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구속된 인간의 해방
김희진(감이당)
죽음보다 괴로운 공포
나그네는 맹수를 피해 물이 없는 우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우물 밑바닥에서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불행한 나그네는 미쳐 날뛰는 맹수에게 잡아먹힐까 봐 감히 밖으로 기어 나오지도 못하고, 용한테 잡아먹힐까 봐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우물 틈새에서 자라는 야생 관목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다. 두 팔의 힘이 약해진 그는 양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곧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매달려 있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다가 검은쥐와 흰쥐 두 마리가 관목 줄기 주변을 일정하게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관목은 저절로 부러져 떨어질 테고, 그는 결국 용의 입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나그네는 이를 보면서 자기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동안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관목 잎사귀 위에서 몇 방울의 꿀을 발견하고 혀를 내밀어 핥는다. (『고백』, 레프 톨스토이, 바다출판사, 33쪽)
이 글은 톨스토이가 동양의 우화라며 『고백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불가의 안수정등(岸樹井藤)이야기다. 어떻게 해도 죽을 운명인 인간이 꼼짝없이 동아줄에 매달려 있는데, 가만히 있어도 힘빠져 죽을 판에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흰쥐와 검은쥐가 동앗줄을 갉아먹는다. 째깍째깍... 죽음이 임박한 가련한 인간의 처지여! 인간이라면 누구도 이 처지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몇 방울의 꿀을 핥아먹으려 기를 쓰고, 또 꿀의 달콤함에 행복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톨스토이에게 달콤했던 꿀은 그가 인생에서 그야말로 ‘할 만한 일이라고 확신’했던 예술이었다. 그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동안은 시와 예술에 나타난 삶의 반영이 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이상 꿀이 달콤하지 않았다. 그가 『고백록』을 쓰기 5년 전 즈음부터 그에게 찾아온 의혹의 순간들 때문이었다. 그는 문득문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뭘 해야 할지,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정지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여태까지 해왔던 일들이 모조리 하찮게 느껴지고 다 허위의 연극처럼 느껴졌다. 삶의 정지의 순간은 점점 더 빈번하게 찾아왔고, 그는 항상 똑같은 의문 앞에 서게 되었다. ‘왜?’, 그리고 ‘그래서 그 다음엔?’이라는 의문이다. 그가 생각해낸 답은 삶에는 이유도 없고, 계속 살아봐야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인생의 진면목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그건 바로 죽음, ‘안수정등’ 속 인간의 운명인 죽음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톨스토이에게 더 큰 문제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공포였다. 삶이 괴물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죽음을 기다리는 거라면 그냥 이 줄을 놓으면 되지 않을까? 꿀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하루라도 빨리 용의 아가리에 떨어지면 고통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그는 공포가 너무 극심해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흰 쥐와 검은쥐가 밧줄을 갉아먹는다는 설정이 그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공포는 고통이었고 그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러한 죽음충동을 이겨내고 싶기도 했다. 아직 죽음에 대해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있는데 공포에 굴복해서 자살하고 만다면 영영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밧줄을 안 보이게 치워두기도 했고, 사냥용 총도 들고다니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 때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은 충동’보다 더 컸던 ‘알고 싶은 욕망’이 그를 계속 살게 했다. 이 죽음의 공포는 그의 인생을 크게 분절하는 ‘회심(回心)’사건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단순한 러시아의 소설가가 아니라, 마음의 혁명가가 되는 대전환의 시작이다.

정상_허무에 먹힐 것인가
그가 죽음에 관해 이러한 공포를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언젠가 그가 여행 중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새벽 두 시였습니다. 나는 너무도 피곤해서 잠이 들고 싶었는데 느낌은 퍽 좋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절망감, 두려움,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느낌에 대해 당신에게 자세히 말해줄 생각입니다. 이전에 나는 그처럼 고통스러운 느낌을 겪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톨스토이』, 앤드류 노먼 윌슨, 책세상, 356쪽)
당시는 41세였던 톨스토이가 길었던 『전쟁과 평화』의 연재를 끝내고 단행본 출간을 막 마쳤던 때로, 거액의 돈과 세계적인 작가의 명성을 얻게 된 직후였다. 평소 유목민들의 삶을 동경하던 그는 펜자 지방의 영지를 구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500킬로는 족히 되는 거리를 역마차를 갈아타며 가다가 아르자마스라는 곳의 여관에서 하룻밤 쉬어가던 날, 너무 지쳤던 탓일까, 그는 문득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물리적으론 아무 일도 일도 일어나지 않은 15분간 이었지만, 그가 느꼈던 공포는 이후 그의 심리적인 방황의 원인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중력에 이끌리듯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는 동시에 마치 그것을 떨쳐내려는 듯 산만하게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희곡 쓰기, 자전거 배우기, 그리스어 배우기, 농민학교 재개, 러시아어 문법교재 만들기 등등. 마치 자기를 끌어당기는 무거운 의문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전쟁과 평화』의 다음 작품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나 작품활동을 못 하고 다른 바쁜 일들로 동분서주 하던 와중에 옆 마을 지주의 정부(情婦)였던 ‘안나’라는 여인의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부검 참관을 신청해서 기차에 짓이겨진 그녀의 시체를 직접 보고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안나’라는 이름의 상류층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안나의 주제는 욕망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사는 기쁨과 삶의 의미에 대해 천착한다. 거기에는 사랑, 가족, 음식, 일, 명예, 돈, 병, 죽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희노애락이 총망라되었다.
당시 <러시아 통보>에 연재되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그의 대작가로서의 명망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하지만, 안나를 쓰던 약 4년의 기간동안 그는 몇 번이나 집필을 쉬면서 작품 쓰기를 힘들어했다. 당시 그는 지인들에게 작품을 중단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고, 계속 쓰기가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야기가 진부하고 저급하기 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 투덜거렸지만, 『안나 카레니나』를 직접 읽고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는 곳곳에 죽음의 망령이 드리워져 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 소설이 그를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 더욱 끌고갔던 것 같다. 그 때 그가 겪었던 고민과 방황은 작품 속 ‘레빈’이라는 캐릭터 속에 그대로 녹아 있는데, 소설 막바지에서 문득 삶의 의문에 빠져들면서 자신이 자살을 할 까봐 총과 밧줄을 치우는 레빈은 바로 톨스토이 자신이다.
소설 후반부에서 레빈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장면은 갑자기 톨스토이가 소설로 뛰어든 것처럼 급작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던 노총각 레빈은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고 농민들과의 신뢰도 점점 쌓여가고 농사일도 잘 되던 때가 아닌가? 그렇다. 바로 이런 때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불청객처럼 문득 찾아오는 것이 삶의 의혹이다. ‘이것이 행복인가’라며 자신을 만족스럽게 돌아볼 때, 불현듯 ‘이게 다인가?’라는 의혹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죽음의 두려움을 느낀 순간도 역시 그가 정상에 올랐을 때, 즉 안정적인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을 때였다.
그때 주요 관심사였던 농지 경영에 대한 생각들 중 갑자기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 좋다. 너는 사라마현에서 6천 데샤티나의 땅과 3백마리의 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나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져서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 때론 내 작품들이 나에게 가져다줄 명예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그래, 좋아. 너는 고골, 푸시킨,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등 세계의 모든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질거야. 그래서 어쩔건데!’ 그리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고백』, 레프 톨스토이, 바다 출판사, 28쪽)
‘그다음’이 없을 때, 비로소 자기의 성취가 일시적인 눈속임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찬사를 받기 전엔 찬사가 인생의 목표가 되지만,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나니 자기가 바라고 달려온 찬사가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된다. 결혼 후 자신의 작품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자 이 경제적 안정감이 삶의 의미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내가 완전한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온통 둘러싸여 있던 때”였다고 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것을 다 가졌는데도, 자신의 삶에 어떤 충족도 없다니, 그는 무엇을 바라 여기까지 살아온 것일까? 그가 이전에 가졌던 욕망이 모두 물거품처럼 꺼져버렸다. 그리고 어떤 ‘꿀’도 달콤하지 않은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의 종말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긴 시간뿐인 것이다. 꿀과 괴물 사이에 갇힌 삶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땅_다르게 살 것인가
톨스토이가 허무와 공포의 깊은 늪을 벗어나는 과정은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안나를 쓰던 당시에 그는 평생 쓰던 일기도 안 쓰고 작품에다가 자신의 일상과 고민을 모두 담아놓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레빈이 표도르라는 농민과 일을 하다가 매물로 나온 땅에 관해 잡담을 나눌 때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두 농민의 품성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된다. 표도르가 평가하길, 키릴로프는 오로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기 때문에 그 땅을 탐낼 것이고, 포카느이치씨는 소작인들의 사정을 봐주기 때문에 부담되는 대여료를 지불해야 하는 땅을 탐내지 않을 거라고 했다. 레빈은 이런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어째서 그 치는 너그럽게 봐주는 거지?”라고 물었다.
“포카느이치는 성실한 늙은이입죠.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길래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서 사는 거야?” 레빈은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뻔하잖아요. 진리에 의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뿐예요.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이를테면 나리만 하더라도 사람을 모욕하는 짓은 하지 않으시니까 말예요......”
(『안나 카레니나』3, 레프 톨스토이, 문학동네, 479쪽)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듣고 레빈의 머리속에선 눈부신 광채가 소용돌이쳤다. 이웃에게 측은지심을 발휘하는 사람을 보고 그들은 그것을 ‘진리에 의해서’산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하느님에 의해서’ 사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건 누가 지식으로 가르쳐 주는게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며 그런 현실에 의문을 품거나 불만을 갖지 않는다. 오직 자기 안에 하느님이 살아있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농민들의 하루가 성실한 노동과 신실한 기도로 굴러가는 것은 외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그들의 생활일 뿐이었지만, 그들의 가치관을 접하자 톨스토이는 농민들의 세계와 자기가 속한 세계가 완전히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왜 걱정하지 않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 왜 불평하지 않지? 톨스토이는 농민과 귀족간의 생활의 괴리에서 그 답을 구한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의혹 모두 그가 속한 계층의 산물이라는 답이다. 그는 모든 것이 허무하며 자기 앞엔 이제 죽음 뿐이라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이 상황 자체도 그가 여태껏 영위해온 귀족으로서의 생활과 관념적 사유의 결과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톨스토이의 회심사건의 중심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백』은 1880년, 그의 나이 52세에 쓰인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살아온 모든 행위와 생각 그리고 그가 속한 귀족계층의 문화를 통렬히 반성하는 글이다. ‘나는 왜 삶의 허무에 시달리며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가?’ 그는 깨달았다. 너무 많이 배운데다가 한가해서 그렇다. 톨스토이는 자기처럼 많이 공부한 사람은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상류층의 세계에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온갖 사변적 논리를 펴지만 정작 자신이 무시하는 수많은 존재에게 전적으로 생활을 의존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도대체 나의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백 번, 천 번 자문해봐야 ‘나의 삶은 악이자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대답을 얻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자기의 삶에만 관련이 있는 어리석은 문답의 도돌임표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 빠져나와서 민중의 삶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활을 바꾸지 않고서는 생각을 바꿀 수 없다. 농민은 하루종일 노동을 하고, 항상 기도 한다. 그들은 대개 미신을 믿었다. 톨스토이는 미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미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화된 정교회의 협소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분리되어 나온 다양한 분리파 기독교(구교도)를 이른다. 누군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독교는 사랑, 용서, 동정, 희생, 양심, 인심 등등의 인간적인 마음의 나눔이었고, 민중들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그들의 삶과 일치된다.
민중들은 어떤 의혹이나 반항도 없이 이 모든 것이 이럴 수밖에 없고, 달리 될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선이라고 편안한 마음으로 확신하면서 질병과 슬픔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영리하면 할수록 삶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악의적 냉소를 보는 것과는 정반대로, 민중들은 삶의 고통 속에서도 평온함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고백』, 레프 톨스토이, 바다출판사, 83쪽)
삶의 모든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삶을 대하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죽음조차도 그들에겐 그저 삶의 일부이고 신의 뜻일 뿐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앙에는 특별한 교리가 없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 한 마디로 모든 삶의 과정이 섭리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 소개한 ‘안수정등’의 괴로운 상태는 허구의 이미지였다. 죽음을 악으로 규정했을 때 성립되는 관념의 괴로움이다. 나처럼 소중하고 잘나고 행복한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 되는 포카느이치씨의 삶에는 ‘자기’가 없으므로 죽음의 공포도 없다. 톨스토이는 삶이 죽음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공포에 매여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공포는 신체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앎만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원리를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 원하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180도 바꾸어 귀족적인 사치와 지적 허영을 버린다. 삶의 반영이라고 믿었던 예술도 버린다.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수공예품도 만든다. 저작권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쓴다. 그렇게 톨스토이는 나이 50에 전혀 다른 인생 후반부를 시작한다. 삶의 허무와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다르게 살기를 택한 것이다.
탄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_생명
『고백』을 쓴지 7년이 지난 1887년, 59세에 이른 톨스토이는 『인생에 대하여』에서 좀 더 차분하게 죽음과 공포에 대해 다룬다. 재미있게도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남 얘기하듯 ‘그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41세 때의 아르자마스에서부터 오랜 시간 죽음의 공포와 자살충동에 시달렸던 자신의 이야기다. ‘그들’은 ‘마치 정신병자가 환영을 보고 무서워하듯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그로 인해 그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던 것일까? 그는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농민들과 어울리고 직접 농사일도 했지만, 지적인 탐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음’이란 실체가 없는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인생에 대하여』에서 그것을 자신만의 사상으로 펼쳐낸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존재의 소멸, 즉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소멸한다는 것일까? 우리의 육체? 톨스토이는 말한다. 우리 육체가 이 세상에 태어나며 시작된 거라면 죽음은 그 육체의 소멸이 맞다고. 하지만 육체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던 물질의 생리·화학적 변화가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 계속 변하고 있으며, 죽음도 그 변화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육체 말고 ‘나’ ‘레프 톨스토이’와 같은 자기라는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일까? 톨스토이는 여기서 ‘나’ 또는 ‘그’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것을 항상된 존재로 느끼는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허구라고 한다. 기억과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된 상태일 뿐 항상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잠을 잘 때는 자기를 의식하는 의식마저도 죽음과 비슷하게 장시간 단절된다는 것이다. 의식이 없는 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으로 의식이 단절되는 것도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며, 태어남과 죽음이 생명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알다시피 누구든 20년 전의 그가 아니며, 매일 또 다른 ‘내’가 되고 있지 않은가. 가여울 일이 무엇인가?(...) 당신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않고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출발했던 장소도 역시 알지 못하면서 여기로 왔지 않은가. 당신은 입구로 들어와서는 출구로 나가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바다출판사, 213쪽)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겪는 일이다. 그들은 생명을 모르면서 생명이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공포스럽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정말 ‘두려운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다’ 육체의 존속이 생명이고, 의식의 항상성이 생명이라는 잘못된 생명관으로는 육체와 의식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삶’ 자체를 견딜 수 없는 없는 것이다. ‘안수정등’에서 나무덩굴에 매달린 사람처럼, 사는 것이 공포 그 자체가 된다. 한편으로 이 공포는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진실한 생명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톨스토이가 이 공포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듯 말이다.
그렇다면 톨스토이가 말하는 생명은 무엇일까? 생명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변화 운동이다. 연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있어 생명은 ‘세계에 대한 태도’이며 또 ‘세계와 관계맺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을 좋아함과 싫어함이라고 설명하는데,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외부와의 관계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변화하는 이 태도, 즉 살아간다는 건 세계와 점점 더 다양하게 더 넓게 연결되는 과정이다. 이 연결이 바로 톨스토이가 강조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생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며, ‘불사’의 ‘운동’이다. 톨스토이는 예수님을 예로 들면서, 아무도 예수를 돌아가신 그분의 육체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연결된 사랑의 힘으로 그의 존재를 느낀다고 한다. 예수와 같은 성인뿐 아니라, 그는 먼저 죽은 형도 형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사랑의 힘으로 여전히 그에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생명은 육체와 함께 소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은 후에 생명이 어떤 형태로 어디에 존재하느냐를 추측할 필요는 없다. 그저 마음 속에서 그 존재를 느끼는 대로 그 존재함을 알 뿐이다.
생명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찾고 있다면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것에 만족하고, 불분명하고 근거도 없는 추측들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것을 망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다음으로 충분하다. 즉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그 모든 것이 내 이전에 살았던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생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생명의 법칙을 실행하고, 동물적 개체성을 이성에 복종시키며 사랑의 힘을 발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육체적 생존의 소멸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 그것으로 나는 죽음에 대한 어리석고 두려운 미신 따위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생에 대하여』, 206쪽)
와! 인간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큼 큰 자유가 있을까? 톨스토이는 진실한 앎이란 자신의 내면에서의 일어나는 의식, 또는 그것을 느끼는 경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사람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지만,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의식하는 아주 주관적인 경험으로밖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물리적이고 수학적인 증명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보이는 세계에서 진실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삶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비물질적이고 비수학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짜르로부터 받았던 압수수색이나 감시의 탄압은 그를 두렵게 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했지만, 이유도 없이 불현듯 찾아들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방종했던 삶에서 생명 원칙에 복종하는 삶으로, 그리고 죽음에 매여있던 삶에서 죽음에서 벗어나는 삶으로 말이다. 생명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복종이 해방이 되는 아이러니다.

그는 『고백』에서 자신의 인생이 오만방자한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심하게 자책했다. 심지어 자신을 기생충, 악, 미치광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자조와 자책은 자기비하의 우울증으로 빠질 가능성도 있기에 조금 위험해보였다. 이 정도면 평범하다고 생각한 내 삶을 비판하는 것 같아 너무 찔려서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강하게 자기비판의 고백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다시 그릇된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한 철저함이 아니었을까. ‘변화하는 생명’의 섭리에 맞게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 시키려는 담금질이 아니었을까.
동화의 고전인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호랑애벌레는 애벌레 탑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애벌레는 내려오면서 다른 애벌레들에게 위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지만, 기를 쓰고 올라가려는 애벌레들은 믿지 않거나 “설령 그게 사실이더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우리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역시 톨스토이가 성취의 꼭대기에서 느끼고 알게 된 것을 그의 입을 통해 듣는다. 죽음은 없고, 그저 변하고 있을 뿐이라고. 우리 모두가 다르게 살 수 있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