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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새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프레드릭 브라운,「미래에서 온 사나이」

by 북드라망 2017. 5. 31.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SF'를 '공상과학'이라고 번역하곤 하지만, 저(편집자)는 반대입니다! 반대에요. '공상'이라니…. 뭐 물론 그런 특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SF 소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니까요.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있을 법한 일'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고, 과학을 그저 양념처럼 쳐서 아예, 멀찍이 현실을 넘어가 버리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어쨌든, SF는 그야말로 '과학적 상상력'의 시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주부터 그런 SF 소설들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윰'님의 SF 소설 읽기를 연재합니다. 부디, 보다 많은 SF 팬덤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흑.



프레드릭 브라운,「미래에서 온 사나이」

미래에서 온 까망 과거에서 온 빨강 



20세기 중엽의 미국, 여름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젊은 농부 루 앨런비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장을 함께 가꾸어온 여동생 수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수는 그 남자를 남편이라고 소개해서 루를 두 번 놀라게 만들었다. 루가 집을 비운 사이, 이 남자가 다리를 다친 채 농장으로 찾아왔고, 두 사람은 단박에 사랑에 빠졌으며, 만난지 하루만에 결혼을 감행했다는 설명이었다.


무일푼에 어떤 연고도 없는 이 수상쩍은 청년은 자기가 40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워져버린 역사 속 이 시대를 조사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찾아온 연구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시간여행에 관한 그의 설명은 나름대로 조리가 있었고, 그가 들려주는 미래사회 인간의 발전상은 구체적이고 실감났으며,  밭 한 가운데서 홀연히 시작된 그의 발자국, 현대 사회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사전을 삼킨 것만 같은 어색한 문어체 말투는 그의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기묘한 신빙성을 더했다. 남매는 그의 이야기를 믿었다. 엄밀히 말하면, 수는 믿었고, 루는 반신반의 했다는 게 맞겠지만. 


「미래에서 온 사나이」 _ 무려 세로 쓰기.


어쨌든 미래에서 왔다는 이 남자, 장 오블라이엔은 대단히 영리하고 성격도 싹싹했다. 루는 그에게 금세 호감을 느꼈고, 여동생 부부에게 호의를 베풀어 장이 ‘현대 사회’에 적응할 때까지 농장에 함께 머물도록 하였다. 셋은 꽤나 잘 지냈다…. 루가 장에 관하여 치명적인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프레드릭 브라운의 다른 초단편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도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을 제시하기 위해 소설적 터치를 가미한 시놉시스에 가깝다. 짧은 분량 안에서 아이디어를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최소한의 대사나 상황묘사같은 장치들을 덧붙인 수준이라서, 기본 얼개는 단순하고, 인물들은 얇고 평면적이다.


이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우리 시대의 치명적인 편견을 이미 모두 극복한 먼 미래사회의 인간이 현재로 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를 형상화 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편견은 바로 인종주의였다. 


“나는 그 사람의 시대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종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공부한 것을 얼마쯤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시대에는 인종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만, 무슨 전쟁이 끝난 뒤에 시작된 그의 시대에는 모든 인종이 하나로 융합해 버렸답니다. 백인과 황인종이 서로 상대방의 대부분을 살해하여 한동안 아프리카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윽고 모든 인종이 식민과 잡혼으로 융합하기 시작하여 그의 시대에 이르자 그 과정이 완료되었다는 겁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물었습니다. ‘그럼, 자네에게는 니그로의 피가 섞여있나?’ 그러자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4분의 1은.’ 


루는 그 말에 눈이 뒤집혀 장을 총으로 쏘아버린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보안관이 그놈은 백인 행세를 하려던 비열한 사기꾼 깜둥이일 뿐이고, 너는 응당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이 사건은 그냥 우리끼리 덮고 지나가자고 다독이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시대의 편견에 갇힌 어리석은 시골 농부 덕분에 의미심장한 시간여행이 허망히 실패하고 만다는 내용의 이 비극적인 촌극에서 그 기본 아이디어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인물들이 다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다. 


‘미래세계에서 온 사나이’인 장은 현대인(그의 입장에서 보면 고대인)의 수많은 편견과 비합리적 관행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례로, ‘예뻐보이기 위해 얼굴에 희고 빨간 안료를 칠하는 고대 여성들의 풍습’을 그는 수에게서 처음 보았지만, 그걸 미개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편견없이 하루 만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기까지 이른다!), 현대인의 온갖 습속을 열린 마음으로 존중하며 열심히 배우려는 태도까지 보인다. 



그러한 장에게 다채로운 유색인종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일정 부분 은유적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흑과 백을 망라한 다양한 색채의 섞임은 이미 자기 안에 압축되어 있는 역사다. 인종간 융합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그런다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진실을 그 자신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몸으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대에서 겪고 배우고 깨달으며 쌓아온 힘겨운 각성의 역사가 말그대로 그의 신체 안에 혈액으로, 체액으로 흐르고 있다. 


반면 수는 접붙이를 행하는 사람이다. 사랑으로 이미 한껏 유연해진 그녀는 이질적인 것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고 새로운 관념을 제 일부로 통합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수의 내면에서는 관념과 상식의 업데이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불행히도 루는 그 두 사람과 다르다. 그는 백인 인종주의자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백인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작동되는 사람이다. 그 경계 바깥의 누군가 또한 동등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상상 너머의 악몽이 될 것이다. 인종간 결혼처럼 자신이 승인할 수 없는 현실을 대면할 때, 그의 반응은 기본적으로 공포다. 유연성을 상실한 채  공포를 둘러치고 있는 그의 딱딱한 영혼에는 어떤 것도 새로이 업데이트 되지 못할 것이며, 허용할 수 없는 관념이 현실로 침범해 들어올 경우, 그는 거리낌없이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존재를 송두리째 위협당한 양 단호하고 절박하게. 마치 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는 루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루처럼 선량하고, 루처럼 확신에 가득차 있으며, 루처럼 공포에 질려있는 사람들. 그 아집과 독선에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나다가도 문득문득 오히려 안쓰러움에 누그러질 수 있다면, 그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상상해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마음도 부드러운 헝겊처럼 바람결따라 나부끼며, 습자지마냥 생각과 관념들을 마음껏 빨아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다만 삶의 어느 지점에서 ‘공포’를 만났고,  가감없이 그 독극물을 그대로 흡수할 줄밖에 몰랐을 정도로 불운했을 뿐이다. 


공포란 묽게 푼 석고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것은 꾸역꾸역 마음을 타고 올라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공포의 입자들이 올올이 스며 알알이 박혀버린 마음은 이윽고 회벽처럼 단단해져서 씻어낼 타이밍을 영영 놓쳐버리고 만다. 이제 그 마음에는 지나간 날들의 풍성하던 나부낌도 습자지같은 흡수력도 결코 다시 깃들지 못할 것이다. 슬프지만 아마도, 영원히. 



지난 겨울, 거리에서는 루와 꼭 닮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이 종종 목격되었다. 그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상상력이 허락하는 최악의 욕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빨갱이!”라는 말을 악의를 담아 내지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 그 절박한 얼굴들에는, 루가 내보였던 것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유색에 대한 공포’가 드러나 있었다. 저한테는 묻으면 안 될, 멸망의 징후로서의, 끔찍한 괴물의 출연을 예고하는 불온하고 사악한 한 가지 색깔.  

색깔을 악마화 하는 것은 그들의 공통점이다. 20세기 중반 미국 시골의 인종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검은 색이 그랬고, 전쟁과 반공정신과 국가주의에 경도된 채 평생을 살아온 분들에게 있어서는 빨간 색이 그렇다. 한 가지 색깔을 지목해, 제 순수를 망가뜨릴 위협, 오염, 사악함의 상징으로 적대하는 모습은 서로 꼭 닮아있다. 시청앞 노인들에게 빨강은, 내가 먼저 덮지 않으면 덮어씌워질, 내가 먼저 지우지 않으면 나를 지우고 세상을 물들여버릴, 끔찍한 위협이고 가공할 공포다. ‘빨갱이’를 욕설로 쓸 때, 그분들은 차분한 보라색을 상상하지 못한다. 발랄한 분홍도, 환한 오렌지 빛깔도 알지 못하는 눈치다. 그 산뜻한 색깔들을 만드는 데 빨강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면, 그분들은 그마저 싸잡아 밀쳐내실 것만 기세다. 빨강과는 전혀 다른 색깔이어도 그렇다. 이미 공포가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영혼은, 유연성을 잃고 생각의 업데이트를 멈추어버린 지 오래기 때문에.   


한때는 그것이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그 단호한 공포와 배제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공용의 감각이었던 시절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고임없이 흘러왔고, 세상은 그와 함께 꾸준히 변화해왔다. 루와 장 사이의 4000년 간극은 장이 그 시간을 거슬러 왔기 때문에 생겼다. 시청과 광화문의 차벽 사이에 놓인 50년의 간극은, 우리시대의 루들이 그 시간을 내내 망부석처럼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폭력적인 덧칠로만 상징되던 유성페인트의 시대는 사실 그분들이 모르는 새 흘러가버렸다. 이제는 말하자면 수채물감이 대세다. 오늘날 색깔들은 하나에 덮이고 침탈당하기보다는 서로 부드럽게 섞이거나 어우러지면서 다른 의미를 재생산한다. 색깔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꾸준하게 희석되어 왔다. 20세기 중반으로부터 지금까지의 미국에서. 온 사회가 빨강을 무서워하던 전후(戰後)로부터 월드컵 군중의 색깔로서 파도타기를 하던 21세기의 저 거리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 겨울의 광장에서, 루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장들과 더 많은 수들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시간을 이미 통합적으로 포용한 신체로써 새로운 역동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어린 미래인들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을 새롭게 업데이트하며 열심히 접붙이를 행하고 있는 성실한 현대인들을. 그들은 색깔과 색깔이 섞일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 하나의  맹렬한 색깔에 겁먹어 이성을 잃는 대신, 가만히 분홍이나 보라를 빚어내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소설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장은 부드러운 갈색의 피부와 아몬드 모양의 긴 눈매, 큰 입매를 벌려 개방적인 미소를 보낼 줄 아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위화감 없이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갈색, 검정, 빨강과 다른 모든 색깔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수채 팔레트처럼 펼쳐내는 상상력이 있다면, 전후 50년이 뭐야, 4000년 어치의 미래도 거뜬할 것만 같다. 


글_윰(SF팬) 


+

<미래에서 온 사나이>는 작고, 얇고, 아주 낡은 책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지방소도시로 기차 통근을 하시던 시절, 이동 중에 읽으시던 손바닥만한 70년대 문고판 소설책이었습니다. 플랫폼에 서서 서성이며 한손에 말아쥐고 읽다가, 기차가 오면 간단히 뒷주머니로 쓱 밀어넣을 수 있는 작고 가벼운 판형이었지요. 그런 용도로 구입된 수많은 책들이 버려지거나 분실되어 잊혀져갔지만, 어쩐 일인지 이 책 하나만큼은 용케 아버지의 서가에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어린 딸이 한뼘 정도 더 자라, 집에 있던 어린이용 세계명작전집 등의 아동도서를 모조리 다 읽어치우고, 새로운 읽을거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매다가, 입맛 다시며 아버지의 서가를 넘겨보기 시작할 때까지요. 



짧은 다리로 책상 위로 기어올라가 제목들을 훑어보았을 때,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어른 책’ 제목들 사이에서 이 책은 당연히 첫번째 눈길을 끌었습니다. 세상에, <미래에서 온 사나이>라니요. 장화신은 고양이, 집없는 아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저 사이에 갖다 놓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제목이잖아요? 개미 아랫배만한 폰트에 세로쓰기라는 치명적인 단점도 초등학교 3학년 책벌레의 불타는 독서욕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딱딱한 플라스틱 자를 대고 책장 위에 꾹꾹 눌러가며 한줄한줄 천천히 읽어내려갔고, 그로써 이 책은 제 인생 최초의 현대 SF소설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브레드릭 브라운의 책은 국내에 정식 출판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그는 제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가들 중 하나였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제게 SF로의 관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으니까요. SF 리뷰의 첫 글을 그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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