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校訂)의 맛
오선민(인문공간 세종)
6월의 생명 찬가
모내기를 마친 6월의 들판을 보니, 싱그러운 씩씩함이 느껴진다. 이글이글 한여름의 열기와 우당쿵쾅 번개 돌풍의 충격도 예감된다. 어떤 뜨거운 시작이 다가온다. 이렇게 6월이 생기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막 교정지를 출판사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제 책은 내 손을 떠나 그 자신의 탄생을 위해 걸어간다. 어떤 시련이 책을 기다릴 것인가? 전체 내용을 지탱해줄 문면(文面)의 디자인이라든가, 과감한 표정을 지을 겉표지의 모습이라든가, 인쇄소에서의 여러 공정과 생산-유통에서 발생할 일들도 궁금하다. 나에게는 설명하고 싶은 진실이 있었지만, 책이 통과할 세상의 진실은 다를 것이다. 그래도 소망하기를, 신화의 맛을 나누고픈 이 마음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한 책이 태어날 여름을 상상하며, 신록의 대지가 품은 뭇 생명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교정의 단짠단짠
새로 태어나고 싶은 것은 실은 나다. 5월 초에 『신화의 식탁 위로』(근간)의 교정지를 받았다. 초고를 다 마무리하고 출판사로부터 ‘너, 오너라~’라는 소식이 올 때까지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이 숨돌림이란 입사 여부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느긋이 쉴 수는 없었다. 세상에 나갈 만한 내용일까, 편집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어쩌지? 전전긍긍했다. 도착한 교정 원고를 펼치니 구석구석 빨갛게, 미숙했던 부분이 무르익어 터져 있었다. 편집자의 치밀한 코멘트에 기가 죽었다. 그래도 ‘고쳐보아라~’고 하시니, 책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은 셈이었고 용기 내어 원고를 대해야 했다.
바로 교정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겨우 빠져나온 지옥을 다시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에게 덧붙이거나 뺄 수 있을 만큼의 또 다른 의견이 과연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내 교정의 롤-모델은 올리버 색스였다. 신경의학자로서, 작가로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책 『온 더 무브』(이민아 옮김, 알마)에는 그가 편집자의 의견에 맞추어 엄청난 분량의 조사를 거듭하고 내용을 증보해서, 완전히 다른 버전의 책을 만들어내는 에피소드가 몇 번이나 나온다. ‘나도 언젠가는 많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그러나 이 초고의 몇몇 대목은 두 손으로 뇌를 쥐어짜다시피 하며 썼기 때문에 교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교정을 시작하는 날 아침에는 계룡산 아래 온천에 다녀왔다. 산신령님 힘이라도 빌고 싶은 마음에. 그날 오후부터 파란펜을 들고 천천히 교정지를 읽어나갔다. 교정은 퇴고와는 다르다. 첫 문장부터 다시 읽더라 해도 계속 빨간펜과 대화하며 나가야 한다. 이 빨간펜은 음성지원도 되기 때문에, 글 여기저기를 쿡쿡 지르밟으시며 ‘음~ 쓸만하군’, ‘음~ 이건 아니지’ 하는 편집자의 목소리가 아플 때도 있다. 대개 그 자리란 생각이 거칠게 펼쳐져 있는 곳 즉 공부가 덜 되어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꼭 이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이 깐깐함 앞에는 장사가 없으리.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펜 아래로 파란 눈물이 뚝뚝 흘렀다.
교정에서는 단순히 문장을 고쳐야 하는 경우와, 내용을 다시 논증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나는 고칠 수 있는 문장부터 서둘러 끝내고 내용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고? 첫 교정을 다하고보니, 내용을 수정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전체적으로 거칠게 손을 보고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고를 처음부터 읽지 않고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둔 표현들만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 70페이지쯤 작업을 하다가 결국 펜을 멈추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고치기가 훨씬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습장에 고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컴퓨터를 켜놓고 문장을 썼다. 그래도 조사며 접속사며, 문단 나누기까지 잘 되지 않았다. 고칠수록 꼬여갔다. 마지막 페이지까지가 하도 멀어 보여서 다시 하루를 쉬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들여 작업을 하면 좋은데, 들쑥날쑥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빨간펜이 가리키는 부분들은 내가 어떤 단어를 주로 쓰고, 어떻게 말들을 꿰어 나가는지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이 너무 진지했다. 제목은 ‘신화의 식탁 위로’인데, 맛있는 요리를 앞둔 식탁의 즐거운 비명 같은 것, 푸짐하고 넉넉한 여유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 요리사가 보였다. 아, 더 재미있을 수는 없단 말인가?
하지만 유쾌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잘 되지 않았다. 이것은 습관을 바꾸는 일이어서, 쓰는 마음과 신체 모두를 다르게 가져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초고를 쓸 때라면 모를까, 교정이라는 마지막 봉우리를 앞두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고를 쓰는 동안은 신화를 설명하는 데 푹 빠져 있어서 글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교정지가 올 때의 그 몇 주 동안 조금 초조하기는 했지만 영화도 보고, 산에도 가고, 새로운 주제로 공부도 시작했기 때문에 나와의 거리가 생긴 것이다. 빨간펜은 나의 진지함이 폭주하는 지점에 그어져 있었고(물론 그 밖의 부분에도 엄청 많이 있었다), 이번에 그런 내가 보인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책이 끝나가는 예감은 달콤했지만, 파란펜도 많이 울었다.
새로운 문체를 향해
작가에게 제일 필요한 능력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쓰기란 문장 구현 능력에 달려 있다. 백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백 권의 책을 쓸 수는 없다. 창의력이 차고 넘친다 한들 붓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처지에 어찌 화폭에 나타낼 수 있으리? 신화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신 레비-스트로스의 말씀은 책에 다 쓰여 있다. 그것은 읽고 외우며 머리에 들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식을 더 많은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서는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 온갖 군데 빨갛게 물든 교정지를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배움이 진리의 내용에만 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화의 식탁 위로』에서 다룬 신화들은 모두 문자를 거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신화 분석을 마친 나의 문장을 고치다보니 문장에 깃든 다양한 숨결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진지한 사람이 쓴 신화 이야기도 있겠고, 유쾌한 사람이 쓴 신화 이야기도 있겠다. 이 하나하나의 해석은 같은 결론을 말할지라도 다른 글이다. 각기 다른 성정과 욕망에 의해 걸러진 진실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자에 의해서 다채롭게 또 변용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해석에 있어 정본은 없다고 했다. 모든 해석이 또 하나의 신화를 낳을 뿐이라고. 신화란 그것을 음미하는 사람이 자기 삶의 비전을 위해 사용하는 인식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식탁 위로』도 하나의 신화이다. 어떤 진지한 사람이 경험하고 이해한 세계의 이야기이다. 다른 내가 되고 있기에 내 글이 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다.
지식을 가르쳐주는 학원은 있어도 문체를 가르쳐주는 도장(道場)은 없다. 글에는 그 사람의 성정과 욕망이 고스란히 실린다. 어떻게 하면 좀더 재미있고 발랄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젊은 시절, 자신의 그림체가 철완 아톰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와 너무 닮았다는 평을 듣고 큰 모욕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평단의 말에 화가 나서 잔뜩 모아둔 낙서를 옷장에서 꺼내 전부 불태워버리고, 미술학원 처음 들어간 학생처럼 선 그리기, 스케치, 데생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얼마나 많은 선을 그려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어진 습관 바꾸기란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결국 미야자키는 애니메이터로서 자기 비전을 만들어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무엇을 캐릭터로 만들까, 그의 연기를 어떻게 표현할까?(미야자키 하야오, 황의웅 옮김,『출발점』(대원씨아이), 202쪽). 그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어떤 주제로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지 고민하며 그리고 또 그렸다. 미야자키가 자신에게 부여한 미션은 다음과 같다. ‘많이 그린다, 반복해서 그린다, 계속 그린다!’ 많이 그린다는 것은 다양한 대상에 눈길을 주며 표현해본다는 것이고, 반복한다는 것은 그 하나하나를 다채롭게 변주한다는 것이며, 계속함이란 이런 방식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미야자키는 그런 나날 속에서 어느새 자신이 누구와 닮았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가 바로 『나우시카』(1984)에서 『바람이 분다』(2014)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의 작품도 같은 문제, 같은 표현적 스타일을 갖지 않은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문체란 세계관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누군가와 뭔가를 나누려는 구체적 고민들을 껴안고, 많이 쓰고 반복해서 쓰고 계속 쓰는 시간만이 있다. 그 와중에 작가는 진지하고 유쾌하고 엄숙한 등등의 성품을 입었다 벗으며 자기를 만들어간다. 무문자 사회의 신화들은 오직 관계뿐임을 가르쳤다. 만들어가야 할 이 자기란 항상 관계 속에 있다. 글이란 관계를 엮고 푸는 주문(呪文) 기술이다. 이번 교정을 통해 나는 의미의 무한한 장으로 나를 이끄는 명사, 동사, 접속사, 문장 부호의 생기를 새롭게 느끼게 된 듯하다. 쓰고 또 쓰면서 그 활발발한 기운을 잘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재치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집중을 못할 때도 많았던 교정도 결국 끝났다. 중간에 좀 발랄하게 써보자 작심하고, 탱탱한 옥수수알 묘사 같은 것을 넣어보려고도 했으나 불가능했다. 진지한 사람의 설명문이 갑자기 무슨 수로 유쾌한 사람의 묘사문이 되겠는가? 결국 덧붙이려 했던 장식들을 다 빼고, 빨간펜 주신 부분을 간단히 고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완성된 교정지를 들고 우체국을 향하려고 보니 5월이 다 가 있었다. 이제, 나도 시작이다. 새로운 한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게 해준 교정의 시간을 다시 통과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