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자본론』 리뷰 _ ‘대칭성 사회’의 일원이 될 결심
성민호(고전비평 공간 규문)
“포르도는 끝장났다.” 지난 달, 이란의 지하 핵시설을 완전히 파괴한 후 트럼프는 선언했다. 하메네이는 은둔했고 사실상 항복했다는 뉴스가 퍼졌다. 중동 최강국이자 이슬람 세계의 기둥인 이란이 무력하게 무너졌다. 서구적 ‘국제질서’가 다시 승리를 거뒀다.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 한편, 일종의 망연함이 가슴에 남았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조된 전운이 해소되고, ‘무법적’ 핵개발이 억제되고, 어쨌든 다시 ‘평화’가 도래했는데 왜 나는 이리도 울적한 걸까?
우선적인 이유는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한 개인적 친밀감 때문일 것이다. 7년 전 나는 규문의 친구들과 한 달 간 이란을 여행했다. ‘소-생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우리는 이슬람의 역사와 교리, 독특한 경제 및 문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란 땅을 거닐면서 그 신비하고 풍요로운 삶의 모습을 생생히 확인했다. 그들이 보여준 미소, 눈빛, 환대, 그리고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든 ‘영성’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 울적함은 단지 이런 체험의 애틋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지만은 않다. 그랬다면 올여름 중동에서의 전쟁이 격화되지 않았음에 안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보전된 ‘평화’와 ‘질서’가 매우 우려스럽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대안적/대항적 세계가 무너져버린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세계의 오랜 ‘바깥’이었던 이슬람 문화권과 거기서 영위되어 온 독특한 ‘삶의 지향’ 혹은 ‘가치의 지평’이 이렇게 스러지는 걸까? 포르도는 끝장났다. 군사시설의 무력화를 알리는 이 선언은 하나의 선고처럼 들렸다. 이슬람적 우주론-기술론(코스모테크닉스)은 끝장났고, 이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서구적-기독교적-자본주의적 질서뿐이라는 선고. 이 서늘한 상념이 나를 말할 수 없이 울적하게 했다. 이와 같은 ‘압도적 비대칭’에서는 언제나 ‘테러’라는 공멸共滅의 몸짓이 그치지 않고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 울적함의 근저에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녹색 자본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내게 이슬람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넘어서게 해 주었고, 그 문화에 친밀감뿐 아니라 심지어 고마움까지 품게 해 주었다. 신이치가 말하듯 이슬람 문화가 내재한 엄밀한 ‘일신교적 사고’는 하나의 거울로 작동하는데, 그 거울은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세계의 심층에 흐르는 사고 양식을 선명하게 비춰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서구적-그리스도교적’ 우주론을 가로지르는 맹렬한 증식의 열망을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안에 새싹처럼 자리 잡은 회의감을 더 밀어붙여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7년 전 역자 혜원이 번역한 이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던 시기, 나는 여전히 대학생 신분이었고 대체 ‘대학’이라는 것이 이 세계에서 어떤 의미인지, 왜 구불구불한 공식들을 외우고 시험을 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답은 뻔하게도 높은 연봉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함이었고, 그 최종 목표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서 안정된 삶을 꾸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 사회에서 당연하게 통하는 ‘인간의 도리’였다. 나는 그 도리의 중요한 관문인 대학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녹색 자본론』의 문장들은 ‘인간의 다른 도리’가 존재한다고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돈벌이와 재산 증식으로 점철된 인생이 아닌 삶, 소유와 과식이 판치는 부유함과는 다른 풍요의 길이 가능하다고.
솔직히 나는 그때 이슬람의 핵심 교리인 ‘타우히드’ 존재론이나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이치의 글을 따라갈수록 내가 살아가는 세계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증식의 열망은 점점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축적하고 소비하고 다시 축적하는 팽창의 사이클이 보였다. 불어나는 이자를 원자(atom)로 삼아 자본주의는 지구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이질적 코스모테크닉스도 허락하지 않는 ‘압도적 비대칭’의 세계였다. 안전하다고 하지만 자살과 정신병이 만연하고, 풍요롭다고 하지만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기후마저 끊임없이 테러를 일으키는 ‘인류세’의 아수라장. 이 시대에서 그저 태어나서 자랐을 뿐인 나와 같은 젊은이들은 여전히 축적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운다. 주식 투자와 부동산 투기로 보다 안정적으로 풍요를 거머쥐는 기술을 익힌다. 심지어 정부가 나서서 금융자본 즉 제약 없는 화폐의 마술 놀이로 나라 살림을 꾸리겠다고 선언한다. 내가 발 딛고 선 판이 이런 모양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이 사이클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안전과 풍요를 제공하는 관문에서 떠나고 싶었다. “원리에 있어서 이슬람은, 이윤을 낳는 풍요로운 사회를 거부하면서까지 의미로 가득 찬 세계를 선택”했다는 말에 깊이 끌렸다. 나도 이 자리에서 그런 세계를 살아가고 싶었다. “자본의 눈으로 본다면 더디고 가난한 사회로 비칠지 모르지만, 인간이 의미로 사는 생물인 한 더욱 풍요로운 세계”(129쪽)를 말이다.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풍요로운 ‘대칭성 사회’의 일원이 되기로.
나와 나의 세계를 비춰볼 ‘거울’이 되어주고, 그로 인해 내 생각과 욕망의 경로를 이탈시키는 ‘장애물’이 되어준 텍스트가 바로 『녹색 자본론』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게 되었다. 늦었지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텍스트와 세미나의 방식으로 받아온 이러한 증여를 어떻게든 되돌려주고 싶다. 이 또한 대칭성 회복을 위한 작은 시도일 수 있으므로. 그러나 나의 대체 증여는 어떤 방식일 수 있을까? 특히 이슬람이라는 ‘反자본주의적’ 사고 체계 위에 구축된 문화권마저 서구적 코스모테크닉스에 무너져버린 압도적 비대칭의 시대에, 나와 우리의 공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나카자와 신이치로부터 그 힌트를 얻어보기로 하자.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응답response’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치의 사유가 전개되는 방식 혹은 (그의 표현대로) 사유가 그의 글쓰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매우 용감하고 또 날렵하다. 그가 글을 쓰는 시기는 9·11 직후다. 이슬람에 대한 국제적 분노가 맹렬하게 타오르고, 그 비극 앞에 분노하지 않으면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던 시기 말이다. 선악이 지나칠 정도로 명백한 테러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메시지’를 읽는다. 이런 읽기는 사실상 곡예에 가깝다. 왜냐하면 일종의 자폭 혹은 공멸인 테러는 메신저의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발신자가 소멸된 메시지는 지속성을 잃고 소통은 실패한다. 하지만 여기서 능동적으로 듣는 이는 일종의 반전reverse을 경험한다. 즉 메신저의 죽음으로 인해 메시지는 완전해진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보기에, 테러는 이 세계 전체를 메시지로 만드는 메신저다. 테러는 지금 영위되고 있는 질서, 옳음, 안전, 행복 등 우리에게 인지조차 되지 않는 노멀과 기본값을 모두 의문부호 위에 올려놓는다. 왜 저기서 저런 죽음이 터져 나와 아우성치고 있는가? 노련한 의사가 뇌혈관의 출혈에서 신체 구조와 섭생 그리고 유전력 전반을 문제화하는 것처럼, 신이치는 테러로부터 이 사회의 표층적 제도부터 심층적 사고 체계의 역사까지 진단해 내려간다. 9·11에서 광우병으로, 그리스도교적 교리의 증식성으로, 예술의 양의성이 상실된 세계로, ‘모노’와의 동맹으로.
테러의 텅 빈 메시지는 신이치에게 압도적으로 비대칭인 이 세계를 직시하라는 명령이었고, 그는 이 세계의 질서를 낳는 가장 심층의 흐름으로까지 사유를 전개시킴으로써 이에 응답한다. 테러가 만든 구멍은 그에게 사유의 웜홀이다. 거기서 압도적 비대칭의 원형인 인간-동물 관계를 인류학과 신화의 언어로 탐사되고, 비대칭성의 희생자이자 테러의 주모자인 이슬람 세계의 ‘反자본주의적’ 사고가 발원하는 ‘타우히드’의 교리가 소개된다. 이 응답은 다시 메시지가 되어 나와 같은 수신자들이 자기 세계를 발견하고 응답하도록 종용한다. 나는 이러한 메시지 독해와 메시지 전파야말로 우리가 ‘대칭성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비록 신이치와 같은 직관과 필력에 미치기는 어렵지만, 그의 글을 함께 읽고 또 나누는 일 또한 대칭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일종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이 일본어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열어준 혜원의 증여에 깊은 감사를 보낸다! 더 많은 이들이 대칭성 사회의 주민으로 응답하는 삶을 함께 살아가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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