어내지지 않는다. 자꾸 ‘보통의 경우’, ‘대개’, ‘대체로’, ‘경향이 있다’라는 표현들이 튀어나오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니체, 평생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봤으며 어머니, 여동생과 불화했던 그는 여성에 대해 참으로 많은 말들을 했다.


“여성들은 객관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방향들이 서로 잘 조화하고 있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377절)

“여성은 봉사하고 싶어 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같은 책, 432절) 

“모든 여성들은 자신의 약점을 강조하는 데 있어 매우 세련된 능력을 지니고 있다.”(니체, 《즐거운 학문》, 66절)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니체의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독단적 평가와 판단에 반발심이 들기도 하고, 코지마 바그너나 루 살로메와의, 거의 니체 혼자만의 망상에 가까웠던 연애사건들이 떠오르면서 여성에 대한 니체의 말들이 모두 ‘루저’의 어리광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문이 든다. 니체는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막’ 말할 수 있었던 거지?


하긴, 니체는 여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이런 식이다. 딱히 객관적이고자 하지도 않고, 자기 말의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태도 같기도 하고. 나더러 니체처럼 글을 쓰라고 한다면? 글쎄 … 이것저것 온갖 시선들을 ‘배려’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못할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니체의 ‘막말’은 무책임하다거나 편협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다. 경쾌하다.


자기가 체험한 것에 대해 자기의 시선으로 말하는 니체. 그에 비해 ‘여성’에 관해 한 줄을 쓰기 위해서조차 ‘여성의 시선’, ‘페미니스트의 시선’, ‘올바른 남성의 시선’ 등등을 진땀나게 고려하는 나. 나는 공정하고 니체는 편파적인가? 니체는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있고,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왜 니체는 그토록 가볍고 난 이토록 무거운가?



니체 속의 非-니체들


니체의 어떤 구절을 읽을 때, 나는 반항기와 자만심으로 가득 찬 패기 넘치는 청년의 얼굴로 그를 상상한다. 가령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에 대해서 말할 때, 혹은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이 도덕의 유혹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자신들의 철학 체계를] 세웠”(《아침놀》 서문)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최초’임을 자부할 때. 그런데 또 다른 구절들에서 니체는 ‘배움’을 강조한다. “언젠가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기어오르는 법, 춤추는 법부터”(《차라투스트라》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배워야 한다고. “생소한 것에 대해 선의와 인내, 공정함과 온후함을”(즐거운 학문) 베풂으로써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런 구절들에서 연상되는 것은 삶에 통달한 현자의 모습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한없이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니체를, 또 다른 구절에서는 더없이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니체를 만나게 된다. 이들 모두가 니체다. 동시에 이 중 어느 것도 니체가 아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비일관된 파편적 이미지들 사이에서 ‘진짜 니체’를 찾는다는 게 가능할까? 무엇이 니체의 가면이고, 무엇이 그의 맨얼굴일까? 어쩌면 나는 그동안 ‘니체’라는 하나의 자아를 상정해놓고 구절마다 다르게 드러나는 니체의 모습들을 ‘모순’이나 ‘비일관’으로 치부해오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 같다. ‘진짜 나’가 있다고 믿고 스스로에게 ‘나’이기를 요구했던 건 아닌지. ‘게으르다’, ‘쿨하다’, ‘공정하다’, ‘평범하다’, ‘솔직하다’ 같은 자기규정들을 만들어내고 재발견하면서 ‘진짜 나’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니체의 책을 읽는 것이 니체와 만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때 ‘니체’란 무엇일까? 분명 나는 ‘니체’라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니체를 만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속도, 그가 사용하는 어휘의 색채, 니체의 사유를 구성하는 글쓰기의 리듬, 그의 글 속에 내재해 있는 고유하고 다양한 에너지들을 통해서였다. 이런 힘들이 나를 관통할 때, 나는 니체를 느낀다. 니체의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니체’라는 실체가 아니라 그의 글 속에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힘들이다. 나를 자극하고 나로 하여금 생각하고 글을 쓰도록 추동하는 것은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자아나 인격이 아니라,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힘들인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진짜 나’라는 게 어디 있을까.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게 나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하나의 완결되지 않은 텍스트처럼 경험되지 않을까? 내가 그들과 맺고 있는 관계 바깥에, 나와 그들이 주고받는 다양한 힘들 바깥에 ‘진정한 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믿고 있던 ‘게으르고, 쿨하고, 공정하고, 평범하고, 솔직한 나’의 표상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내가 믿고 있는 ‘나’,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자기규정이란 뭘까?


사실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야만 한다.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내면화하지 않는다면 ‘자의식’이란 것은 성립할 수조차 없다.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빌려 가까스로 자기 자신에 이르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의식이란 곧 코드화된 타자의식이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온힘을 다해 자기 자신을 회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타자들의 시선에 짓눌려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타자에 휘둘리는 ‘텅 빈 자신’의 허위와 기만인 것이다. 때문에 자의식으로 넘쳐나는 이들은 한없이 무겁다. 무겁게 거만하고, 무겁게 무력하다.


니체는 늘 ‘니체’를 넘쳐흐른다. 차갑지만 열정적이고, 진지하면서도 천진하고, 화려한 동시에 단순하고, 모호하고도 단호하며, 날카로우면서도 유연하다. 니체는 이러한 온갖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니체의 ‘진솔함’이 아닐까? 그러니까 니체에게 없는 것은 바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에게 이르는 자의식의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1886년, 니체는 자신이 쓴 모든 책에 서문을 다시 써서 붙였다. 그 당시 자신의 신체 상태는 어땠고,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무엇을 시도하고자 했고, 그 책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어떤 경험이었는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여기서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때 니체 자신이었던 것’에 대해 말한다. 책도, 그 책을 쓸 당시의 니체도 그에게는 ‘하나의 니체’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이었던 것. 자신이 마주친 모든 것들인 니체, 동시에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니체. 예수, 바그너, 쇼펜하우어, 디오니소스 …… 매번 어딘가에 이르고 매번 그곳을 떠나는 니체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매번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간 나는 내가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두고? 남들에게 빈말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스스로를 포장하려들지 않고… 그러나 실상 나는 관계의 실재성을 회피하고 그저 ‘나’인 채로 존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배려, 담백함, 정직성으로 이루어진 나의 솔직함이란 실은 모든 것들과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일, 다치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나의 솔직함은 기만이었다. 내가 정해 놓은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상대와 나에 대한 경고.



정직함, 자신의 모순과 혼돈을 사는 힘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홀리 모터스》의 부유한 사업가 오스카는 고급 리무진 홀리 모터스에 올라타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새벽부터 밤까지 파리 곳곳을 누비며 하는 일은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사업가, 광대, 걸인, 암살자, 가장, 사업가 …. 영화 중반까지 ‘홀리 모터스’는 오스카와 오스카가 연기하는 역할들을 구분해주는 경계로 기능한다. 우리는 홀리 모터스 안에서 다음 역할을 준비하는 것이 ‘진짜’ 오스카의 맨얼굴이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는 그가 ‘연기’하는 가면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레오스 카락스는 가면과 맨얼굴의 경계를 무참히 허물어버린다. 오스카는 어느 순간 홀리 모터스를 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그리고 밤이 되자 홀리 모터스는 그를 처음에 태운 곳이 아닌 낯선 곳에 내려놓고 차고로 돌아간다. ‘진짜 오스카’는 사라지고 그가 연기하는 ‘가면들’만 남은 것.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믿었던 ‘오스카’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쩌면 그가 전날 마지막으로 연기한 또 다른 ‘가면’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아들’, ‘학생’, ‘남자’, ‘한국인’, ‘소비자’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역할들을 ‘연기’ 하면서도 그러한 역할들 ‘배후’에 ‘진짜 나’가 있다고 믿는 거다.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우리 자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분절하는 관계들과 역할들 바깥의 (혹은 이전의) 나에 이르게 되는 걸까? 그것은 의식을 자아와 동일시함으로써다. 의식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는 척, 우리의 모든 욕망을 지배하는 척하면서 ‘의식하는 나’야말로 ‘진짜 나’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니체는 의식이, 아니 의식이야말로 ‘가면’이라고 말한다. ‘의식’은 “오로지 전달의 필요에서 오는 압력에 의해”(《즐거운 학문》, 354절) 발전되었다. 우리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던 의식이란 사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무한히 생각하고 감각하고 경험한다. 그 중 우리가 ‘나’라고 믿는 ‘의식된’ 생각은 “가장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다. 언어(=전달의 기호)에 의해 납작하고 평평해진 감각과 경험과 생각, 그것이 의식이다. 즉, 의식이란 우리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하며, 무한히 개별적”인 경험을 언어를 통해 ‘전달 가능한 것’으로 번역해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개인으로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최선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비개인적인 것, ‘평균적인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나’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붙들 때, 실상 우리는 ‘의식’을 매개로 삼아 사회적인 코드를 재생산하게 될 뿐이다.


나는 ‘사회’에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고, 사회적 쓸모를 재생산하면서 나를 갉아먹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저항은 딱 거기까지였다. 사회적 코드를 거부하기만 하면, 대학을 거부하고 노동을 거부하고 결혼을 거부하기만 하면, 온전히 ‘나’에 이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이른 곳은 ‘나’에 대한 또 다른 규정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규정을 재생산하면서 이미 형성된 사회적 배치와 구도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령 ‘루저’라는 자기규정은 어떤가? 우리는 ‘나는 루저다’라고 말하면서 그게 마치 모두에게 ‘위너’가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 그러나 ‘위너/루저’의 구도 자체를 파괴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구도를 증오하면서 거기에 기생할 뿐이다. 문제는 사회가 부여한 ‘가면’을 벗고 우리의 ‘맨얼굴’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맨얼굴은 없다. 문제는 맨얼굴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여러 힘들을 경유하면서 능동적으로 가면들을 파괴하고 다시 생산하는 일이다.


모두에게 정직하고자 했던 나는 정작 나 자신에 솔직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규정한 ‘정직한 나’의 스탠스를 지키고자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린 규정을 고수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질적인 힘들을 걷어차면서 말이다. 나의 정직이란 ‘정직함’이라는 하나의 가면을 고집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의무’, ‘당위’, ‘자기규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가오는 힘들 앞에서 온몸으로 휘청거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정직이라고 말한다. 자아는 자신의 “모순과 혼란”을 통해서만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정직하게”(《차라투스트라》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막으로 가 자신의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깨어 부순 자”(같은 책,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만이 진실하다. 주어진 가치판단이나 어떤 ‘배후’도 믿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힘을 빼앗고 빼앗기고 변형되고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 의식에 사로잡힌 자아를 깨고 기꺼이 힘들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능력, 혼란스러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니체가 말한 ‘정직성’이었던 것이다.



나의 아침놀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닥 절실함이 없다.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자기 문제를 구구절절 털어놓고 남의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면서 필요 이상의 오지랖을 떠는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저들은 타인에게 기대어 자기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어차피 남들이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군가의 문제를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게 ‘진심’을 강요하거나 내 앞에서 지나친 오지랖을 떨지는 말아주길.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 아닌가. 적정거리를 유지하라! 이게 내 삶의 모토였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나 자신에 대한 충실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람들과, 세계와의 ‘적정거리’는 동시에 나 자신과의 ‘적정거리’를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나, 너는 너, 세계는 세계.


"나는 인도에서는 붓다였고, 그리스에선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는 나의 현현이며 셰익스피어와 바콘 경도 그와 한 가지입니다. 근래의 나는 볼테르였으며 나폴레옹이었고 어쩌면 리하르트 바그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무적의 디오니소스이며 지상에 축제를 불러오는 자입니다."(니체, 1889년 1월 3일, 코지마 바그너에게 보내는 편지)


니체에게는 세계가 곧 자기 자신이었다. 역사의 모든 이름들이 그 자신이었다. 니체에게는 고정된 것으로서의 ‘세계’도, ‘자기 자신’도 없었다. 대상세계와 ‘나’라는 독립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전쟁터로서의 세계에서 다른 힘들과 접속하고 절단하면서 다양한 상태들을 주파하며 ‘나’라는 주체를 생산하는 힘들의 다발이 있을 뿐이었다. 가면들을 바꿔 쓸 수 있는 힘, 여러 상태들을 경유할 수 있는 접속의 역량. 그것이 니체를 니체이게 하는 힘이었다. 니체가 붕괴하고 만 것은, 그가 접속능력을 잃고 ‘광기’라는 하나의 가면에 고착되었을 때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남들에게 마음을 주고 말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라고, 내가 내 앞가림만 잘 하면 남들과 관계 맺는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관계는 저절로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우습게도. 그러나 나는 그저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관계가 변형되고, 익숙한 감정의 균형이 깨지고, 선을 넘게 되는 것을.




내 취향이 그런 나를 증언한다. 나는 ‘적당히’ 파격적이고 ‘적당히’ 낯설고 ‘적당히’ 심오한 것들을 좋아 한다. 낯선 사운드로 익숙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불쾌감’이 들지 않을 정도까지만 신선한 음악을. 익숙한 플롯을 살짝 변주하는 세련된 소설을. 대놓고 상업적이지 않지만 지나치게 예술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사람에 대해서도 그랬다.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 정해진 선 이상으로 나를 침범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용납 가능한 것들만을 받아들이고 그것들과만 관계해왔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었겠는가. 한 번도 나의 한계, 내가 휘청거리게 되는 지점과 마주하지 않았으니.


고백하자면, 나의 니체 읽기도 그랬다. 강력한 아군 니체와 더불어 ‘인간적인 것들’을 비웃으며 니체의 구절들을 소화 가능한 방식으로만 받아들였다. 나의 세계-해석에 니체를 덧씌워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그러다 드디어! 《아침놀》을 읽으면서 나는 나와 그리고 나의 니체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곳에 있을 수 없게 되었음을 느꼈다. 파괴적 비판이 아니라 유쾌한 실험을 시작하는 니체. 나는 그로부터 기묘한 겸손과 예리한 투박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어떤 사소한 것도 없다는 것. 내가 무시했던 모든 것들이 사유의 재료가 된다는 것. 세상에는 어떤 확실한 것도 없지만, 바로 그 ‘무규정성’과 모호함이야말로 내가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바탕이라는 것. 그 순간, 안전한 거리 속에서 젠 체하며 모든 것들을 판단했던 왜소한 난쟁이-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제야 나는 비로소, 솔직해지기 시작한 것인가.


글 :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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