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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삼국사기』속의 천재지변, 그리고 왕과 나라의 운명

by 북드라망 2016. 9. 20.



너무나 역사적인 사실

: 자연사와 인간사의 함수관계 #2





❚ 천재지변과 왕의 죽음


자연은 인간생활에 직접 관계되기도 하지만, 왕의 죽음과 같은 인사(人事)를 천재지변으로 예시한다. 「신라본기」에는 왕의 죽음을 예고하는 이상한 기운들이 기술된다. 『삼국사기』 안에서 이런 것들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고 할 때 하늘은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응동應同편」, 『여씨춘추』) 것처럼 왕이 죽기 직전에도 예사롭지 않은 조짐들이 몰아친다. 지금의 우리는 믿지 않는, 어렴풋한 비의로만 간직한 하늘의 예시와 조짐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적어도 사실로서 인지했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영역에 넣지 않고 소설이나 야사의 영역에 넣는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로 비중 있게 다뤄진다.


* 혁거세 거서간
60년 가을 9월에 용 두 마리가 금성 우물 속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죽었다. 사릉에 장사하니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 유리니사금

31년 봄 2월에 자미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33년 여름 4월에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나고 좀 있다가 소나기가 서북으로부터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뽑았다.
34년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 남해차차웅
11년 낙랑이 우리나라의 속이 비었다 하여 금성을 급하게 몰아쳐 왔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매 적병들이 무서워 물러가다가 알천가에 머물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갔다.
20년 가을에 금성이 태미성좌에 들어갔다.
21년 가을 9월에 누리가 생겼다. 왕이 죽었다. 사릉원 안에 장사하였다. 


* 탈해니사금
24년 여름 4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었으며 금성의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 파사니사금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 일성니사금
20년 겨울10월에 궁궐대문이 불탔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또 동북쪽에 나타났다.
21년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 나해니사금
34년 여름 4월에 뱀이 남쪽 고방에서 사흘 동안 울었고 가을 9월에는 지진이 있었으며 겨울 10월에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되었다.
35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 눌지 마립간
42년 봄 2월에 지진이 있었고,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 진평왕
53년 가을 7월에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에 박히고 토성이 달을 범했다.
54년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 소성왕
2년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를 꺾고 기와가 날리고 서란전에 쳤던 발이 날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임해 인화 두문이 무너졌다. 6월 왕이 죽었다.



천재지변과 왕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들이다. 열거된 기사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매우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왕의 죽음이 있기 직전 천지자연의 교란이 출현한다. 이것이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김부식 혹은 「신라본기」 편찬자들은 자연재해의 사건과 왕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인간관계로 얽혀있음을 자명하게 인식했음에 틀림없다. 


왕은 하늘이 내고, 하늘이 데려간다. 왕의 운명은 하늘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이 될 자격은 아무나 갖추는 것이 아니다. 왕은 하늘이 내린다. 그를 거둬가는 것도 하늘이다. 왕으로 등극할 때는 상서로운 조짐이 내려지지만, 왕의 죽음은 상서롭지 않은 조짐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하늘도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죽음의 기운은 천지의 질서도 불안정하게 만든다. 왕의 죽음도 하늘이 예시한다는 믿음은 대부분 「신라 본기」에서 발견된다. 특기할 만한 점은, 고구려와 백제는 왕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라는 왕의 죽음을 하늘이 미리 알려준다고 믿었다. 왕의 죽음은 인간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늘은 궤도를 이탈하는 혼란으로서 인간들에게 미리 보여준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왕의 권위를 무한대로 증폭시킨다. 



❚ 천재지변과 반란과 국망(國亡)


왕이 선택받은 자라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다. 천명(天命)에 의해 왕이 된 자는 천도(天道)를 수행해야 한다. 천도를 행하지 않으면 그에게 하늘은 재앙을 내린다. 왕이 빨리 개혁할 줄 모르면 재앙은 극단적인 사태로 치닫는다. 재앙의 극치는 모반이거나 나라의 쇠망이다. 반란과 국망의 책임은 늘 왕에게 있다. 사악한 정치로 천도를 흔들고 민심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민심을 살피지 않는 등 정사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이런 왕에게는 하늘의 견책이 내려지는데, 하늘이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천재로서 예고하는 것이다. 선택된 자이기에 책임이 무겁다. 반란과 역모는 자신으로부터 온다. 신하들이 참람해서, 즉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 나라가 망하기 전, 이상한 조짐들이 밀려온다. 


* 유리니사금
11년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이 솟았고 여름 6월에 큰 물이 났다.
13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함락시켰다.


* 파사니사금
25년 봄 정월에 뭇별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는 미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음즙벌국 실직이 배반하매 군사를 내어 토벌 평정하고 그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겼다.


* 지마니사금
11 년 여름4월에 큰바람이 동쪽으로부터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왓장을 날리다가 저녁이 되어 바람이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뜬소문을 내어 저마다 먼저 산골로 도망치므로 왕이 이찬 익종 등을 시켜 그들을 타일러 말렸다.


* 진평왕
53년 봄 2월에 흰 개가 대궐 담장 위에 올랐다.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역을 도모하는 것을 왕이 알아채고 칠숙을 잡아 동쪽 저자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그의 구족을 잡아 죽였다.


* 신문왕
4년 겨울 10월에 저녁부터 날 샐 녘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11 월에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찍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다. 남은 사람들이 대문이 사형당해 죽는 것을 보고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고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을 시켜 이를 토벌하는데, 맞아 싸우던 당주 핍실이 여기서 죽었다.



* 효소왕

8년 봄 2월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닷새만에 회복하였다.
9월에 동해의 물이 서로 맞부딪쳐 그 소리가 서울에까지 들렸고 병기고속에서는 북과 나팔이 저절로 소리를 냈다.
9년 여름 5월에 이찬 경영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 받고 중신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10년 혜성이 달에 들어갔다. 여름 5월에 영암군 태수 일길찬 제일이 공사를 저버리고 사사이익을 취하므로 곤장 1백대를 때려 섬으로 귀양보냈다.


* 효성왕
2년 여름 4월에 흰무지개가 해를 꿰고 소부리군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3년 가을 9월에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여우가 월성 궁중에서 우는 것을 개가 물어 죽였다.
4년 여름 5월에 토성이 헌원성좌의 큰 별을 범하였다. 가을 7월에 붉은 옷을 입은 웬 여자 한명이 예교 다리 밑으로부터 나와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고 효신공의 대문을 지나서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8월에 파진찬 영종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종의 딸이 왕의 첩으로 들어와 왕이 그를 몹시 사랑하여 은총이 날로 더하더니 왕비가 이를 질투하여 친족과 함께 그를 죽이고자 공모하였던 바 영종이 왕비와 그의 친족들에게 원한을 가졌으므로 반역을 한 것이다.


* 혜공왕
2년 봄 정월에 해가 둘이 돋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왕이 신구에 친히 제사지냈다. 양리공의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이요, 다리 하나는 위로 향했다. 강주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깊이와 넓이가 50여척이나 되었고 물빛은 검푸르다.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북소리 같았다.
3년 여름 6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에 별 세 개가 대궐 뜰에 떨어져서 서로 맞부딪쳤는데. 빛이 불빛같이 날아 흩어졌다.
4년 봄에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6월 서울서 천둥하고 우박이 내려 초목이 상하였다.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고 우물이나 샘이 다 말랐다. 범이 대궐 속에 들어왔다. 가을 7월에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지어 33일간 왕궁을 에워쌌더니 왕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다 죽였다.
15년 봄 3월에 서울에 지진이 있어 민가가 무너지고 죽은 자가 1백 여 인이나 되었으며 금성이 달에 들어갔다.
16년 봄 정월에 누른 안개가 끼었고 2월에는 흙비가 내렸다.
왕이 어렸을 때 왕위에 올라 장성하자 오락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노는데 절제가 없고 강기가 문란하매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이탈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되었더니 이찬 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가기고 대궐을 침범하여 에워쌌다.

여름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경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지정 등을 죽였는데 왕과 왕비는 난리통에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혜공왕 2년 정미(767) 천구성이 동루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꼬리는 3자나 되었다. 빛깔은 타는 불꽃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했다. 또 이해에 금포현의 논 5경에서 쌀낟이 이삭을 이뤘다.
이해 7월에는 북궁 뜨락에 두 별이 먼저 떨어지고, 또 한 별이 떨어졌다. 세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연꽃 두 줄기가 났고 봉성사 밭에도 연꽃이 났다. 호랑이가 금성에 들어왔는데 뒤를 쫓아갔지만 잡지 못했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수없이 모였다. 安國兵法(안국병법) 아래 권을 살펴보면 천하에 큰 병란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죄인을 크게 놓아주고 왕이 자숙하며 반성했다.
7월 3일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왕도와 5도 주군의 96각간들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워졌다. 난리가 석 달이 지난 뒤에야 그쳤다. 상을 받은 자도 아주 많았지만 죽음을 당한 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나라가 위태롭다던 표훈대덕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이하」, 『삼국유사』)


* 애장왕
10년 봄 정월 달이 필성성좌을 범하였다. 여름 6월에 서형산성 소금 창고가 울었는데 소 우는 소리와 같았으며 벽사에서 왕머구리가 뱀을 잡아먹었다.
가을 7월에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인 이찬 제옹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왕의 아우 체명이 왕을 시위하고 있다가 동시에 살해되었다.



* 고국천왕 (고구려)
4년 봄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성좌에 관통되었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 가을 7월에 혜성이 태미성좌에 나타났다.
6 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왕자 계수를 보내 치게 했다. 이기지 못하매 왕이 친히 정예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더불어 좌원에서 싸워 그들을 쳐부수고 적군의 머리를 벤 것이 산더미처럼 되었다. 
8년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성이 심성성좌에 머물렀고 5월 그믐날 임진에는 일식이 있었다.
12년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 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틀어잡고 있음에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도를 믿어 교만하고 사치하고 남의 자녀들을 약탈하고 남의 토지와 주택을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분개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였더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반역을 획책하였다.
13년 여름 4월에 좌가려가 군사를 모아가지고 서울 침공하니 왕이 서울지방의 군사와 마필을 징발하여 그들을 진압.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


* 보장왕 (고구려)
겨울 10월 평양에 빛깔이 붉은 눈이 내렸다.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앉힘.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쇠토막이 비처럼 떨어졌다.
19년 가을 7월에 평양 강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과 같았다.
보장왕 27년 여름 4월에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이 말했다.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


* 온조왕 (백제)
25년 봄 2월에 왕궁의 우물에서 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는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암시로 된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두게 되었다.

* 비류왕 (백제)
13년 봄이 가물었고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 떨어졌고 여름 4월에 서울의 우물에 물이 넘치고 그 속에 검은 용이 나타났다.
22년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바람결에 서로 부딪치는 파도소리와 같았다.
24년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양편에 해를 끼웠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에 웅거하여 반역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였다.


* 의자왕 (백제)
15년 여름 5월에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서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수일 뒤에 죽었다.
19 년 봄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9월에 대궐뜰에 서있던 홰나무가 사람의 곡소리와 같이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한길에서 귀곡성이 있었다.
20년 봄2월에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되었다. 서해 가에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여름4월 왕머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누가 잡으러 오는 듯이 놀라 달아나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것은 계산 할 수도 없었다.


『삼국사기』 역사 기술의 특이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마찬가지로 길게 인용해 보았다. 위에 인용한 일련의 기사들은 김부식이 천재지변의 조짐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리고 실로 하늘의 기운을 얼마나 주시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국왕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반란이 일어나기 전, 나라가 망하기 전, 예외 없이 하늘은 조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의 기사들은 면면히 드러내고 있다. 아니 철썩 같이 믿음으로써 사실임을 설파하고 있다. 김부식에게 삼라만상 우주의 기운은 서로 연동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그것도 지상의 만물 중 가장 영험한 인간이 우주의 기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지사이다.




우리들의 역사인식에 의거할 때, 이렇게 배치된 사건기술은 분명 허탄하고 황탄하게 여겨질 것이다. 김부식 스스로가 그토록 배격했던 허탄과 황탄의 경계를 가볍게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여씨춘추』를 편찬한 여불위, 한나라 시대 『춘추번로』를 저술한 동중서의 입장에 설 때, 『삼국사기』의 천재지변의 조짐과 정치·사회적 사건의 상호연관성은 전혀 반-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역사적인 기술이었다는 것이다.


음양오행을 중시하는 사상가들에게 정치를 바로잡고 왕을 바로잡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가 천지자연의 행로였다. 무소불위의 왕을 제어할 수 있는 존재로 왕을 내려준 ‘하늘’ 이외에 더 강력한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천지자연의 질서는 곧 천심의 반영이다. 하여, 천지자연의 움직임은 왕의 행위를 경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척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보여준 바, 천재지변과 반란 혹은 국망의 인과관계는 괴력난신의 허황한 역사도 아니요, 미신에 입각하여 역사를 신비화하는 행위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과 사실의 연결고리는 해석이자 신념의 문제였지만, 적어도 김부식과 삼국시대 사람들에게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허구도 진실의 부산물이라고 보는 폴 벤느의 말을 패러디하여, 해석도 사실의 부산물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역사는 해석이다. 직관에 의해 사실과 사실을 연결시키는 방식. 이것 자체도 김부식에게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천지운행의 궤도를 더 열심히 관찰하고, 그것을 세밀하게 분류했으며, 그것으로 인간의 행위를 더 면밀하게 성찰하고 다듬었던 것이다. 적어도 하늘의 조짐들은 있었던 사실이다. 그것을 하늘의 마음이자 견책으로 읽는 건, 김부식 시대의 에피스테메 안에서는 적어도 진실이자, 사실인 것이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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