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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리뷰 ⑩ 지고한 기쁨을 위한 과학

by 북드라망 2023. 7. 18.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리뷰 ⑩


지고한 기쁨을 위한 과학


구혜원(규문)

 


과학을 공부한다는 건 뭘까?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내게 과학은 기술과 연관이 있었다. 발전된 기술은 더 편안한 삶에 기여한다. 과학기술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걷어내 준다. 더위도, 추위도 모르게 해 준다. 질병도, 그리고 어쩌면 죽음도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과학 기술이다. 하지만 기술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과학은 나와 동떨어진 영역이라는 생각도 한다. 과학이라는 말은 어쩐지 '저는 문과인데요'라는 대답을 예비하게 된다. 내가 손 놓고 있어도 신기하고 획기적인 기술은 날마다 나오고 있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묻는 것 같다. 편안함과 쾌적함을 제공하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곧 미신이 아니냐고.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과학은 죽음과 싸우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이미지, 그로 인해 유발되는 두려움과 싸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리가 두려움과 싸우는 방법은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복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가장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다다익선’이라는 환상을 갖게 하고, 뭐든 축적하고 의지하는 ‘미신’의 태도를 살게 한다. 더 많이, 더 발전되게. 그렇지만 두려움이란 다름 아닌 그 ‘더’를 파고든다. 더 많이 가질수록 좋다는 ‘다다익선’은 그 전까지는 좋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기반한다. 루크레티우스는 만족이 아니라 자족, 자신이 어떤 기준 속에서 행복해질 것인가를 사유할 때 두려움의 굴레에서 놓여날 수 있다고 말한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지고한 기쁨’을 위한 삶의 조형이다. 이 기쁨을 위한 학문이 루크레티우스에게는 과학이요 원자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에게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초점은 언제까지나 '지고한 기쁨'이다. 그 행위가 정녕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 원자론의 윤리는 쾌락이라는 시금석 아래서만 정립될 수 있다. (...) 요컨대, 우리가 지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죽음은 현행적이고 예상할 수 없다는 원자론의 가르침은 결코 삶의 방임이나 맹목적 행복 추구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죽음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조금 더 신중해지지 않을까. (252쪽)


지고한 기쁨을 위한 과학!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은 너무나 두려움에 기반한 미신에 가깝다. 불편해지는 것을 못 참고, 불편할까봐 신기술은 뭐든 받아들이고 구비한다. 자원이 혹여 고갈될까 두려워하고, 그 때문에 원자력발전 같은 감당 못할 기술도 사용한다. 요즘 들어 점점 그런 게 거침없어지는 것 같다.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에서 저자가 개탄했던 에어컨부터 시작해 온갖 스마트기기를 쓰고, 또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바로 나다. 어떻게 보면 나는 ‘문과인데요’ 하고 과학에 대해 손 놓고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주어지는 기술문명의 환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지고한 기쁨’이 아닌 두려움에 기준을 둔 삶의 방식이다.


이런 우리에게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을 하나의 ‘만남’으로 보여준다.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는 두 바퀴로 굴러간다. 한 쪽에는 두려움과 미신에 맞선 생성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있다. 그는 이미 완성된 로마 제국을 살아가며, 그 시대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모습에 개탄하는 한편 그 두려움이 뭔지 이해해 보려고 한다. 원자의 운동에 입각하여.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루크레티우스를 만난 저자가 있다. 루크레티우스와 2000년은 떨어진 현대를 사는 저자 그리고 독자인 우리의 모습은 루크레티우스가 개탄했던 로마 시민들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안팎으로 발전하고 팽창해서 모든 것이 풍족한, ‘이미 완성된’ 세계 안에서 이것이 끝날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로마 사람들이 두려워한 죽음이란 꼭 먼 훗날 우리가 반드시 맞아들일 생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말에 우리가 덧씌운 온갖 이미지들의 총체를 말한다. 저자는 이런 이미지를 하나씩 벗겨 나가며 거기에 깃든 두려움을 하나씩 해체하는 방식으로 루크레티우스를 읽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관계들, 놓치고 싶지 않는 지금의 건강과 젊음, 이루고 싶은 미래...이것들을 저자는 시시콜콜 따져 물어간다. 가실 줄 모르는 피부의 여드름, 당장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공부, 생각과는 다른 전공, 어제 사귄 여자친구. 이런 저자의 고민은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대여한 삶", 속에서 누리는 지고한 기쁨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된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으면서도 어느새 죽음에 대한 우리 시대의 두려움, 그리고 그걸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이게 ‘만남’, 구체적이고 솔직한 글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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