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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지아장커, 세계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 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18. 6. 7.

『지아장커, 세계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 

지은이 인터뷰


1. 선생님께서는 루쉰으로 박사 논문을 쓰셨고, 얼마 전(2018년 5월) 완간된 『루쉰전집』의 번역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용운에 대한 책을 쓰시기도 했고요. 이런 선생님의 이력으로 보면 동아시아 근대문학 연구에 주력하실 것 같은데, 지아장커의 영화를 주제로 책을 쓰신 것은 좀 의외인 감도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지아장커 영화와 접속하셨고, 또 지아장커의 어떤 점에 ‘꽂히셔서’ 책을 쓰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랫동안 저는 영화를 여가시간의 소일거리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영화가 지닌 풍부한 텍스트의 힘을 알게 되었고 영화를 통해 여러 가지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지아장커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책의 서문에 간단하게 언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루쉰과 근대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어떻게 지아장커에 ‘꽂히게’ 된 걸까요? 글쎄요…… 이런 것 있지요. 저는, 어느 시대에나 인간 삶에는 빛과 어둠이 항상 한 몸으로 늘 존재해 왔고 인간관계에선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가 늘 있어 왔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가 옛날보다 아무리 좋아졌다 하지만 이런 구도에는 변함이 없어요.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인간 삶의 어떤 조건 같기도 하고요. 루쉰이 도저하게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무시당해 온 하층계급의 사람들입니다. 일용직 날품팔이, 갑질에 억울하게 당하는 ‘을’들, 여성과 아이들,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이요. 그는 평생토록 이들을 대신하여 발언했고 이들을 대신하여 복수하고자 했고 그들을 대신하여 싸웠습니다. 몰락한 가문의 출신이지만 루쉰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도시에서 여행 다니면서 ‘멋지게’ 웰빙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런 지식인들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마치 무슨 구도자처럼, 자신의 모든 재능을, 자신이 쓰는 모든 글을 이 약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삼강오륜이라는 남성 중심 유교질서의 질곡에서 중국인이 어떻게 해방되어 근대적인 신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들의 인권과 평등과 자유, 그들의 복수와 해원(解冤)을 위해 썼습니다. 그의 작품은 모두 이를 위한 폭로와 비판에 바쳐졌습니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글들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다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는 어둠과 패배, 실패의 편에 서서,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지요. 당시 이러한 모습을 보여 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무척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의 한용운과 중국의 루쉰,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를 꼽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실패와 절망, 고통과 어둠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저층의 인물들 속으로 걸어들어 갔습니다. 우리가 실패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루쉰의 ‘절망 속에서의 항전’, ‘몸부림쳐 싸우기’, 한용운이 감옥에서 한 일갈―‘지옥 속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천당’, 도쿄대 교수직이라는 명예로운 길을 버리고 주류 세력에서 이탈하여 원고료로 힘겹게 살아가면서 세상을 조용하게 비웃으며 견딘 소세키의 저회(低徊 )취향 등은 이 시대의 젊은 청년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들이 책을 잘 골라 읽으면 힘든 고통 속에서도 잘 걸어 나간, 이미 앞서 걸어간 선배들이 우리들에게 이러저러한 얘기와 방법, 눈짓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땐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의 대사(大師)들이고 불가능 속에서 길을 헤쳐나간 정말 대단한 선배들이지요. 그렇다고 그들에게 고통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고통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즐거움과 여유로움, 복잡한 일을 헤쳐 나가는 유쾌하고도 씩씩한 자세, 농담과 비꼼과 해학의 정신이 눈부신 보석처럼 유쾌하게 번득이고 있습니다.


지아장커 영화를 처음 보면서 저는 ‘아, 이 시대에 저런 감독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후에 계속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화가 나오면 바로 찾아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이 철저하게, 근대화되고 산업화되고 도시화되고 있는 중인 이 시대 중국에서의 어두운 그늘을 비추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낙오된 자들, 가난 속에 처해 출구가 없는 젊은이들, 몸 하나에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죽음을 무릅쓰고 지하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사람들, 망치 하나로 건물을 부수는 철거노동자들. 지아장커가 그들을 찾아가서 조용하고도 따뜻하게 렌즈에 그들을 담는 것을 보면서 저는 엄청난 감동을 느꼈습니다. 비애와 쓸쓸함, 노동의 아름다움과 자연과의 조화로움, 그것에서 오는 ‘황토의 미학’, 철저한 리얼리즘의 기법에 감동하였습니다. 목하 대국으로 굴기하고 있는, 잘 나가는 중국의 이면에는 수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는 조용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대도시를 쌓아올린 사람들은 자본가도 건축가도 아닌 이들 하층의 노동자들이라는 것을, 대국 중국의 엄청난 발전과 밝음 뒤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수많은 어둠 속의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근대 초기 한·중·일 동아시아의 앞서 세 명의 선배들(루쉰, 한용운,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거의 100년이란 시간을 건너온 지금의 중국에서, 지아장커는 그 선배들이 주목하였던 곳을 찾아가고 그들에게 렌즈를 맞추어 그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목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착한 사람들의 존엄’을 보여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찍어 세계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 그들의 존재가 전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상철학과 영상기법은 중국/세계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로서 과연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시대의 어둠과 시대의 실패, 그 속에 갇혀 출로가 안 보이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 그들이 처한 부조리한 생존 환경은 결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지구적인 세계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된 무한경쟁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2. 책에 보면 ‘지아장커는 영화계의 루쉰’이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얼핏 드는 생각으로는 루쉰의 글은 술술 읽기가 어렵고, 지아장커의 영화는 마음 편히(?) 보기가 어렵다… 는 정도가 공통점이 아닐까 싶은데요(^^;). 분야도, 살았던 시대와 환경도 전혀 달랐던 루쉰과 지아장커가 어떻게 통하고 있는지 좀 더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맞아요. 그렇군요. 술술 읽히지 않는 루쉰을 자꾸 번역해서 독자들에게 읽어 보라고 권하고 있고, 보기 불편한 영화를 책까지 만들어서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군요, 제가.(^^) 그런데 저는 어디선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저자의 견해에 불편을 느끼거나, 누군가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잠시 고개를 숙이고 그 불편한 생각이 드는 부분에 나의 ‘편견’이 있지는 않나, 한번 점검해 볼 것을요. 나의 생각과 의견, 견해, 시각, 심지어는 나의 희로애락의 감정과 어떤 일에 반응하는 감정적인 기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보고 듣고 공부하고 영향받아온 것의 총체적인 경험하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편향과 편견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재미가 없다, 맛이 없다와 같은 판단은 그동안 재미있어 하고 맛있어 해온 경험의 종합적인 반응입니다. 영화를 예로 들면 스펙터클한 서사와 영상,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의 서사기법, 아름다운 멜로와 달콤한 비애 등 단시간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영화들은 누구나 재미있어 합니다.어떤 면에서는 우리들 영화 시장의 지배적인 문법이었던 ‘할리우드’적인 맛에 길들여진 것이기도 하지요. 그 길들여진 맛에서 벗어나면 지루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불쾌하기도 하지요. 모두 어떤 편견과 편식의 결과입니다. 


제 생각에는 불편할 때와 어려울 때, 불편한 것과 어려움을 감수하고/감수하고자 노력하면서 가능한 한 마음을 비우고, 주관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성의 세계, 새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이 책 『지아장커, 세계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의 2장 4절에서 문학의 준열성과 위대한 독자를 얘기하면서도 한 바 있습니다. 불편한 것, 쓴맛, 떫은맛을 잘 감수하면서 새로운 독서의 경험과 새로운 영화문법을 익숙한 나의 것으로 만든다면, 또 새로운 감성 체험하기에 도달하게 된다면 아마 그 ‘새로운’ 세계는 위대한 독자들, 위대한 청중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잠시 쾌락과 즐거움을 내려놓고 어렵고 불편한 것을 친구 삼아 책 읽기, 영화보기를 시도해 보세요. 아마도 다른 가치와 다른 의미와 또 다른 깨달음이 선물로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루쉰과 지아장커가 어떻게 상통하고 있는지는 위 1번에서 간단하게 답을 드렸습니다. 실제 작품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한걸음 더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3. 책의 제목이 『지아장커, 세계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이고 부제가 ‘<샤오우>에서 <천주정>까지, 지아장커 영화의 리얼리즘’입니다. 이제 리얼리즘은 역사 속의 사조 같다는 느낌도 들고, 선생님께서도 책 속에서 “‘낡은 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그럼에도 지아장커의 영화를 읽는 여러 가지 해석틀 가운데 리얼리즘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리얼리즘을 ‘낡은 이론’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동안 리얼리즘에 대한 많은 이론적 논의와 논쟁이 있어 왔고 또 이에 의지한 많은 비평담론이 생산되었으며 지금도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새롭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낡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낡은”이란 표현을 작은따옴표(‘’)안에 넣어서 썼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반어적인 의미와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자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릴 때 재미있게 본 만화영화가 있는데 제목이 <은하철도 999>입니다.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평론을 쓴다고 합시다. 은하철도 999를 타고 주인공 데쓰로(한국이름은 철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의 몸을 얻기 위해 메텔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가는 먼 우주여행을 떠납니다. 도착하는 행성/별에서는 항상 그 별만의 어떤 사건과 풍경이 전개되고 데쓰로는 그곳에서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기차로 귀환하여, 다시 다른 별을 찾아 떠나곤 하는 이야기이지요. 작품 자체가 허구와 환상으로 비현실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은유, 풍자하는 내용은 인간사회의 어떤 면에 대한 것을 지시하고 있지만 창작방법론은 리얼리즘이 아닙니다. 리얼리즘의 작품 안에서도 낭만적 기법과 은유, 풍자, 상상, 환상 등 여러 방법이 운용 가능하지만 주류 창작방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거나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과 인물의 묘사, 현실을 취사선택하거나 축약, 압축하여 현실의 구체성과 진실성(리얼리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정신/내용을 드러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같은 리얼리즘 작품을 분석하면서 리얼리즘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지요?      


4. 마지막으로 지아장커의 영화를 딱 한 편만 봐야 한다면 독자들에게 어떤 것을 추천해 주고 싶으신지, 또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조금 고민이 됩니다. 저는 이런 질문이 참 어려워요. 때로는 피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 미술전시회에서 제일 인상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제일 아름다운 작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하는 질문 같은 거요. 그래서 저는 이런 질문에 저 나름의 대응방법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한 개를 선택하는 일이 다소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때는 두 개나 세 개를 말하는 거예요. 욕심이 참 많지요.(^^)


추천작 1 <스틸 라이프>




<스틸 라이프>는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중국의 2대 강 가운데 하나인 창장(長江, 양자강揚子江)의 싼샤(三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운명에 처한 지역의 철거 현장을 배경으로 찍은 작품입니다. 창장 협곡의 경치도 빼어나게 아름답고 그곳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주를 담담하게 그리는 기법도 좋습니다. 특히 모든 화면이 매우 회화적(繪畵的)인 점도 유념해볼 대목입니다. 예술적 기법도 빼어나고 내용도 좋습니다. 마치 수몰 지구 도시들의 현장을 유람하는 듯하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의 주제는 매우 강도 높게 비판적이고 폭로적인,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수몰되기 전의 창장 싼샤에 다녀온 사람이 보아도 좋고 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창장 싼샤댐 공사의 현장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강 계곡에 울려 퍼지는 철거 현장의 망치 소리가 주는 묘한 울림의 쓸쓸함 같은 것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영화에서 출발한 지아장커의 영상 작업은 사실 기록의 기법이 출중합니다. 때로는 다큐멘터리 같기도 합니다. 지아장커는 자신이 만든 거의 모든 영화에서 아주 많은 음악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제 책에서는 음악 얘길 거의 못했습니다만, <스틸 라이프>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추천작 2 <해상전기> 




요즘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여행을 가고 있습니다. 가까운 중국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여행지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도시인 상하이는 정말 세계적인 메트로폴리탄 뉴욕이나 도쿄에 뒤지지 않는 세련되고 웅장한 도시입니다. 도시의 규모나 인구의 크기, 역사가 갖고 있는 시간의 두께도 만만치 않은 아주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이 영화는 상하이의 역사에 대한 영화입니다. 기승전결 같은 서사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만일 상하이를 다녀왔다면 내가 본 상하이 라는 한 도시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슬프고 깊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는 영화이며, 중국에 대한 인상적이고 단편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선입견을 바꾸어줄 영화이기도 합니다. 만일 상하이를 아직 안 가 본 사람이라면 꼭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상하이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상하이는 180여년의 근대 중국의 역사를 압축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의 회고를 통해, 마치 도시가 그냥 물질성으로 이뤄진 빌딩들의 집합체로서의 건조한 공간이 아니라, 울고 웃고 숨 쉬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상하이에 꼭 가 보고 싶어질 것입니다. 참고로 영화를 보기 전후에 <ASIA>라는 잡지 2012년 25호(상하이 특집호)를 보신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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