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순수이성비판 강의』, 『실천이성비판 강의』밑줄긋기
만약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에서 ‘세 각’을 제거하면(가령 네 각이라고 하면) 삼각형과 모순을 이루게 되므로 우리는 세 각이 언제나 삼각형에 귀속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술어(세 각)와 함께 주어(삼각형)도 제거하면 이제 아무런 모순도 생기지 않습니다. 삼각형이 없어졌으니 세 각이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삼각형을 정립해 놓고도 세 각을 제거하면 당연히 모순적이겠습니다만, 세 각과 삼각형을 함께 제거하는 것은 아무 모순도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주어)는 현존한다(술어)’는 명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의 실존을 제거해 버리면 그와 함께 모든 술어도 제거됩니다.(『순수이성비판 강의』, 376쪽)
주의해야 할 것은 신이 현존해야 최고선이 가능하다는 이 도덕적 필연성이 객관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주관적으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의 실존을 반드시 의무적으로 상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의무에 속하는 것은 신의 실존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최고선을 제시하고 촉진하는 작업뿐입니다. 하지만 신을 상정하는 것은 최고선의 실현이라는 실천적 의도에서 나타나는 주관적 믿음, 즉 순수한 이성 신앙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당연히 이론이성의 입장에서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순수실천이성의 관점에서는 필요한 신앙입니다.(『실천이성비판 강의』, 194~195쪽)
노벨상 수상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홍한별 옮김, 민음사, 2021)에는 태양을 신처럼 생각하는 AI, 클라라가 등장합니다. 클라라는 조시라는 아이를 돌보는 ‘친구 AI’인데요. AI임에도, 아픈 조시를 위해 태양에게 기도를 하고, 조시를 낫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간절하게 묻습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 주고 있는 신 존재 증명에 따르면 클라라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천체’에 불과한 태양을 신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순수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비판』으로 넘어가면 클라라는 신에 얽매인 ‘광신자’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의 실체를 ‘구성’해 내고 그것이 실존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시를 낫게 하기 위한 ‘규제적 원리’, 즉 실천의 근거로서 ‘신’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계장치로서 철저한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 같은 AI가 ‘신앙’을 가지고 ‘자유’를 실천한다는 설정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간은 무엇인지, 정작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인간’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SF를 잘 읽기 위해서도 칸트는 꼭 읽어 두셔야 하는 텍스트랍니다^^
이제 선악의 개념이 도덕법칙에 앞서지 않고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된다는 『실천이성비판』에서의 방법의 역설을 설명하겠습니다. 이를 도덕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칸트는 선한 것을 따르는 도덕법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만이 선하다는 전혀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는 윤리를 둘러싼 과거의 철학이 범한 잘못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윤리성의 원리라는 것이 순수하고 선험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는 법칙임을 모른다 하더라도 아무런 근거 없이 원칙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의지가 경험적으로 규정되는지 선험적으로 규정되는지 처음에는 미결로 남겨 두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의지의 법칙을 도출하기 위해 선의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했고, 그래서 선한 것으로서의 대항에 대한 개념이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가 되고 맙니다. ( 『실천이성비판 강의』, 119~120쪽)
보통 사람에게 '철학'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아마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 칸트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칸트의 원전(독일어로 된 원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말로 번역된 3대 비판서)을 오롯이 혼자서 읽어 내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쯤, 머리가 터지도록 어려운 개념들로 이루어진 칸트의 원전을 꼭 내 힘으로 읽어 내서 왜 칸트의 철학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리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깊숙이 눌러 두었던 이 마음을 꺼내어 이제 이수영 선생님의 설명과 더불어 원전 읽기에 도전해 봅니다.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정념적 동기들이 '진실하라'는 명령에 개입할 때 우리는 상당한 고뇌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 그 반대로 얘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뇌하면서 자신이 정념적 동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바로 저 법칙의 순전한 형식으로 주어진 정언명령 때문입니다. 우리는 윤리적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저런 정언명령을 의식하게 됩니다. 칸트는 이런 근본법칙에 대한 의식을 "이성의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이성은 개념에 의해 판단하는 지성과 달리 원래 추리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결과들의 원인을 그 궁극적인 지점까지 추궁해 들어가는 것도 이성의 본성입니다. 그리하여 절대적 무조건자, 최초의 원인, 즉 신과 같은 절대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실천이성비판 강의』, 71쪽)
'정념적 동기'와 '절대자'가 이렇게 연결됩니다. '정념적 동기'란 어떤 것일까요? 이를테면 지하철에서 포장도 뜯지 않은 완전 신제품 아이패드가 담긴 쇼핑백을 주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 어떤 세팅도 하지 않은 완전한 새제품이니 '양심'에 부담도 덜할 겁니다. 이걸 신고해야할지 그냥 꿀꺽해버릴지 그런 고민이 자연스럽게 들겠지요. 마음 속에서 '진실하라'는 명령이 울려퍼지지만, '정념적 동기'가 그 소리를 눌러버릴 수도 있을겁니다. 이게 '정념적 동기'입니다. 그렇다면 '진실하라'는 명령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있는 것이기에 모종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정념적 동기'를 괴롭히는 것일까요?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그 문제를 해명합니다. '순전한 형식으로 주어진 정언명령'이 '어떻게 있는지' 밝히는 것입니다. 『실천이성비판 강의』가 그러한 칸트의 논의로 들어가는 데 더 없이 좋은 입구, 지금껏 읽어본 그 어떤 '해설서'보다도 좋은 '디딤돌'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순수이성비판 강의』와 함께 읽으셔야 좋습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추상적인 사변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자신의 착오를 쉽사리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각 주장이 첨예하게 맞붙는 이율배반 속에 있음을 알려주면 이성은 자신의 한계와 착오를 깨닫게 됩니다. 정립 쪽이 자신의 이론의 모순 없음을 주장하면 반정립 쪽도 모순 없음을 동시에 주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가 자기주장의 확실함을 경쟁적으로 확보하려고 노력할수록 이성은 자신이 이율배반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입장도 옳고 저쪽 입장도 옳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순수이성비판 강의』, 326쪽)
저는 예전에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게 너무 힘들고 지루해서, 여러 번 중간에 읽기를 그만두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이른바 '가상의 논리학'이라고 불리우는 '선험적 변증론' 부분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재미있었습니다. 그 부분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간략하게 말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문제' 그러니까 '이율배반'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상황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도 매일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진보와 보수'만 놓고 봐도 (이론적으로는) 어느 쪽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두 가지를 두고 '선택'하는 문제가 되고요. 이 주제로부터 '이데올로기론'이 나오고, '가치판단의 문제'가 나오고 기타 등등 온갖 문제들이 나오곤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예'가 있다고 한다면, 그 '기예'의 핵심 과목은 아마 '이율배반'을 다루는 과목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칸트를 읽는다고 그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문제에 충분히 익숙해질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가요? 한번 읽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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