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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 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0. 3. 23.

『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 지은이 인터뷰



1.선생님께서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신다고 읽었습니다. 말씀인즉슨, 철학 공부를 본업으로 하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플라톤의 『국가』을 읽으시고, 글도 쓰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글쓰기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문학 연구를 위해 철학을 공부하기도 하지만, 저도 제가 플라톤의 『국가』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예전에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론』 정도 읽었던 것 같고, 두꺼운 『국가』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일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서, 제가 『국가』를 읽고 책까지 쓰게 되었네요. 아마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제가 마을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10년 전쯤 문탁네트워크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 마흔 살이 되면서 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어요. 그래서 과학세미나에서 하는 진화론 공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저는 문과생이라 진화론나 생명과학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는데도,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나 굴드의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같은 책들이 흥미진진하게 다가왔어요. 그러고 보니 이들은 인문학 전공자보다도 더 인문학적으로 글을 쓰는 과학자들이더군요. 그때 저는 제가 얼마나 전공의 장벽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실감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후로는 닥치는 대로 즐겁게 읽고 내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어떻게 연관 지어 볼까 궁리해 보게 되었습니다. 선거철을 맞아 정치철학책을 읽기도 하고, 정치철학의 기원이라는 플라톤의 『국가』도 읽어 보고, 그러다 보니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그리스 비극까지 읽게 되었어요. 제 문탁네크워크 생활 10년 가운데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고대 그리스와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론 정치철학이 아니라 그냥 고대 그리스 자체가 궁금해져서 4~5년 동안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들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2,500년 전의 고대인과 지금의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란 것을 확인하게 될 때 느껴지는 동료애적인 짜릿함이 있어요. 또 지금의 우리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대인들만의 미덕이 느껴질 때는 뭉클한 동경의 마음이 일어나요. 그래서 오래도록 반복해서 읽을 생각입니다. 

  


2. 많은 독자들이 플라톤의 『국가』를 정치철학서로 알고 계실 텐데요. 이 책 『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을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풀어 주신 플라톤의 『국가』는 ‘나’라는 이상(異常)한 나라를 어떻게 이상(理想)의 나라로 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철학서라기보다는 수양서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달까요? 플라톤의 『국가』는 어떤 책인가요? 


『국가』의 첫 장을 열게 되면 대개들 놀랍니다. 소크라테스와 대화 상대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철학이 녹여 들어가 있는 ‘대화편’이라는 형식에 놀라고, 그들의 대화가 너무 여러 분야를 건드리고 있어 놀라죠. “뭐! 이런 책이 있어?”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지?” 하는 난감함으로 『국가』의 독서가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일 거예요.


무지와 편견을 벗어나 올바른 앎에 이르는 인식론, 이런 올바른 앎을 기반으로 한 철인정치와 이상국가론을 펼치는 정치학, 철인왕과 예비철인왕 후보인 수호자들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학 등 플라톤은 『국가』에서 여러 분야의 문제들을 동시에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국가』는 철학/정치학/교육학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는 저서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윤리학입니다. ‘철학/정치/교육’이 동시에 어우러져 굴러가기 위해서 인간들이 해야 하는 노력과 생활 태도를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국가』의 윤리학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철학/정치/교육’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의 돌봄’입니다. 우리가 농담처럼 ‘영혼 없는 ○○○’이란 말을 쓰는데요, 그러지 말라는 것이지요. 무슨 일을 할 때 영혼을 담아서 충실하게 집중하고, 그렇게 되지 못할 때는 노력하라는 조언입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국가는 ‘소울 충만한 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돌봄이 정신과 신체를 이분화하고 정신의 주도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플라톤의 사상에는 물론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일에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다하는 태도가 과연 정신에 한정된 일인지, 정신과 신체가 그렇게 분리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영혼의 돌봄은 정신뿐 아니라 신체의 단련이나 관계의 조율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울증, 공황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현재 우리의 영혼이 취약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신박하게’ 와닿진 않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을 ‘업-사이클링’하고 싶었습니다. 『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을 읽으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 바쁘고 지쳐 있지?” 하고 질문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3. 이 책은 부제 그대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14편의 에세이’입니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요, 트와이스와 BTS가 나오고, 수저론과 미투, 소설과 시, 영화와 연극을 비롯해서 접촉사고와 선생님께서 애청하시는 라디오 프로그램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 생활 속에서 플라톤의 철학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고대 그리스를 공부하며 2,500년 전의 고대인들과 현재의 우리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거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감동’이었어요. 플라톤은 이데아나 영혼불멸 등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가며 이 문제들을 풀어 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죠. 아테네의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을 해결하려는 플라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활 속에 플라톤을 가져오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어요. ‘영혼 불멸’을 영화 <뷰티 인사이드>와 대비해 보고, ‘좋음의 이데아’를 라디오 프로그램 <세상의 모든 음악>과 연결지어 보면, 플라톤의 철학을 좀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고 오늘의 문제를 풀어 가는 데에도 해법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요.


그리고 대학원 10년, 문탁네트워크 10년,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인데, 내가 하고 있는 공부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습니다. 뭔가 내 공부는 학문적인 성취도 없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금의 눈높이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얘기해 보면 생산적인 대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쓰며 20대인 딸들과 얘기를 많이 했어요. 딸들은 주로 ‘재미없다’ ‘이해가 안 된다’며 딴지를 걸었고, 어려워하는 부분들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저도 플라톤의 개념들을 훨씬 풍부하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철알못’(철학을 알지 못하는) 딸들의 깐깐한 피드백 덕분에 BTS와 소크라테스를 함께 이야기하는 이 책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철알못’의 질문들을 무시하기 쉬운데,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직관적인 질문들은 논리가 빈약한 부분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요. ‘아는 척’ 넘어가지 않는 나름의 엄격함이 있죠. 그리고 그런 허점을 보완해 가는 게 대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사족이지만, 연예인 얘기 아니면 맛집 얘기가 딸들과 하는 대화의 전부였는데, 플라톤이라는 공통의 화제가 생겨 조금은 뿌듯합니다.



4. 선생님께서 가장 크게 맞닥뜨린 아포리아는 어떤 것이었나요? 만약 그 해답을 플라톤의 『국가』에서 찾는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아포리아(aporia)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무위로 돌아갈 때 나타나는 곤란함과 당혹감’을 이르는 말이에요. 당혹스러운 순간일 텐데, 이런 당혹스러움이 우리로부터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보도록 하는 적극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포리아 없이 철학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에게 『국가』에서 가장 와닿는 부분은 ‘동굴의 비유’였어요.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경험에 의한 편견이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소름 돋는’ 느낌을 경험할 때가 있어요. 그런 느낌이 들 때는 대개 아주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일에서죠. 저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줄곧 소설 창작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소설을 읽거나 쓰거나, 쓰려고 뒹굴며 시간을 보냈죠. 그래서 저는 제가 소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입학해서 비평 이론을 공부하면서 제가 소설의 작법이나 미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것도 발표 시간마다 교수님께 엄청 깨지면서 울고불고하면서 ‘속 쓰리게’ 알게 된 거죠. 대학에서 글쓰기 강사로 일한 지도 10여 년이 넘었고, 이래저래 다른 사람의 글을 봐줘야 하는 일이 간혹 있어요. 그럴 때 ‘글은 이렇게 써야지!’라는 자기 확신을 갖는 순간, 실수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제 넘는 지적질을 하거나, 새로운 문체나 스타일의 미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태함을 눙치거나 하는 식으로. 그럴 때 속으로는 뜨끔한데 그걸 또 상대가 눈치채면 안 되니까, 안 그런 척 어설픈 연기까지 하게 되는 ‘총체적 난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자주 ‘나는 동굴 속에 있구나’ ‘동굴을 벗어나기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말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단계가 아니라 무지와 편견의 동굴을 벗어나는 단계가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인데, 저는 여전히 출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각성만으로도 플라톤의 철학은 저에게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5. 책에서 플라톤이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가는 데 신화와 전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하시면서 “『국가』를 재미있게 읽는 팁 가운데 하나는 플라톤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해 보는 방법”이라고 하셨는데요. 이 외에 『국가』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팁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비선형적 독서 또는 비체계적인 독서를 추천해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는 여러 주제가 겹쳐 있어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큰 줄기 아래 여러 이야기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이것을 유기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의지를 내려놓고, 각각의 작은 주제들에 집중해 보면 『국가』라는 책이 갖는 방대함에 압도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근대적 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체계적인 독서와 학습을 교육받아 왔고, 그것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잘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합리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앎 따로 실천 따로’의 생활습관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500년 전의 고대인들의 사유는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될 수 있고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스케일과 스타일에서 저는 고대인들의 현실감각이 갖는 관대함과 포용력을 느껴요. 니체가 말한 ‘그리스적 명랑성’이란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정치에서 교육으로 점핑하고 다시 시와 철학의 대립으로 건너뛰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의 난장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좋은 삶’의 무기들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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