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를 만나고 싶지 않다
욕망의 그침 - 중산간
아침마다 미국의 단편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의 문장을 필사하고 있다. 그의 문장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묘사하는 데 전부를 할애한다. 소설에 묘사된 말과 행동 외에 인물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단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카바의 문장은 매우 건조하게 느껴진다. 습기를 모두 날려버린 문장. 가을 나무의 바싹 말라버린 이파리들을 보는 듯하다.
그러자 소설을 읽는 나는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유추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 방식대로, 내 틀대로 등장인물을 재단한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어한다. 등장인물이 상식 밖의 행동이라도 하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흥분한다. 좋고 나쁨이라는 이분법적 잣대와 사회에서 부여한 도덕적 관념으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렇게 소설을 읽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준 소설은 「칸막이 객실」이다. 「칸막이 객실」은 내가 읽은 카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짧으면서 가장 건조한 소설이다. 나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가장 압축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쓰고 싶은 것만, 말하고 싶은 것만 쓰고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까?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이 소설이 중산간 괘와 오버랩되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중산간 괘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중산간(重山艮)은 위에도 산, 아래에도 산, 산이 이중으로 겹쳐 있는 괘다. 산의 괘상은 양이 맨 위에 있는데, 아래 골짜기로부터 봉우리를 짓고 그쳐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산을 뜻하는 간(艮)은 그쳐 머무른 상태, 멈춤을 뜻한다. 하여 중산간은 그침의 괘다. 그침과 「칸막이 객실」은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 이제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산간 괘사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간기배 불획기신 행기정 불견기인 무구)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
彖曰 艮 紙也 時止則止 時行則行(단왈 간 지야 시지즉지 시행즉행)
단전에 이르길 간은 그침이니, 때가 그칠 때면 그치고 때가 행할 때면 행하여
動靜不失其時 其道 光明 艮其(止)背 止其所也(동정불실기시 기도 광명 간기지배 지기소야)
움직이며 고요함에 그때와 그 도를 잃지 아니함이 광명하니, ‘간기지배’는 그곳에 그치기 때문이라.
上下 敵應 不相與也(상하 적응 불상여야)
상하가 적응하여 서로 더불지 못하기 때문에
是以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无咎也(시이불획기신행기정불견기인무구야)
이로써 ‘불획기신행기정불견기인무구’이니라.
象曰 兼山 艮 君子 以 思不出其位(상왈 겸산 간 군자 이 사불출기위)
상전에 이르길 산이 아울러 있는 것이 간이니, 군자가 이로써 생각을 그 위에 나아가지 아니하느니라.
간(艮)은 산이고, 산은 그쳐 있다. 어떤 움직임이 계속 있다가 그 움직임이 어떤 덩어리를 만들어 산이라는 형상으로 그쳐 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운동성으로 자신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작은 산, 큰 산, 둥근 산, 찌그러진 산 등등 자신의 운동성으로 만들어낸 갖가지 산이 있다. 결국, 산은 운동성의 소산이며, 그 운동성의 그침이 ‘간’이다.
운동성이 그쳤으니 간은 말뚝처럼 가만히 있는 것일까? 아니다. 행할 때는 행하고, 그칠 때는 그치고, 나아갈 때는 나아가고, 물러날 때는 물러나고, 입 다물 때는 입 다물고, 말할 때는 말한다. 그야말로 운동성 속의 그침이다. 이러한 그침이 가능하게 하려면 하나의 운동성을 고집하면 되질 않는다. 계속 행하기만 한다면, 계속 그치기만 한다면, 계속 나아가기만 한다면 어떻게 그칠 수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 그침은 하나의 운동성을 고집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자신을 봐야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 자체가 그침이다. 보는 것으로 그 운동성을 그치게 되었으니까.
산은 자신의 운동성으로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낸다.
「칸막이 객실」에는 팔 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가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마이어스다. 마이어스는 아이 엄마와 이혼한 상태다. 그동안 둘 사이에는 전화도, 단 한 장의 엽서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마이어스는 두어 달 전에 아들의 편지를 받았다. 아들은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고 지난해부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마이어스는 얼마간 숙고한 뒤, 아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한데 마이어스는 프랑스로 가는 기차에서 뜻밖의 사건을 겪는다. 아들에게 줄 손목시계를 도난당한 것이다. 마이어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욕망을 보게 된다.
그는 일어나서 여행 가방을 내렸다. 그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저 짜증만 날 뿐인 차창 밖 풍경을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결국 자신은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그는 충격을 받았고, 잠시 그 비열함에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바보짓을 했지만, 이 여행은 그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애정을 거둬들이게 행동했던 그 아이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그에게는 없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게 자신에게 달려들던 그 순간의 아이 얼굴이 떠오르면서 쓰라림이 물결처럼 마이어스를 지나갔다. 그 아이는 마이어스의 청춘을 집어삼켜 버렸고, 그가 연애해서 결혼한 젊은 여인을 신경과민의 알코올중독자로 바꿔놓고는 번갈아가며 병도 주고 약도 줬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누군가를 만나려고 이 먼 길을 나섰단 말인가. 마이어스는 자문했다. 그는 아이의 손, 자기 인생의 적인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싶지도 않았고 어깨를 토닥거리며 이런저런 안부를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아이에게 엄마에 대해 묻고 싶지도 않았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칸막이 객실」, 문학동네, 81~82쪽
아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 가장 멍청한 일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여기에 한술 더 떠 아들을 자기 인생의 적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마이어스는 분명 이상한 아버지다. 우리가 알고 있고, 배워온 아버지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아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 그렇다면 그런 아버지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그 장본인은 이 사회를 살고 있는 구성원들이다. 집합적 신체가 관념으로 만들어낸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내면화해서 그 잣대를 들이댄다. 아버지가 뭐 저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이어스는 우리가 정해놓은 아버지라는 상을 깨뜨린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액면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의 가식적인 행동을 깨닫고 그 비열함에 자신을 초라하게 느낀다. 그리고 마이어스는 말한다.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자기 인생의 적인 아들의 손을 잡고 싶지도,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부를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고.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고 멈춘다.
중산간 괘는 자신의 운동성으로 그친 산이다. 마이어스의 산은 우리가 보기에 찌그러진 산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찌그러진 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각자 자신의 운동성으로 만들어낸 산이 있을 뿐이다. 마이어스의 산이 있다면 우리 자신의 산이 있다. 마이어스가 자신의 산을 보았듯이 우리 자신의 산을 보아야 할 뿐이다. 중산간 괘사 첫머리에 나오는 ‘그 등에 그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 몸에서 산과 같은 형상을 한 등에 그쳤으니 자신의 산을 직시하고 자각하라는 것. 결국, 내 욕망의 흐름을 읽어내라는 것이다.
중산간 효사
初六 艮其趾 无咎 利永貞(초육 간기지 무구 이영정)
초육은 그 발꿈치에 그침이라. 허물이 없으니, 길이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象曰 艮其趾 未失正也(상왈 간기지 미실정야)
상전에 이르길 ‘간기지’는 바름을 잃지 아니함이라.
괘사에서 사람의 몸으로 그침을 설명하고 있으니, 효사도 그에 따라 몸으로 그침을 설명한다. 초육은 음이 맨 처음에 있고, 자리로는 맨 아래에 해당한다. 직립하는 인간의 맨 아래에 있는 것은 발꿈치이다. 초육이 몸의 맨 아래에 해당하는 발꿈치에 그쳤으니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발꿈치에 그친다는 것은 바르게 서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발꿈치를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라고 할 수 있는데, 뿌리가 들썩거리지 않도록 그쳐 있으니 나무가 안정되게 잘 자랄 수 있다.
六二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육이 간기비 부증기수 기심불쾌)
육이는 그 장딴지에 그침이니, 그 따르는 이를 구원하지 못하니라.
象曰 不拯其隨 未退聽也(상왈 부증기수 미퇴청야)
상전에 이르길 ‘부증기수’는 물러나 듣지 않기 때문이라.
음이 두 번째에 있어 육이다. 육이의 그침은 장딴지이다. 육이는 그 자리가 두 번째 있어 음이 음자리에 바르게 있다. 또 음은 고요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양은 움직이는 성질이 있으니 육이는 고요히 있으려고 한다. 하지만 위에 있는 구삼이 양이다 보니 육이의 말을 듣지 않고 자꾸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육이는 구삼을 구원할 수 없다.
九三 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구삼 간기한 열기인 여 훈심)
구삼은 그 허리에 그침이라. 그 팔뚝을 벌리니, 위태하여 마음이 찌는 듯하도다.
象曰 艮其限 危 薰心也(상왈 간기한 위 훈심야)
상전에 이르길 그 허리에 그침이라. 위태로움에 마음이 찌도다.
양이 세 번째 있어 구삼이다. 구삼은 허리에 그친다. 하나 구삼은 양이다 보니 자꾸 움직이려 하고, 허리에 그쳐 있으니 잠자코 그치지를 못한다. 이를 두고 내괘의 산은 안으로 진동의 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그치지를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구삼의 그침은 위태롭고, 그 위태로움에 몸과 마음이 불편하여 애가 탄다.
그쳐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六四 艮其身 无咎(육사 간기신 무구)
육사는 그 몸에 그치니 허물이 없느니라.
象曰 艮其身 止諸躬也(상왈 간기신 지저궁야)
상전에 이르길 ‘간기신’은 그 몸에 그침이라.
음이 네 번째에 있어 육사다. 육사는 그 자리가 중을 얻진 못했지만, 음이 음자리에 바르게 있다. 구삼은 양이 양자리에 있어 강하게 움직이지만, 육사는 음자리에 있어 부드럽게 자신의 몸에 그친다.
六五 艮其輔 言有序 悔亡(육오 간기보 언유서 회망)
육오는 그 볼에 그침이라. 말이 차례가 있음이니 후회가 없으리라.
象曰 艮其輔 以中 正也(상왈 간기보 이중 정야)
상전에 이르길 ‘간기보’는 중으로써 바름이라.
음이 다섯 번째에 있어 육오이다. 초육은 발꿈치에 그치고, 육이는 장딴지에 그치는데 허리가 말을 잘 안 들어서 마음이 불쾌하고, 구삼은 허리에 그치려고 하니까 힘이 들어 위태롭고, 육사는 자신의 몸에 잘 그쳤다. 육오에 이르러선 볼에 그친다. 볼에 그쳤으니 자연히 입이 다물어져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꼭 해야 할 말만 하고 순서를 갖추어 조리 있게 말을 하니 말로 인해 생기는 시비가 없고 후회 또한 없다. 이것이 바로 중이고 바름이라고 하였다. 또 육오의 자리가 음이 양자리에 있어 원래 바른 것이 아니지만 외괘에서 중을 얻었으니, 육오가 그 자리로써 중을 지키므로 바르게 된 것이다.
上九 돈간 길(상구 돈간 길)
상구는 도타웁게 그침이니 길하니라.
象曰 敦艮之吉 以厚終也(상왈 돈간지길 이후종야)
상전에 이르길 ‘돈간지길’은 후함으로써 마치기 때문이라.
양이 맨 위에 있어 상구다. 그치는 괘, 중산간에서 상구는 맨 위에 있어 더 이상 그칠 데가 없다. 그침의 끝판왕인 것이다. 그러니 상구는 돈독하게 잘 그친 자리여서 길하다.
중산간 괘의 그침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그쳐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쳐 있어야 할 때 그치고,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되, 항상 자기의 욕망이 그쳐야 할 마땅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알아차린 마이어스는 기차가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을 때 칸막이 객실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될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차창 밖을 내다봤다. 마이어스는 아들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정류장 바깥 어딘가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마이어스는 아들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차가 출발하고 잠시 정차한 사이 자신이 타고 있던 칸막이 객실이 분리되어 교체되었다. 마이어스는 이를 모른 채 칸막이 객실 밖으로 나갔다가 허겁지겁 원래 자기가 탔던 객차로 돌아갔지만 이미 다른 객차와 연결된 뒤였다. 마이어스는 그게 잘못된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욕망이 비록 잘못된 것이라도 자기 욕망을 속여 가며 행동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이어스는 드디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움직이는 기차의 일부가 된 듯 자기 몸을 맡기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멈췄다가 다시 가면 된다.
「칸막이 객실」에서 마이어스는 자신의 욕망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깨닫는다. ‘자기 욕망의 직시’, 이것이야말로 욕망의 그침이고, 그침의 괘 중산간이 함유하고 있는 본래 뜻이리라. 여기에 더해 카버의 건조한 문장은 중산간 괘가 보여주는 ‘그침의 미학’을 끝까지 놓지 않게 만든다.
글_이영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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