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리뷰 ⑧
최난희(규문)
니체는 글을 쓸 때 괴테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준칙으로 삼았다. “내 활동을 키워주지도 않고 내게 직접 활기를 불어넣지도 않으면서 단지 나를 가르치려고만 하는 모든 것을 나는 증오한다.” 책도 물성을 지닌 생명체다. 읽으면서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왠지 조아리게 하는 책이 있다. 한 분야의 전문들의 오랜 연구 결과가 집약된 책도 필요하다. 하지만 괴테가 말한 ‘단지 가르치려고만 하는’ 책은 전문적인 영역의 권위를 배경으로 독자로 하여금 수동적인 학생으로만 머물게 하는 책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 활동을 키워주고 내게 직접 활기를 불어넣’는 책이다. 함께 가보자고, 함께 생각해보자고 이끈다. 그래서 그런지 가독성이 좋다. 가독성이 좋다는 말의 의미가 ‘시간 때우기용’ 같은 의미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 가독성이 좋다는 의미는 나의 문제의식과 맞닿는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을 저자가 어떻게 뚫고 들어가는지가 투명하게 드러나는데, 그 탐색 과정에 저자의 삶이 녹아들어 있어서, 책을 덮고 나면 지식은 물론, ‘아, 나도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라는 자신감까지 얻게 된다는 의미다. 리뷰용 원고를 받자마자 꼬박 이틀에 걸쳐 페이지를 넘겼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다. 그리고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 청년은 요즘처럼 정처 없는 시대에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했구나, 그 맹렬함이 온갖 티끌을 날려버리는구나. 부럽다!
저자와 나의 인연을 돌이켜보면, 깊다면 깊다. 몇 년 전부터 나는 혜화동에 위치한 규문이라는 공부공동체에서 니체와 푸코를 공부했다. 저자와는 그때 이후 이런저런 세미나를 하며 함께 관심의 영역을 넓혀갔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함께 읽는 세미나에 저자가 반장이었다. 당시 나는 고대 자연철학자 중 한 사람인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조금 알고는 있었다. 당시 저자가 발제문에서 “맑스는 왜 쟁쟁한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그리스 후기 철학자인 에피쿠로스에 주목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세미나를 통해 나는 유물론에 대한 그간의 편견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편견이란 유물론은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오해였다. 알고 보니 본래 유물론이라는 철학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유물론은 항상 ‘하나의 추상적 원리나 이데아로 환원하려는’ 즉 ‘실체’나 ‘있음’으로 환원하려는 관념론에 맞서는 하나의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원자론’도 그런 맥락에서 ‘진정한 유물론’적 부류에 속한다.
저자에 따르면, “루크레티우스 사상의 근간은 원자론이다. 세계는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알갱이들과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우리에게 이 아이디어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미 진부한 상식이자 팩트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고대인들에게 원자는 치열한 질문과 논쟁으로 도출된 사유의 산물이었다. 원자론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 혹은 입장이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원자로부터 우주를 설명해낸다는 것은, 다른 개념체계를 가진 자와는 전혀 상이한 현실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대철학에서는 어떤 자연학적 앎을 지니느냐에 따라 감각의 방식도, 가치의 목록도, 생활의 양식도 다르게 형성되었고, 그 역도 성립했다.” (61쪽)
고대과학에서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감각적 경험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며 또 오로지 사유될 수만 있”디는 것이다. 원자론이라면 학교에서 슬쩍 지나치듯 배운 데모크리토스가 창시자였다는 것 정도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자론이 이런 사상이었나,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는다. 책에서 저자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이 “모든 것이 얼어붙은 엄혹한 겨울에 태어난 새순 같은 사유”(62쪽)라고 한다. 여기서 ‘얼어붙은 엄혹한 겨울’의 사상이란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얼음으로 만들어져 에일 듯이 차가운 빛을 주위에 내뿜는’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세계를 얼려버렸다..논리에 집중하라. ‘존재’란, 완벽하게 연속적이고, 균일하고,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아야 한다. 현상들로 가득찬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 현존하는 영원하고 부동한 하나-존재. 파르메니데스는 냉철한 이성과 논리의 길을 따라 ‘일자’의 세계를 사유했다 (63~65쪽)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그런 난공불락일 듯한 견고한 성에 ‘베누스의 봄바람’처럼 스며들어 균열을 낸 사상이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논리의 엄밀함이 아니라 그 논리가 삶의 이해에 가닿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제 자연학은 현실과 거리를 둔 ‘현자적 탐구’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비로서 사용되어야 한다....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이러한 치유 프로그램에 세팅된 탁월한 운영체제였다.”(116쪽) 우리에게 세상은 신의 창조물로서 완벽한 질서를 보존하고 있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요동치고 바뀌고 속이는 역동적인 장이 아닌가. 원자론자들에게 ‘원자’는 ‘실재를 정초하는 근거’로 요청된다. 천상을 추구하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기 위한 사유의 도구로서 말이다. 어떤 철학적 사유도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니체가 말한 대로 “아무런 전제 없는 학문은 없다” 가장 객관적인 학문이라 자처하는 과학조차도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보편’과 ‘진리’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진리가 누구의 어떤 진리인가’이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 철학적 사유와 접속함으로써 나의 삶에 어떤 해방을 가져다주느냐가 중요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의 유효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저자는 원자론이라는 렌즈로 현실을 진단한다. “‘원자’를 둘러싼 두 개의 구원이 있다. 원자론의 구원과 원자력의 구원. 루크레티우스의 구원과 아이어 맨의 구원...루크레티우스가 말하듯, 문제는 세계 위에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잇는지를 묻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 우리에게 희망의 다른 이름은 배움이다. (107쪽)
삶에 작동되는 공부란 어떤 것일까? 사실 누구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어떤 순간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때 당혹감과 좌절감을 다루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일차적으로 나에게 그런 사태를 야기한 원인을 외부의 어떤 적에게 투사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다. 한편 그와는 결이 다른 접근 방식도 있다. 현상적인 문제에 감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그 문제의 근원을 사유함으로써 문제의 국면을 바꾸는 실천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저자에게 공부는 “먹고 산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 공동체에서 주고받는다는 것, 환경을 위한다는 것과 같은 총체적이고 막중한 관념들을 되묻고 뒤집어야 하는 문제”(11쪽)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청년이 걷는 길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고대과학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이 변환의 과정에서 입증이 아닌 실천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즉 앎이 삶을 바꾸는 일은 검증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일어났다...우리 시대의 과학 지식은 학계의 권위적 시스템에 의해서 생산되고 유통되지만, 고대의 진리는 그것을 배운 자 자신이 그것과 더불어 자신의 생활양식을 변형하고 사물들과 맺는 관계를 바꾸는 만큼 구현될 수 있었다. 즉 진리는 모두에게 승인된 보편적 팩트가 아니라, 배움 및 수행과 더불어서만 실현되는 구체적인 앎이었다. 그렇기에, 알지만 아는 대로 살지 못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파동과 입자는 하나요, 이것과 저것이 둘이 아님을 말해주는 양자역학을 배우는데도 일상은 여전히 단일하고 독립적인 ’나‘를 굳게 믿는 고전물리학적 관념 속에 사는 우리와는 달랐다는 얘기다.”(90쪽)
지식만 축적하는 공부가 과연 무슨 의미인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행복해져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그것은 뭔가와 만나고 싶은 열망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손을 뻗는 것이다. 어린 담쟁이 덩굴손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벽과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벽의 있음이야말로 활동의 근거가 되어준다. 오직 뻗어가는 활동만이 덩굴손이다. 행복해지는 공부를 하면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 저자와 나도 아마 그 힘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책을 읽으며 그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떠올렸다. 정처 없는 시대, 우리는 “자신의 실재를 정초하는 근거”를 마련하고 싶다. 루크레티우스를 우리 앞에 불러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이라고,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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