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애가 재즈의 역사 - 『마일즈 데이비스』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평탄하거나 또는 굴곡지거나, 어쨌든 매끈한 직선으로 이어진 듯 보이는 흐름 속에서 불쑥 솟은 봉우리들이 있다. 저건 또 뭔가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천재’가 있다.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히틀러가 ‘천재’라는 말을 전유한 이래로, 모든 인간은 선험적인 차원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이념이 일반화된 이래로 ‘천재’라는 말은 어쩐지 불편한 단어가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천재’가 있다는 걸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길을 걸으며, 혹은 버스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떤 곡을 듣고서 이게 누구 연주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는 곡, 좋아하는 곡이어서 이미 여러번 들어본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곡이 아니라면 곡이 끝날 때까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처음 듣는 곡인데도, 단번에 누가 연주했는지 알 수 있는 곡들이 있다. 예를들면, 글렌 굴드가 연주한 피아노곡들,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솔로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한번 들으면 마치 몸에 새겨진 듯 남게 되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트럼펫 사운드가 그렇다.
어릴 때, 닥치는 대로, 그러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던 음악잡지 맨 끝, 아마도 ‘특별기고’ 쯤 되는 항목에 실린, <Bitches Brew> 앨범의 리뷰(정확히는 칭송)를 읽은 적이 있었다. 들어본 적도 없으니 음악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는데, 다만 지금도 기억나는 한 구절이 있다. ‘시작도 리듬, 끝도 리듬이다’는 말이다. 그때는 그저 ‘이야 이거 멋진데!’하는 기분일 따름이었지만, 갈수록 저 말이 가진 의미가 커져갔다. 아마, 그때 그 말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지나가는 BGM 정도로만 재즈를 듣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반들을 들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특히 <kind of blue> 앨범의) 그 느린 전개 속에서도 마치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리듬감이었다. 아무리 느려져도, 아무리 빨라져도 그 리듬은 흔들리지 않는다. 감상자는 거기에 기대서 곡의 끝까지 갈 수 있다.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제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지만, 그래서 모두가 그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떤 익숙함이랄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겠다는 필연성이랄지 그런 것을 작품 안에 마련해 둔다. 천재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또 한가지 ‘마일즈 데이비스’의 대단한 점은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오랜 기간 동안 거의 매번 새로워졌다는 점이다. 20세기, 중요한 재즈의 현장 대부분에서 그를 찾을 수 있다. 40년대의 민턴즈 플레이어 하우스, 쿨의 시작을 알리는 음반 <The Birth of Cool>의 발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집어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Bitches Brew> 앨범의 발매까지……. 어쩌면 ‘현장’에 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역사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그러니까 『마일즈 데이비스』를 읽으면, 대략 20세기 재즈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알 수 있다. 더불어, 재즈의 문화적 어법도 익힐 수 있다. 아주 디테일하게 어떤 식으로 밴드의 맴버를 모았는지, 녹음은 또 어떻게 했는지, 연습은 어떻게 했는지 등등까지. 말하자면 ‘재즈씬’ 자체를 아우른다고 할까? 물론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악을 듣는 일이지만, 지구 반대쪽에서 저편의 음악을 ‘잘’ 듣기 위해서는 그 바닥의 상황을 개략적으로나마 파악해 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책을 읽으려고 글자를 배우는 것과 같은 행위다.
(재즈광) 무라카미 하루키나, (마찬가지로 재즈광이었던) 에릭 홉스봄 덕분에 재즈에 관심이 생겼다면, 그래서 좀 들어볼까 싶다면, 그리하여 바로 음원 사이트의 ‘재즈’ 코너로 갔다면, 당연히 뭘 들어야 하지 싶었을텐데, 고민하지 말고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세상에, 나는 천재의 생애를 이렇게나 자세히 알 수 있고, 천재의 연주를 단돈 만 얼마에 무한정 들을 수 있는 이 시대가 가끔 고맙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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