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도하라
子疾病 子路請禱.
자질병 자로청도
子曰 有諸.
자왈 유저
子路對曰 有之 誄曰 禱爾于上下神祇.
자로대왈 유지 뢰왈 도이우 상하신기
子曰 丘之禱久矣.
자왈 구지도구의
선생님께서 병이 나시자 자로가 기도를 하겠다고 청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적이 있었느냐?”
자로가 대답하였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문에, ‘천지신명께 기도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기도한 지 오래다.” - 〈술이(述而)〉편 34장
=글자 풀이=
=관련 주석=
이번 가을에 금오산을 갔었다. 정상 부근에 약사암이란 절이 있는데, 산세와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런데 약사암에 ‘수능 대박 기원’이라는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다. 알고 보니 수능 즈음에 많이들 기도하러 오는 명소라고 한다. 그걸 보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르기 힘든 이곳까지 오는 정성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런다고 효과가 있을까? 물론 운도 따라줘야 하지만, 시험의 성적을 결정하는 건 갸륵한 기도가 아니라 시험을 보는 학생의 실력이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머리가 비상해지거나 성적이 비약적으로 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서일 것이다. 수능뿐만 아니라 위독한 병을 치료하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요행을 바랄 때 사람들은 온갖 신들을 찾아가 기도를 한다. 좀처럼 병이 낫지 않는 스승을 위해 자로가 기도를 청한 것도 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기도라면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자로를 말렸다. 대체 공자의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는 삶에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만, 정작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일상을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우리의 기도는 평소 내가 했던 것들 혹은 해야 할 것들과 무관하게 결과만 좋길 바라는 욕심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나 욕심이란 기본적으로 여기 있지 않은 것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혹여 일이 잘 풀린다 해도 그건 요행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로의 기도를 말린 공자의 말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을 요행에 맡겨둘 셈이니?”
공자도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자신의 욕심이나 기대가 실현되길 바라는 행위가 아니었다. 주희에 따르면, 공자는 평소의 행동이 신명(神命)에 합치됐기 때문에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신(神)이란 세상에 일어나는 조화 그 자체인데, 인간은 이 조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다. 또 명(命)이란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만물이 자라고, 가을에 과실을 맺고, 겨울에 잎이 지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그저 자연의 운행에 따라, 그 조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대체로 우리의 기대와 어긋난다. 문 밖을 나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닥친 이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심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 따라서 ‘신명에 합치됐다’는 것은 주어진 삶이 어떠하든 그 조건 안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공자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구별된다. 우린 기도를 하면서 어떤 초월자가 내 바람을 들어주길 갈망한다. 즉, 우리의 기도에는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욕(私欲)이 깔려 있다. 이는 자연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한 생각이다. 반면에 공자의 기도는 어떠한가? 공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뿐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공자는 뛰어난 인격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쓰이지도 못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4년을 떠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에 기대를 투영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는 끝내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떤 후회나 원망도 없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기도는 인생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게끔 마음을 단속하는 일상의 공부 자체가 아니었을까?
공자가 자로의 기도를 만류한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자. 자로는 위독한 스승님의 병이 완치되어 예전처럼 자신과 함께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건 필시 이대로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과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의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는 말은 자신은 그동안 할 수 있는 바를 해왔을 뿐 항상 그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하늘이었다는 뜻이다. 그 말을 전함으로써 공자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운명이었듯이 삶을 떠나는 것 역시 하늘의 뜻이라며, 초조해하는 자로를 위로하는 동시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까지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돌아와서 생각해본다. 난 내 할 일을 다할 뿐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했던가? 솔직히 말하면,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노력한 것 이상으로 결과가 좋길 바라기도 한다. 그렇다. 지금 나에겐 아직 실천보다는 기대가 앞서 있다. 이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한, 앞으로 닥칠 무수한 일들 앞에서 난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도 난 공자의 기도를 되새긴다.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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