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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방제와 병법

'특별하지 않은 것'의 효과, 자감초탕

by 북드라망 2015. 8. 5.


막다른 골목을 향하여

– 감초의 전변, 자감초탕 -





임자, 일할 생각 없나?

- 나쓰메 소세키, 『갱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5쪽


나쓰메 소세키 소설 『갱부』의 주인공인 ‘나’에게 찻집 주인이 말을 건넸다. 구리 광산의 광부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다. ‘나’는 도쿄를 떠나 ‘게곤(華嚴) 폭포’로 가는 중이었다. 게곤 폭포는 닛코 산속에 있는 웅장한 폭포다. 이 폭포에서 소세키의 제자 후지무라 미사오가 자살했다. 장정일에 의하면 이 작품은 “게곤 폭포에서 자살한 소세키의 제일고등학교 제자 후지무라 미사오의 번뇌에 대한 석명”이다. 즉 젊은 제자의 고뇌에 대한 소세키 식의 답변이라는 것. 이 고통스러운 삶의 여행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혹은 이 세상에서 더 살아 있어야 할 가치가 있는가. 미사오 혹은 예비 미사오들이 던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소세키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찻집 주인의 제안은 그 답변을 여는 촉매가 된다.



소세키의 『갱부』는 '게곤 폭포에서 자살한 제일고등학교 제자 후지무라 미사오의 번뇌에 대한 석명'이다.


찻집 주인은 소개료를 받고 인부를 알선해주는 일종의 ‘인력브로커’다. ‘나’는 게곤 폭포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따라 나선다. 광산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광부후보가 합류하기도 했고 산속 지인의 집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보내기도 했다. 거칠게 살아왔던 그들에게는 이 여정이 일상적이겠지만 도쿄 고위직 집안의 도련님 출신인 ‘나’에게는 거의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힘들고 처절한 과정이었다. 소세키는 죽음을 향해가는 제자 혹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또 다른 자신에게 그런 고통의 길을 제시한다. 잘 설득하고 위로해서 도쿄로 돌려보내지 않고 이렇게 혹독한 길로 인도하는 이유 무엇일까.


도쿄는 편안하고 호화로운 곳이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도쿄 생활은 습관처럼 다시 게곤 폭포로 가는 길을 욕망하게 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 죽음 충동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길이 열려야 한다. 소세키는 죽음으로 향하는 제자를 향해 ‘일할 생각이 있는냐’는 미끼를 던진다. 죽음 앞에서의 제안은, 그것이 임시방편일지라도, 때때로 운명적인 결정을 낳기도 한다. 도쿄로 돌아가라는 설득은 다시 게곤 폭포로 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 제안은 잘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광산으로 향하는 길은 운명의 샛길이다.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할 때 불현 듯 나타나는 샛길. 이런 길은 다시 여행을 지속하게 하는 욕망을 일으킨다. 소세키가 가르쳐준 이 샛길은 비록 위험하고 힘겹지만 도쿄와 게곤 폭포로 연결되는 번뇌의 고리를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해법이 된다. 광산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여정이 이 소설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그런데 소세키의 제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소설의 나머지 반은 막장을 체험하는 얘기로 이루어져 있다. 막장은 극한의 삶을 상징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고난의 끄트머리. 그 곳에 이르는 것은 미사오에게 혹은 미사오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자신에게 혹독한 삶의 바닥을 보여주고 싶은 소세키의 열망이기도 하다. 샛길의 고통은 시작일 뿐이다. 소세키는 고행의 샛길을 광산의 갱도(坑道. 굿길)로 이어놓았다. 갱도에서의 고통은 샛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 고통”(같은 책, 236쪽)스럽다가 막장 끝에 이르러서는 점점 의식을 잃어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죽음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결국 샛길의 끝도 게곤 폭포와 별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막장에서의 혹독한 체험은 죽음의 의례일 뿐 실제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막장은 죽음의 의례를 통해 다시 삶으로 전변되는 터닝 포인트다.


의식을 숫자로 나타내면 평소 10이었던 것이 지금은 5가 되어 멈춰 있었다. 잠시 후에는 4가 되었다. 3이 되었다. 그대로 가면 언젠가 한 번은 0이 되고 만다. (...) 그런데 점점 내려가 드디어 0에 가까워졌을 때 돌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바로 이어서 죽으면 큰일이다 하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눈을 딱 떴다.

같은 책, 259쪽



막장에 이르러 '죽으면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의식을 잃어가는 삶의 막장 끝에서 ‘나’는 ‘눈을 딱 떴다.’ 죽음의 의례가 ‘삶으로의 전변’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행사하는 순간이다. 막장은 이런 전변이 가능한 곳이다. 주인공이 의식이 불명료해지면서도 “공상으로 그린 갱부 생활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천국이었다.”(258쪽)고 고백할 수 있던 것도 막장이 죽음의 방향을 돌려 삶의 영역으로 전변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소세키가 주인공을 게곤 폭포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갱도를 따라 막장으로 안내한 것은 바로 이런 전변의 가능성을 염두 해 둔 것이다. 그 여로는 소세키가 삶을 버리려는 또 다른 후지무라 미사오들에게 앞장서 안내하고 싶은 새로운 운명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때때로 장수는 아끼는 병사들을 그런 길로 안내한다. 전투를 하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꼭 싸워야 한다면 전쟁을 오래 끌지 않아야 한다. 속전속결. 싸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적진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 단기간에 아군의 희생이 많이 따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러 설 곳 없는 적진의 요지에서 살아남으려면 병사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며 그만큼 병사들의 전투력은 최대치가 될 것이다. 막장에서 생에 대한 눈이 딱 떠진 것처럼 전장의 궁지에서는 최대의 전력이 생산된다. 적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우왕좌왕 할 것이며 전력이 크게 손실될 것이다. 만일 속전속결로 적장을 죽이고 적군을 흩어버린다면 아군의 손실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물러설 곳 없는 궁지로 던져 넣으면, 병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달아나지 않는다. 이기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게 되니, 지휘관과 병사가 한마음이 된다. 병사들은 빠져나갈 길이 없을수록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고, 달아날 길이 없을수록 오히려 굳세지며, 적진에 깊숙이 침투할수록 오히려 결집되니, 부득이하면 더욱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다.

- 손무, 『낭송 손자병법/오자병법』, 손영달 풀어 읽음, 북드라망, 84~85쪽



스파르타~!



‘자감초탕(炙甘草湯)’의 전략도 이와 비슷하다. 자감초탕의 전략은 감초를 막장으로 던져 놓는 것이다. 그러면 감초는 자기에서 숨겨진 최대의 생명력을 이끌어내서 병을 치료한다. 자감초탕의 군약(君藥)은 자감초, 즉 구운 감초다. 약방의 감초란 말이 있듯이 감초는 많은 방제에 자주 쓰이는 약재다. 하지만 그 역할은 주요 약물들에 비해서 미미하다. 물론 약들을 조화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인 것은 틀림없으나 병을 결정적으로 치유하는 효능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감초탕에서는 다르다. 자감초탕은 감초를 전면에 내세운다. 맛이 달고 평탄한 기운을 가진 감초. 자감초탕은 이렇게 약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감초를 보스로 하여 전략을 구성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감초탕의 주된 효능은 심장의 기가 허해서 생긴 결맥(結脈)과 대맥(代脈)을 치료하는 것이다. 자감초탕의 별칭이 맥을 돌아오게 한다는 뜻의 ‘복맥탕(復脈湯)’인 것도 이와 통한다. 결맥과 대맥은 “모두 간헐기가 있는 맥이며, 맥박의 정지현상이 나타나는 맥”(왕멘즈, 『왕멘즈 방제학 강의』, 오현정 옮김, 349쪽)으로 “현대의 부정맥에 속하는 맥이라고 볼 수 있다.”(이주호, 정기훈, 『빈호맥학 안(瀕湖脈學 按)』, 210쪽) 특히 “대맥이 나타나는 것은 장부, 즉 오장의 기가 매우 쇠약한 상태를 의미한다. 상황이 위중한 것이다.”(왕멘즈, 349쪽) 맥은 심장에 속한다. 맥의 상황이 위중하다는 것은 심장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뜻이다. 심장은 군주의 장부로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장부다. 심장을 보하는 좋은 약들은 많다. 그 약들을 제치고 감초가 이 위중한 상황에 가장 전진 배치한 것은 “약성이 완만해서 모든 위급한 증상을 해소”(장원소, 『의학계원』)하기 때문이다. 위중하면 강한 약을 써야 할 것 같지만 심장의 경우는 “강력한 작용을 하는 약물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더욱 주의해야 한다.”(왕멘즈, 350쪽) 감초의 완만한 성질은 급해지는 속도를 조절한다. 심장에 기혈이 부족하면 “심장이 심박동 수를 늘려서 혈액을 빨리 보내줘야겠다고 하는 급박한 상황”(노영범, 『임상방제학강좌』, 대성의학사, 164쪽)이 초래된다. 이때 먼저 다스려야 할 중요한 일은 혈액의 공급이 아니라 심장의 안정이다. 결맥과 대맥은 “대부분 정혈(精血)이 쇠약한 구병(久病)자나 허약자” 그리고 “몸의 중심력이 부족하고 심장기능이 쇠약한 사람”(오당, 『상한론소』, 의성당, 216쪽)에게 나타난다. 심장이 허약하기 때문에 혈액이 부족해진 상황에 심장은 더욱 당황하고 동요하게 된다. 심장의 박동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박동의 안정성이다. 감초가 심장에 들어가면 급해진 심장을 달래서 안정시킨다. 특정한 약효를 가지고 심장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장 자체의 속도를 조절하여 심장의 급박함을 완화하는 것이다. 감초는 ‘조화’와 ‘완화’라는 무던한 약성을 가지고 많은 방제에 조연 내지 엑스트라로 활동해 왔다. 그러나 감초가 주연이 되는 순간 그 무던한 약성은 가장 위중한 상황에서 생명을 살리는 역할로 전변된다. 연약한 도쿄의 도련님이었던 『갱부』의 주인공이 살기 위해 죽음의 막장에서 ‘눈을 딱 떴’듯이 말이다.


자감초탕은 감초 외에 생지황, 인삼, 아교, 맥문동, 마인, 대조, 생강, 계지로 구성된다. 생지황과 맥문동은 자음보혈(滋陰補血)하는 약이다. 결대맥은 심장에 기혈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니 진액을 생성하고 혈을 만드는 것은 심박동을 안정시키는 치료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인삼은 감초의 보심(補心) 작용을 돕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약이다. 다른 방제에서는 인삼이 군약이고 감초가 보조이지만 자감초탕에서는 그 역할이 바뀌었다. 대조(대추)와 생강은 비장(脾臟)의 기운을 살리고, 계지는 심장의 양기(陽氣)를 돕는다.




자감초탕에서는 감초가 군약이다.



살다보면 사방이 막혀 한 걸음도 못나갈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때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쿄와 게곤 폭포, 그 사이에서 샛길을 만난다면 다른 생명의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목표로 하는 죽음은 반드시 멀리 있어야만 한다는 것”(갱부, 22쪽)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심리적 거리이건 공간적 거리이건, 죽음의 장소가 가까우면 안 된다. 도쿄에서 좀 떨어진, “가도 가도 소나무뿐”(갱부, 15쪽)인 솔밭 같은 길도 지나서 수고롭게 가야 한다. 그래야 샛길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모든 일을 내려놓고 긴 여행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 긴 여행의 끝에 도달한 곳이 게곤 폭포라면 어쩔 수 없지만, 대개는 그 과정에서 샛길을 만나게 되어 있다. 샛길을 만나거든 일단 그 길을 따라 가길 권한다. 그런 길은 대체로 거칠고 험한 산길이거나 지금까지 가 보지 않은 낯설고 좁은 골목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갱도의 막장 혹은 막다른 골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장소는 죽음의 의례를 통과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운명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고행으로 표상되는 그 샛길과 막다른 골목은 실제로 육체적 고행일수도 있지만 대개 기존의 삶의 방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변화란 좋고 싫음을 나누었던 수많은 이분법적 경계들을 허무는 것이다. 운명의 전환이 바로 그런 것이다. 추하고 아름다움의 이원적 경계를 허무는 것.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그것은 죽음의 의례를 막 통과한 자에게 수여되는 운명의 전환이라는 상이다. 그 효과는 평온함으로 드러난다. 자감초탕의 효과도 그렇다. 자감초탕의 효과가 잘 발휘된다는 것은 결대맥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결대맥이 사라지면 맥은 어떤 상태가 되는가? 평온하고 일정한 리듬의 심박동으로 돌아온다. 심박동이 강력하게 뛰는 것이 아니라 평온하고 안정적이 되는 것. 그것이 자감초탕의 치료다. 『갱부』의 주인공이 막장에서 살아나온 후 갖게 된 마음도 그런 평온함이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세상의 수많은 이분법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 힘에서 그런 평온함이 나온다.


문득 오는 길에 눈에 띄었던 민들레를 만났다. 조금 전에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별것 아니었다. 이것이 왜 아름다웠을까 하고 잠시 서서 보고 있었는데, 역시 아름답지 않다. (...) 갱부가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불쾌했던 얼굴이 마치 흙으로 빚은 인형의 머리처럼 보였다. 추하지도 무섭지도 밉지도 않았다. 일본 제일의 미인 얼굴이 그저 평범한 얼굴이듯이 갱부의 얼굴도 그저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런 나도 뼈와 살이 이루어져 있을 뿐인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 의미고 뭐고 없었다.

갱부』, 312쪽


갱부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현암사
낭송 손자병법 / 오자병법 - 10점
고미숙 기획, 손무.오기 지음, 손영달 옮김/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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