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사무실 책상 위 부르읏, 짧게 떨린 휴대폰을 보니 아기 아빠의 문자다.
“보일러실 문 닫는데 애기가 달려들어 가지고 경첩쪽에 애기 손가락이 살짝 꼈었음 ㅠㅠ 막 울고 아빠는 또 식겁함”
문자에 동봉(?)된 사진 속 딸이 환하게 웃고 있는 걸 보면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또 아빠만 엄청 놀라게 한 뒤 본인은 희희낙락인가 보다.
요즘 부엌매트에 얼굴을 붙이고 엎드리는 걸 좋아한다.
딸이 작은 티끌도 볼 만큼 시력이 발달하고, 기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면서 엄마와 아빠는 하루에 한 번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나마 이것도 처음에는 놀람의 강도가 낮았는데, 점점 (나이 든 엄마) 심장에 무리가 충분히 갈 만큼 높은 강도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놀라서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ㅠㅠ).
아기가 뒤집기를 시작하던 백일 무렵부터 우리의 쇼핑목록에는 ‘안전’ 장치가 하나둘 들어왔다. 현재 우리 집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현관 입구와 욕실 앞에 철제 안전문이 설치되어 있고, 책장 하단은 막아 놓았으며, 책장 모서리에는 보호대가 붙어 있고, 양문형 열림 구조로 되어 있는 낮은 수납공간에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테이프가 붙어 있으며, 안방 문에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보호 스펀지가 붙어 있다. 이것들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로, 사실 모서리만 해도 수도 없이 많으며 바닥에도 매트가 전체적으로 깔려 있지도 않고, 수납장들의 문도 다 안 열리도록 처리하지 못했다.
원래는 잠금끈이 달려 있었으나 우리 딸이 잡아 뜯어버렸다. 잠금끈과 고리가 다 뜯겨나간 모습.
아기의 ‘안전’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은, 눈에 띄는 대로 위험해 보이는 요소들을 막아도 ‘위험’은 끝없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때 육아아이템 중 애정했던 실리콘 과즙망이 있다. 아직은 씹는 능력이 약한 아기들에게 사과나 배 등을 줄 때 실리콘 과즙망 안에 조각을 내어 넣어주면 아기가 그걸 잇몸으로 씹으면서 즙을 쪽쪽 빨아 먹을 수 있는 아이템으로 육아 중 잠시 다른 일을 할 시간도 벌어주고, 아기도 만족감이 높은 핫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설 이후로 과즙망을 쓰지 않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과와 배를 강판에 갈아서 주게 되었다(사과를 먹이며 벌 수 있었던 시간도 과즙망과 함께 사라졌다).
그 이유는 월령에 비해 이가 많이 난 편인 우리 딸이 과즙망을 잘근잘근 씹는 정도가 아니라 맹수처럼 뜯으며 먹다가 과즙망 자체를 뜯어 먹고 말았기 때문이다. ㅠㅠ 작은 조각이긴 하지만, 실리콘 조각을 아기가 먹고 말았고, 이후 우리는 하나 더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과즙망까지 다 버려 버렸다(작은 조각이라 괜찮았는지, 아무튼 잘 관찰했는데 잘 먹고 잘 잤고, 지금까지 별 이상이 없다. 검색해 보니, 이런 경험을 한 엄마들이 더러 있었는데, 모두 병원에 가도 별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며 아기가 잘 먹고 잘 논다면 똥으로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아이템에만 생각지 못한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 자신, 그러니까 아기의 엄마조차 어느 때는 아기에게 (물론 전혀 본의는 아니지만) 위험이 될 때가 있다.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문을 여닫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도 순식간에 기어와서 문틈에 손가락을 넣는 아기에게는 위험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마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최첨단의 공간이 있다 해도 아기가 거기서 ‘완벽하게 안전’할 수는 없으리라.
부모와 아기의 ‘안전’을 둘러싼 이 싸움은 아마도 아기가 스스로 ‘위험’을 인지하고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을 때에라야 소강상태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가 지금처럼 모든 것이 흥미롭기만 하고, ‘위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부모는 끊임없이 ‘위험’을 제거해 가다가 부모가 ‘위험’한 상태가 이르고 말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딸에게 끊임없이 알려주고, 또 딸 스스로가 어느 정도는 다치면서 ‘위험’에 대해 터득해 갈 수밖에 없으리라. ‘완벽하게 안전한’ 환경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위험’을 최소한으로 겪어 내는 몸과 마음의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일어서서 몸을 움직이려다가 바닥에 엉덩이를 쿵 박고, 그릇이 들어 있는 수납장을 열고 말겠다는 듯 문을 들썩거리다 손가락이 끼고, 책장의 책들이며 파일을 죄다 뽑아내다 종이에 살짝 베이고, 소파 위로 올라가려 움찔거리다 뒤로 넘어가 머리를 찧고 있는 딸이 조금씩 자기 영역에서의 ‘안전’을 스스로 터득하고 확보해 가도록 엄마는 오늘도 “안 돼!”를 외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_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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