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_김중식, 「다시 해바라기」, 『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사, 2018, 88쪽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가물가물해질 즈음, 하나의 사건을 겪었다. 아니 사건이 닥쳐왔다. 이제 더 이상 우울한 감정의 파고가 높아지지 않는다고, 어느 정도 높아져도 그런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기특해하던 일이 무색하게, 그때 닥쳐온 사건 앞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생각이 어느새 괴물처럼 나타나 내 온몸을 온 마음을 집어삼키기 직전, 바로 그 상태가 되었다.
어찌어찌 그 상태를 꾸역꾸역 진창에 구르며 벗어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꾸역꾸역 잠들고 밥 먹고 하는 내가 너무 싫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미친 * 널뛰기’ 하듯 양극단을 오가는 마음을 부여잡고, “살아 있으라” 말하는 소리 쪽으로 전력을 다해 기어갔다.
시간이 흘렀고,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억울함과 모멸감은 많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지금 내 옆에 있는 딸의 덕이 크다. 존재 자체가 기적임을 매 순간 보여 주는 아기를 만나면서, 나는 어쩌면 비로소 내 존재에, 삶에, 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꾸역꾸역 삶을 향해 기어가던 그때의 나와 지금,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사람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슬픔으로 가득 채워지려는 마음을, 시의 마지막 구절이 비워 준다. “삶이 다 기적이므로 / 다시 만날 수 있다고 /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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