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어떻게 바뀔까?
❚ 바뀌지 않는 나
최근 여자 친구에게 다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여자 친구 왈 “왜 그렇게 잘 삐지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연구실 사람들에게 지적받았던 말을 다시 들었던 것이다. 여자 친구에게는 내가 그런 성격이란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 말을 듣게 된 과정에 별다를 것(?)은 없었다. 내가 하자는 대로 안 할 때 그냥 무표정으로 넘어간 다음에 뚱 하고 말을 안 하는 것이다. 나중에 뒤늦게야 상대가 나한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안다. 평소의 쪼잔한 성품이 여지없이 여자 친구에게도 드러났다. 관계를 맺는 방식이 패턴화 되어있고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나름 공부한다고 멋있는 척 폼을 잡다가 이런 꼴을 보이다니. 역시 잘난 척은 하는 게 아니야. 아~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바뀌나 봐.’ 이렇게 자책 아닌 자책을 하고 있는데 문득 여러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안 바뀌는 것 맞는데 대체 뭐가 안 바뀐다는 거지? 음... 내가 잘 삐지는 게 안 바뀐다는 것이지. 근데 나의 이 쪼잔한 성품은 뭐가 안 바뀌기 때문인 거지? ........ 몸인가? 마음? ‘나는 왜 바뀌지 않을까’라고 물을 때 대체 무엇이 안 바뀐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그런 질문을 안고 있을 때 『동의보감』을 살펴보았고 운 좋게 고민을 해결할 단서를 만났다.
『동의보감』은 내가 ‘무엇이 안 바뀌는 것일까?’ 물을 때, ‘몸이 안 바뀌는 거야’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동의보감』이 말하는 몸은 몸/마음의 이분법으로 보는 몸이 아니다. ‘유형과 무형’ 혹은 ‘물질과 정신’을 모두 포함한 몸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몸은 무엇일까? 이때 『동의보감』은 정(精), 기(氣), 신(神)이라는 세 글자를 가져온다.
❚ 몸의 바탕이 되는 정(精)과 기(氣)
오늘 고른 『동의보감』 구절의 제목은 ‘정기신을 보양한다[保養精氣神]’이다. 이 구절은 「내경편」 <신형(身形)>에 들어있다. <신형>은 주로 몸의 형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바로 여기에 정기신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몸을 설명하는 데 있어 정기신(精氣神)을 빼놓을 수 없다는 배치로 읽힌다.
구절을 살펴보기에 앞서 간단히 정기신에 대한 스케치를 해보자. 정(精)은 정력이 있다 없다할 때 말하는 정(精), 기(氣)는 기운이 있다 없다 할 때 말하는 기(氣), 신(神)은 정신이 있다 없다 할 때 신(神)을 떠올려보면 된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의 윤곽을 그려보기엔 좋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구절을 살펴보자.
정(精)은 몸의 근본이고,
기(氣)는 신(神)의 주인이며,
몸은 신(神)이 깃들어 사는 집이다.
精者身之本, 氣者神之主, 形者神之宅也.
몸이 의탁하는 바는 기(氣)이다.
形之托者氣也.
언뜻 읽으면 뭐지 싶다;; 서로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일단 몸을 가운데 놓고 정기신(精氣神)을 각 꼭지점으로 두는 삼각형을 그려보자. 그리고 각 요소와 몸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정(精)은 몸의 근본[本]이고, 기(氣)는 몸이 의탁[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정(精)이 몸의 근본이라 함은 몸의 뿌리가 정(精)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정(精)이 몸에게 양분을 공급 해준다는 뜻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또 몸은 기(氣)에 자신을 의탁한다고 한다. 기(氣)가 몸을 책임지고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氣)가 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돕는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결국 정(精)은 몸의 바탕이 되는 재료, 기(氣)는 몸을 지탱하는 매개가 된다. 사람은 정(精)을 가지고 몸을 만들고, 기(氣)를 가지고 몸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신(神)은? 신(神)은 몸을 집으로 삼는단다.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집 이야기가 나와 우릴 당혹스럽게 한다. 무슨 얘긴지 좀 더 살펴보자.
❚ 정(精)과 기(氣)를 운용하는 신(神)
사람이 사는 것은 신(神)의 작용이다
人之生者神也
몸은 신(神)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形者須神而立焉.
사람이 사는 건 신(神)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정신을 떠올려보자. 정신을 빼놓고 인간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인간이 육체만 있고 정신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살겠다는, 살아보겠다는 정신의 작용이 있어야 몸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을 『동의보감』에서는 신(神)이라 이름 한다. 신(神)은 몸의 바탕이 되는 정(精)과 기(氣)를 운용한다. 결국 신(神)은 물질적 토대의 지휘자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신(神)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적 요소인 것일까? 그건 아니다. 몸은 신(神)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지만, 신(神) 또한 머물 곳이 있어야 한다고 『동의보감』은 말한다.
몸은 신(神)이 머무는 집이 된다.
形者神之宅也
몸을 수양하여 신(神)을 기르지 않는다면
기(氣)가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가고 혼은 날아가게 된다.
修身以養神則不免於氣 散歸空 遊魂爲變.
이렇게 생각해보자. 집주인이 집을 잘 관리한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어째야 하는가? 집이 잘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몸을 지휘하는 신(神)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몸이 잘 움직이는 게 되어야 한다. 신(神)의 상태여부는 몸의 작동에 달려 있다. 신(神)의 작용으로 몸이 구성·유지되지만 몸이 구성·유지되어야지 신(神)의 작용이란 것도 존재한다.
이제 ‘몸은 신(神)이 깃들어 사는 집이다.’라고 말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집을 만들고 다른 곳에 머문다면 그것은 자기 집이 아니다. 그곳에 터를 잡아야 주인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神)은 몸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머물러야지만 자신이 주인임을 나타낼 수 있다. 아울러 집의 상태는 집주인에게 영향을 준다. 집이 산만하면 집주인의 상태도 산만해질 것이다. 몸이 기반을 잘 마련해주어야지 신(神)도 자신의 활동을 편안히 해나갈 수 있다. 몸을 수양하지 않으면 신(神)이 길러지지 않고 소멸해버린다. 결국 신(神)은 초월적 요소가 아니라 몸에 의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神)은 몸과 관계 지어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유지해간다. 이렇게 보면 몸과 신(神)을 집과 집주인의 관계로 비유한 『동의보감』의 설명은 꽤나 적절하다.
❚ 정기신(精氣神) 사이의 긴밀한 관계
정리해보자. 사람은 신(神)의 지휘 하에 정(精)으로 몸을 만들고, 기(氣)로 몸을 유지한다. 그리고 신(神)은 몸에 머무름으로써 몸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이것이 정기신(精氣神)의 트라이앵글로 엮어 보는 몸의 풍경이다. 유형과 무형의 세 요소 사이에서 계속적인 운동성을 가진 것이 바로 몸이다. 살아있는 한 몸 안의 정기신(精氣神)의 움직임은 계속된다. 신(神)이 계획을 내어 정(精)이 재료를 공급하고 기(氣)가 재료들을 나르고 다시 신(神)이 에너지를 받는다. 이 순환 속에서 정기신(精氣神) 세 요소들 간의 연결은 매우 긴밀할 것이다.
신(神)은 기(氣)를 먹는다.
神能服氣
기(氣)가 맑으면 신(神)도 상쾌해지고
몸이 피로하면 기(氣)도 흐려진다.
氣淸則神爽 形勞則氣濁
기(氣)는 신(神)에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한다. 신(神)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기(氣)가 맑으면 자연히 신(神)도 상쾌해진다. 만약 기(氣)가 탁하면 신(神)도 흐리멍덩해질 것이다. 아울러 신(神)을 과도하게 쓸 경우에는? 자연히 기(氣)가 부족해질 것이다. 또 기(氣)가 심하게 소모되면 기(氣)에 양분을 대고 있는 정(精)이 부족해진다. 그러다 정(精)이 완전히 부족해지면 고갈[渴]되고 기(氣)를 너무 심하게 쓰면 끊어지고[切] 신(神)을 아주 크게 쓰면 쉬어버린다[歇]. 정(精)이 고갈되면 전신에 영양 공급이 안 될 것이다. 기(氣)가 끊어지면 정(精)과 신(神)의 연결은 끊어질 것이다. 신(神)이 푹 쉬어버린다면 모든 시스템이 멈춰버릴 것이다. 어느 하나가 삐끗하면 연쇄작용이 벌어져 몸의 전체적인 문제가 된다. 사소한 변수가 큰 화를 만들 수 있다. 균형이 무너지면 모든 곳에서 문제가 발생할 터이므로 정기신(精氣神)이라는 시스템의 관성은 당연히 완고할 것이다.
어느 하나가 삐끗하면 연쇄작용이 벌어져 몸의 전체적인 문제가 된다.
❚ 변화의 첫걸음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무엇이 안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몸이 안 바뀐다’라고 말했다. ‘몸이 어떻게 안 바뀌는가?’라고 재차 물을 때는 정기신(精氣神)으로 몸의 구성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런데 정기신(精氣神)의 작용을 살펴보면 나의 문제를 바꾸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이 바뀌려면 총체적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신(神)이 달라져야 하고 정기(精氣)가 호응해야 한다.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거다. 이 긴밀한 연결망들을 못 보고 안 바뀐다고 마냥 불평하는 것은 떼쓰기에 불과하다. 아울러 정확한 진단 없는 섣부른 변화의 시도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정밀한 기계에 무턱대고 손을 갖다 대는’ 위험천만한 행위일 수 있다.
최근 남한테나 나한테나 이것저것 진단과 처방을 내려 보고 있다. 그리고 남한테나 나한테나 안 바뀌는 것에 조바심을 낸다. 『동의보감』에서 마음을 수양해서 병을 치료해야한다는 구절을 읽을 때, 욕심을 버려야겠다 생각은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안 되는 것에서 뭔가 공허해졌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내 몸은 어떤 상태인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삐지는 것이 신(神)이 정기(精氣)를 제어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 정(精)이 바뀔 동력을 못 냈을 수도, 기(氣)가 허했을 수도 있다. 오직 추측만 있을 뿐, 확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데 바뀌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내 상태를 아직 정확히 모르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이제야 정기신(精氣神)과 몸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게 된 나를 보라. 조바심을 내기 전에 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정화스님이 말씀하셨다. ‘공부한다는 것은 자기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의아했다. “뭐라고? 바뀌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말은 ‘우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니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야 알았다. 정화스님의 말씀은 ‘다양한 맥락에서 나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는 작업을 하라’는 뜻임을. 『동의보감』을 공부하는 것도 멋진 몸으로 변신하는 거라기보다는 매번 자기 몸을 알아채는 연습을 하는 것뿐일 듯싶다. 하지만 그것만이 변화의 한 발을 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글_박장순(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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