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하인라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 명랑하고, 유쾌하며, 성실하다
발단은 그래도 지극히 ‘지구’적이었다. 아니 , 엄밀히는 ‘50년대말-미국’적이었달까. 그러니까, 비누 이름이 ’스카이웨이’라던가(하늘길 비누라니, 미용비누가 비행경로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비누 표어 공모전의 2등 상품으로 증고품 우주복을 내건다는 기획이 뻔뻔하게 그대로 추진된다던가 하는 일이 벌어질 만 한 시공간은 동서고금 인류역사에서도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팍스아메리카나, 물자는 풍요롭고 사람들은 태평하며, 쏘련보다 먼저 우주선 쏘아 올리는 것 따위에 온 나라가 열중하던 자본주의 미국의 전성성대 말고는.
50년대의 미국 오토바이 광고
여러 모로 괴팍한 오프닝이다. 비누 포장지에 비누 선전 표어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면 우승자를 뽑는다는 식의 시시껄렁한 행사를 요란스럽게 조명하는가 싶더니, 주인공이 그 시시한 일에 지나치게 열과 성을 다 하는 걸 공들여 보여준다. 사실, 독자가 겉표지에 우주인이 그려진 책을 펼쳤을 때에는 벗겨진 비누포장지보다야 흥미로운 걸 기대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주인공이라는 녀석이 고군분투하며 몰두하는 일이, 포스에 눈뜨기 위한 수련도 아니고, 은하계를 파멸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세기의 대결도 아닌, 비누껍질을 닥치는 대로 모아다가 ‘스카이웨이 비누는 하늘처럼 순수하니까~’ 따위 온갖 낯 간지러운 표어를 적어넣는 일이라니… 그것도 장장 두 챕터에 걸쳐서! ‘무슨 SF가 이래?’ 어이 없어 눈알을 굴리며 책을 집어던져도 할 말이 없을 판국이다.
그렇지만 내가 책을 집어던지지 않은 건 아마도 주인공 킵의 매력, 그리고 그의 성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킵은 아주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그 나이 또래답게 교우관계나 진로문제에 고민이 있는 십대이지만, 성실하고 영리하고, 좋아하는 것에 충실하면서, 은근한 책임감과 배려심, 유머감각까지 있다. 와중에 거추장스러운 자의식이 별로 없다. 이는 명백한 장점인데, 비누 포장지에 표어 써 보내기 따위의 실없는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 쭈뼛거리지 않는 추진력은 자의식의 사이즈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금수저도 아니고 수재도 아니고 수퍼히어로는 더더욱 아니지만, 믿고 응원할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은 충분하다.
킵은 그 비누 표어 공모전에 정말이지 엄청나게 진지하게 달려든다. 물론 1등 상이라는 달 여행을 열렬히 원해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줄 것이다’는 식의 기복적인 태도 없이 소탈하게 두 팔을 쓱쓱 걷어붙인다. 참가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데, 소설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다보니 서술 자체가 이미 그 성실함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는 성실함으로 가득한 서술을 따라 그 집념에 찬 성실함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 중첩된 성실함, 이중의 진지함이 일으킨 왜곡장 안에서, 독자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하여, 책을 집어던지기는 커녕, 마감의 그날까지 5,782개의 표어를 생산해낸 킵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함께 우승자 발표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자라면서 우리가 뼈아프게 학습하는 인생의 진리 중 하나- 모든 노력이 합당한 보답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 킵도 그걸 배운다. 비누 표어 공모전의 우승자 발표에서. 누군가 저지른 작은 실수나 누락이나 착각이나 오해, 어긋난 타이밍, 되돌아오는 업보, 태평양 연안 나비의 날갯짓… 그런 노이즈가 깨끗이 소거된 진공의 상태라면야 모두의 마음에 흡족하게 만물의 질서가 바로잡히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멸균실이 아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며, 킵의 경우에는 ‘타이밍’이 문제였고 그래서 그는 그토록 열렬히 원했던 달 여행을 놓치는 대신 2등 상을 받게 되었다. 진짜 우주인이 진짜 우주에서 입었던 중고품 우주복. 킵은 그 며칠 신은 양말같은 냄새가 나는 우주복에 ‘오스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앞서 말했지만 킵은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그렇게 노력한 보람도 없이 달 여행에 뽑히지 않았다고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2등의 현실을 담담하게 수용하고 우주복 오스카를 실전용으로 고치는 데 몰두할 때, 다시금 그의 매력은 빛을 발한다. 꼼꼼히 읽어보고 살펴보고 공부하고 용접하고 만들고. 새는 곳을 찾아 밀폐하고 산소통을 채우고 무전기를 수리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우주복에 호감을 가지고 다가서서, 성실하게 관찰하고 몰입하며 따뜻한 애착을 쌓아가는 그의 성향은 사실 그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무심한 자유방임형 아버지, 따뜻한 성품의 마을 약국 차튼 씨, 함께 납치된 후 전 여정을 함께 한 제멋대로의 말썽꾸러기 천재소녀 피위, 베가에서 온 상냥한 엄마생물 등등. 호감을 전제로 했을 때 킵은 상대방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알맞은 거리에서 알맞은 톤으로 배려하며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탁월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런 자의식 없이 구사되기 때문에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정말 복 받은 재능이다. 하나하나의 상대방에 대해 최적점을 찾아 스스로 최선을 다할 뿐, 밀당 속에 설정되는 거리나 온도에 상처받지 않는 능력 말이다. 그는 타자를 인정하고, 자기 욕망과 기대를 그에 맞추어 조율할 줄 안다.
긴 여름내내 킵은 ‘땀과 드라이버’를 투자하여 오스카를 완벽에 가깝게 수리한다. 당장이라도 우주작업에 투입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대학 진학 문제에 직면하여 그는 아프지만 합리적인 결단을 내린다. 비누회사에서는 상품으로 우주복을 보내주면서, 필요없을 경우 택배로 되돌려보내면 500달러의 상금으로 교환받을 수 있는 옵션을 제시해주었다. 대학 학자금 마련을 위해서는 한푼이 절실했다. 킵은 오스카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는다. 합리적이긴 해도 결코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우주복을 입어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오스카와 단둘이 산책을 즐기러 우주 대신 뒤뜰로 걸어나간 9월의 어느 밤, 킵은 장착된 무전기를 통해 뜬금없는 구조요청을 듣고, 얼떨결에 그에 응했다가 난데없이 우주선에 납치된다.
이때까지의 이야기가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과학지식을 살짝 가미한 목가적인 성장소설 같았다면, 이 황당한 ‘납치’ 이후는 본격적인 SF 장르다. 그리고 물론, 납치 이후의 페이지 수가 훨씬 더 많다! 지구에서 달, 달에서 명왕성, 태양으로부터 25광년 거리의 베가 제 5행성, 소마젤란 성운 어딘가의 우주법정까지. 시덥지 않은 비누껍질 프로모션으로 시작할 때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던 곳들을 배경으로 숨가쁜 모험 활극이 펼쳐진다. 흉악한 침략자 종족, 거기에 부역하는 비열한 인간들, 친절하고 우호적인 외계종족과, 상상을 뛰어넘게 고도화 된 외계문명과, 납치, 감금, 탈출, 격투, 우정, 일촉즉발의 위기, 심지어 인류의 기원에 대한 떡밥 등등 기다렸던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모두 다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 내내, 킵은 성실하다. 사람들에게 충실하고, 하나하나의 국면에 전심을 다해 임한다. 이쯤 되면 알아차렸겠지만, 사실 성실성은 그의 매력의 핵심이다. 다행히 작가는 그에게 성실성을 주면서 유머감각과 센스도 함께 붙여주었다. 성실함은 지루함으로 변주되기 쉬운데, 그 두 가지가 함께 하면 염려가 사라진다.
모든 모험을 끝내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을 때, 킵은 피위의 아버지인 레이스펠트 교수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제가 시도했던 일은 다 어설펐던 것 같아요. 그래도 항상 도움을 받고 억세게 운이 좋았죠.”
“ ‘운’은 언제나 생각해볼 게 많은 단어지.” 교수가 대답했다.
“넌 내 딸이 처음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네가 듣게 된 게 ‘엄청난 운’이라고 했는데, 그건 운이 아니었어.”
“네가 왜 그 주파수대에 있었지? 우주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네가 왜 우주복을 입고 있었지? 우주에 가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우주선이 호출했을 때 네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 게 운이라면, 타자가 공을 칠 때마다 운이라고 해야겠지. 킵, ‘행운’은 꼼꼼하게 준비했을 때만 따라오는 거야. ‘불운’은 일을 대충 처리했을 때 따라오지. 넌 인류보다 더 오래된 법정에서 너와 네 종족을 구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켰어. 그게 그저 운이 좋아서 그런 걸까?”
우주복을 손에 넣었던 것. 우주복을 입고 있었던 것. 무전기가 멀쩡히 작동되었던 것. 모두가 따지고 보면 ‘운’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다. 행운은 꼼꼼하게 준비했을 때만 따라온다.
대통령이 바뀌고 일주일이 지났다. 날마다 나오는 뉴스들이 놀랍다. 종종 허를 찌르는 그것은 최소 5년 절치부심의 증거들이다. 어떤 것도 운이 아니다.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며, 어떤 것도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한다. 킵은 계산도 기대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 모두에게 성실했고 그 결과는 긴 연쇄의 끝에 마치 우연과 같은 얼굴을 하고 새침하게 찾아왔다. 그런 것이다. 내 몫의 행운을 위해, 마침표부터 성실하게 찍어야겠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은 명랑하고 유쾌한 소설입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과 경쾌한 필치, 1958년도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연출이 어우러져 상당히 속도감 있게 잘 읽혀요. 과학 지식들도 상세하고 엄밀해서, ‘대충 이렇다 치자’ 식의 헐렁함도 없고요. 특히 우주복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공학적 설명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작가가 실제로 우주복 연구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녹여내서 그렇다네요. 거침없는 상상력이 준엄한 과학 위에 올라타 있으면 SF의 재미는 더욱 각별해집니다. ‘언젠가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가 부풀어오르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로버트 A. 하인라인이라는 작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어요. 다작을 한 작가니만큼 기복이 좀 있는데, 하필 좀 별로이거나 제 취향이 아닌 작품들만 골라 읽어왔던 모양이에요.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이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좀 더 읽어보겠다는 의욕이 생겼어요.
킵과 피위의 이 은하계 레벨 모험담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달에서의 도보 여행 파트였습니다. 우주복을 입고 월면을 걸어 수십 킬로미터를 강행군 하는 장면이 1992년 휴고 상 수상작인 제프리 A 랜디스의 단편 『태양 아래 걷다』를 연상시켰거든요. 그러니 다음 글에서는 『태양 아래 걷다』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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