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생각, 마음에 길 내기

by 북드라망 2018. 1. 17.

생각, 마음에 길 내기


季文子 三思而後行 子聞之曰 再斯可矣.

계문자 삼사이후행 자문지왈 재사가의


계문자(季文子)가 세 번 생각한 뒤에야 행하였다. 공자(孔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두 번이면 가하다.”

- 공야장편 19장

=글자 풀이=

=관련 주석=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신중함이라기보다는 우유부단함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것도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더 나은 조건의 일자리가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것저것 다 걸러낸다. 그러다보면 눈만 높아져서 막상 일할 게 없어지고, 맨 처음 그나마 나은 것이라고 생각되던 자리를 찾으려 하면 이미 마감된 직후다. 적당히 생각하고 싶지만 욕심이 앞서다 보면 생각을 걷잡을 길이 없다. 그런 점에서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단지 선택지가 많아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모조리 충족시키고자 하는 탐욕스런 마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유부단함은 단지 생각하는 횟수를 줄이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들로부터 질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노나라 대부 계문자(季文子)가 사신으로서 진(晉)나라로 떠났을 때, 그는 당시 진나라 임금이 위독함을 알고는 그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조문객으로서의 준비까지 철저히 마친 신중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미리 일을 준비하는 계문자의 이런 신중함을 두고 “세 번 생각한 뒤에 행동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공자는 그 말을 듣고 “두 번이면 족하다(再斯可矣)”라고 했다. 주희에 따르면, 두 번 생각했을 때 이미 그 일을 다 살핀 것이고, 세 번 생각했을 때 오히려 사사로운 뜻이 일어났다고 한다. 계문자는 평소 행실이 신중하기 했지만, 오히려 그 신중함 때문에 선공(宣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단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중함 때문에 계문자는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런 계문자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것의 위험성과 민첩하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는 생각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공자의 사유가 드러난다. 자로와 염유가 공자에게 “들으면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까?(聞斯行諸)”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에게 “부모형제가 살아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실천할 수 있는가?”라 답했고, 염유에게는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라 답했다. 공자가 똑같은 질문에 대해 다른 답을 한 것은 자로와 염유의 기질적 차이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로 같은 경우에는 의지가 과하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도록 누른 것이고, 반대로 염유는 마땅히 실천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북돋운 것이다. 그러니까 자로에게 숙고의 과정이 필요했다면, 염유에게는 적극적인 실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생각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항상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즉, 상황에 맞는 적절한 실천을 위해 요구되는 판단력과 결단력이 바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중용(中庸)》에서는 생각과 실천의 관계를 박학(博學)에서부터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의 다섯 단계로 확장해서 얘기한다. 생각을 신중히 하려면(愼思), 우선 넓게 배우고(博學), 질문이 생길 때까지 철저히 이해하는 과정(審問)이 선행돼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지점, 곧 자신의 배움에 의거한 원칙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을 신중히 한다는 것은 무작정 생각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생각의 길을 내는 작업이다. 그 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그동안 내가 답습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질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


행동한 것에 대해 자꾸 불안과 우려를 갖게 되는 까닭은 근거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 이전에 숙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내가 어떤 조건에 있는지,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인지를 조망하기 위해서이다. 배우고, 원칙을 세운 뒤에 실천하는 것. 이 과정을 성실히 밟을 때에만 비로소 탐욕에 휘둘리지 않고 용기 있게 실천할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생긴다.


그동안 난 무조건 생각만 하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의 길을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이 분명하지 않을진대 어떻게 실천이 적절할 수 있겠는가? '생각 사(思)'를 파자(破字)하면, 밭 전(田)과 마음 심(心)으로 나뉜다. 마음을 밭처럼 잘 다듬고 가꾸는 것이 생각인 것이다. 그렇다. 생각을 신중히 한다는 것은 곧 황무지 같은 마음에 밭을 만드는 일이다. 앞으로 난 지금껏 내가 경험했던 일들보다 더 많은 일들을 겪고, 더 복잡한 상황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 앞서 내가 해야 할 것은 거센 비바람에도 꿋꿋이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고 닦는 법, 즉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글 :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