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백수 지성들에게 배우는 백수 노하우!
"더 적극적으로 놀아야 되지 않을까"
"백수의 가장 큰 장점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경쟁률은 약 2천대 1이었다고 합니다. (헉!) 지금도 그때처럼 백수가 참 많았겠다 싶지요. 그렇지만 언제까지 백수라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순 없지요. 백수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입니까? 시간이 많다는 것! 그리고 강제하는 일 없이 자유롭다는 사실~!
여기 네 명의 선비, 농암 김창협, 성호 이익, 혜환 이용휴, 담헌 홍대용, 일명 B4의 공통점은 18세기의 선비들이라는 점과 놀 때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 가장 최고의 문장을 쓰고,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뤄냈다는 사실!! 그 발견이 책으로 이어져 『18세기 조선의 백수 지성 탐사』가 출간되었다고나 할까요^^ (흠흠)
책을 만나기 전, 이 짧은 설명만으로는 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시다~ 싶으신 독자님들을 위해, 직접 이 책의 저자 길진숙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12월의 추운 겨울,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이 있는 깨봉빌딩에서 만나 뵙고 궁금하던 것들을 여쭈어 보았지요. 이 선비들을 백수라고 명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특별히 18세기의 이 선비들에게 집중하신 이유는 무엇인지, 이 선비들이 백수일 때 최고의 전성기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와 그 원동력은 무엇인지 등등. 자세한 답변은 아래 영상을 통해 확인해주세요. 책과 만나기 전,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인터뷰 전문을 보시려면 아래 더보기를 눌러주세요☆
1. ‘백수 지성’이라는 말이 생소합니다. 백수는 빈둥거림이나 무능의 대명사이기도 한데, 지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키는 포의나 처사와 같은 고상한 말도 있는데, ‘백수 선비’라고 명명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처음에 18세기 지식인들에게 백수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너무 경망스러운 말이 아닐까도 생각을 했는데, 이분들은 사실 벼슬하지 않는 자유인이거든요. 우리가 포의, 처사 혹은 산림처사 혹은 은사라고 이름붙이는 선비들은 지금 현재의 정치현실 이것과 굉장히 대결해서 자기들은 고결한 순수성을 지키겠다, 그 현실 정치가 혼란하고 혼탁하다면 여기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어떤 도덕적 순수성 같은 것들을 가지면서 ‘은거’라는 말을 하고 ‘처사’라는 말을 쓰거든요. 그런데 18세기 지식인들, 제가 살펴본 이 지식인들(농암 김창협·성호 이익·혜환 이용휴·담헌 홍대용)한테는 그런 점은 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사’라고 하면, 이들을 규정하기에는 좀 약한 개념이기도 하고 조금 시대적으로 다른 개념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요즘에는 정규직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람들, 혹은 조직에 들어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통 우리가 백수라고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아, 그래,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 그러니까 백수다. 백수에는 무위도식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저는 백수에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수동적으로 ‘일자리를 못 찾아서 노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일자리를 ‘일부러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실은 무위도식하는 건달, 한량 이런 의미도 붙어 있잖아요. 예전에는 이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놀고’ 있는 이 시절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백수라는 의미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좀 들었던 거예요. 농암, 성호, 혜환, 담헌 이들은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현실정치와 대결하겠다 그래서 이 현실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나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순수한 의도, 타협하지 않는 고결한 정신, 이런 것들을 지키겠다라고 하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정치 자체가 부자유스럽다는 것, 그리고 정치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양생을 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혹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벼슬하지 않고 노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하는 것을 (부득이하든 적극적이든)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저는 백수라고 하는 말이 이들에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은사’와 같은 말에는 뭔가 당위적이고 권위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런 것을 내려놓고, 일을 하지 않는 백수라는 존재적인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백수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백수 선비라고 한번 명명을 해봤습니다.
2. 그렇다면 백수 지성, 혹은 백수 선비들이 꼭 18세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요, 특별히 18세기에 주목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이전 선비들한테 백수 선비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아요. 조선 전기나 18세기나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에나 선비들, 사(士)라고 하는 계급은 어차피 관직에 나아가면 ‘대부’고 물러나면 사실은 ‘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사대부 자체가 우리 식으로 얘기한다면 비정규직이에요. 이들은 벼슬길에 나가면 관직을 하는 거고 물러나면 당연히 자신들이 물러나서 독서를 하든 자연을 유람하든 이런 존재로 살았는데 그래도 18세기 이전 시대의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에게는 현실정치에 대한 대결 의지, 이런 것이 훨씬 더 강했던 것 같아요. 나는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데 대결하기 위해서, 이 현실정치가 얼마나 지금 부조리한가 그리고 혼탁한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나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라고 하는 의식 속에서 살았던 거죠.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면 굉장히 선비도 많아지는 시대에요. 그리고 이 사람들 중에는 사실 벼슬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기에 충분해서 노는 선비로 사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럼 먹고살 수 있는데도 그걸 백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놀아도 되는 거 아니야? 이런 고민을 저도 했는데 확실한 것은 이전 시대와 달리 현실정치에 대한 대결 의식 같은 것은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거죠.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이들이 선비임에도 ‘노니까’(관직을 하지 않으니까) 서민하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거예요. 심지어 서민은 일을 하는데, 나는 그냥 책을 읽거나 자연을 유람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한가하게 지내거나. 그렇다면 나는 유한 계층에 불과한 게 아닐까, 나와 서민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고민이 생겨난 시기가 18세기였던 것 같고아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 네 사람들은 대부분 그 갈림길에서 ‘사’인가 내가, 아니면 ‘사’로서 존재성이 없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면, 혹은 ‘사’로서 존재 가치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나는 ‘사농공상’(士農工商)할 때의 농인, 상인, 공인하고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럴 때 나는 일하지 않는 자, 일하는 자, 이 외에 어떤 것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한 거죠. 관직에 나아가지 않더라도, 내가 ‘사’여야 한다면, 혹은 그냥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무위도식을 뛰어 넘어서 그런 어떤 부정적 가치, 이걸 상쇄할 수 있는 어떤 삶의 양상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무엇일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 좀 많이 따져봤던 사람들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저는 그래서 이 18세기에 주목하고 있어요.
3. 이 책에서는 농암 김창협, 성호 이익, 혜환 이용휴, 담헌 홍대용 이렇게 4명의 백수 선비를 다루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들의 백수 시절이 이들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였고, 최고의 전성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네 분의 지식인들은 사실 놀았을 때 가장 최고의 문장을 썼고, 가장 최고의 학문적 수준에 도달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농암 김창협도 관직생활을 마흔네 살까지 했었지만 그때까지 이렇다 할 어떤 글쓰기나 학문적인 철학적 사유를 했던 것 같지는 않구요, 일단은 관직을 그만 두면서, 그러니까 중년 이후죠, 중년 이후에 사실은 시골에서 은거를 할 때 학문에 대해서 혹은 주자학에 대해서도 다른 주자학에 대한 생각에 도달을 하고 글쓰기에 대해서도 흉내를 내는 글쓰기와는 다른 글쓰기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고민을 했거든요. 그리고 성호 이익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성호 이익은 평생 백수였으니까 그 이전이 어땠다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성호 이익이 놀지 않았다면 가난한 농민, 혹은 나보다 신분이 낮은 그 비천한 백성들의 어떤 삶, 낮은 백성들의 삶 이런 것들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그랬을 때 그런 것이 주어질 수 있는 기회는 이 사람이 백수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던 것 같아요. 성호 이익 선생은 주자학의 도는 너무 저 높이 있어서 사실 우리 일상 생활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일용에 종사하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보지 않았다면 주자학의 도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는 못 햇을 거예요. 백수였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이용휴는 남인인데, 굉장히 특이하게도 남인 중에서도 경세학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런 문장가 중에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혜환 이용휴도 마찬가지로 성호 이익처럼 사실은 당쟁의 여파 때문에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평생 백수예요. 그래서 이 사람도 사실은 제가 혜환 이용휴가 관직에 나갔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혜환 이용휴가 사실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글쓰기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승인하는 어떤 문체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18세기의 관직에 나아갈 선비들이라면 ‘고문’(古文)의 글쓰기를 해야 하는데, 이용휴는 이 고문의 글쓰기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말이 아니라는 것, 남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거든요. 이 사람이 만약에 열심히 시험공부를 해가지고 관직에 나갔다면 아마 그런 자각을 하지는 못했겠죠. 내가 놀면서 선비로서 살아가려면 자기 정당성 같은걸 가지고 있어야 되잖아요. 그 자기 정당성이라는 것은 다른 글쓰기를 씀으로 해서 그걸 확보할 수 있는 거라고 이용휴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놀았기 때문에 사실은 글쓰기의 지평도 다르게 열 수 있었고 그리고 명청 시대에 성행했던 소품문이라고 하는 이 글이, 이 고문의 어떤 격식을 깨트릴 수 있는 글쓰기의 어떤 또 다른 형식임을 볼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소품문의 일종의 개척자가 돼요.
그리고 담헌 홍대용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맘대로 하기 위해서 놀았어요.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한다는 건 뭐냐면, 자기는 과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천체 우주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사실은 다른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그걸 소홀이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기꺼이 이 사람은 사실은 관직을 포기하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과학연구에 매진을 하거든요. 수학연구에도 매진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해가지고 젊은 시절 중년까지 백수로 보냈죠. 그리고 거기서 얻은 덤이 중국 여행, 연행이에요. 사신단에 꼽사리 낀 백수가 아니었으면 청나라를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거든요. 그리고 사행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러 사람들을 길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홍대용을 기억하는 이유가 뭐예요? 국경을 넘어서 친구를 자유롭게 사귀었던 사람. 그리고 천체 우주를 관찰해서 세계를 다시 본 사람이거든요. 중화와 야만, 혹은 중화와 오랑캐, 문명과 야만이라고 하는 이 경계가 늘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사실을 천제 물리학에 의해서 깰 수 있었던 공부를 했던 거예요, 홍대용은. 그런데 이 사람이 자발적인 백수로 살지 않았다면 사실은 불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정말로 자유롭게, 여유롭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되고 그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에 그만큼 도달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이들이 다 백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아마도 얽매여 살았다면 그게 불가능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18세기의 이덕무나 박제가 같은 사람도 젊은 시절에는 이들이 서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실 백수로 살았어요, 그때 이들이 새로운 어떤 문체를 주장하면서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파격, 이런 것들을 강조하고 그런 글쓰기를 열심히 실험을 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정조임금이 규장각에 어떤 검서관으로 이들을 다 취직을 시켰을 때 그 이후에는 사실 관직에 매여 가지고 그런 어떤 파격과 그런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백수라는 이 조건이 상당히 가난과 소박한 삶 이런 것들을 감내하고 살아야 되긴 하지만 대신 진짜로 하고 싶었던 어떤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는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백수의 삶은 이들에 있어서는 어찌 보면 축복이었고 그래서 결국은 이 백수는 이들을 다른 인생을 살게 하는 하나의 원천이 됐던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4. 책을 보면 백수 선비 4인방이 이뤄낸 성취보다 이들이 자신이 백수라는 데 대해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 놀랍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백수를 통틀어서 현대인들이 모두 불안해하면서 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요.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했을까요?
사대부라고 하는 게 본질적으로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관직에 나아갔다가 물러났다 하니까, 놀았다가 일했다가 그런 거잖아요. 또 사실 계급적으로 이들이 일정 정도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먹고살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 불안하지 않았던 요인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는 먹고살 게 있으면 백수로 산다는 게 안 불안할까요? 그건 또 아니잖아요. 역으로 생각해 보면 저는 안 그렇거든요. 저한테 만약 얼마간에 돈이 있어서 평생 놀아라 그러면 저는 못 놀 것 같아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라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마음껏 하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물론 이들은 ‘사’(士)라고 하는 계급 안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렇게 여러 가지를 고민을 해봐도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가 저도 궁금했어요. 당시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은거라고 하는 삶은 굉장히 어렵다는 걸 이 사람들도 인식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가난하게 살 것을 각오해야 되고, 보통 우리가 주류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즐거움들 있잖아요. 이런 즐거움들을 사실 포기해야 된다는 것도 알았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함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있었던 그 다른 생활의 여유와 자유로움 이런 것들은 이거보다 훨씬 값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시대 분위기 자체가 사실은 가난한 선비를 고상하게 여기고 가난하게 사는 그런 선비들, 뜻이 있는 선비들을 높이 보는 이런 시대 분위기 때문에도 그런 불안은 조금 덜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우리는 뜻이 아무리 높아도 돈을 안 벌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 자체를 조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체도 그것 때문에 감히 논다고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때 선비들도 사실은 마음이 이중적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은거하면서 고상하게 뜻을 갖는 걸 사람들이 칭송하지만 한편으로 또 무위도식 한다는 시선이 없을 수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내세우는 가치는 뭐였냐면 명예도 중요한 게 아니고 돈도 중요한 게 아니고 직위도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로 내 뜻대로 제대로 사는 것, 그것이 이들한테는 가장 중요했거든요.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가치는 자기를 지키는 거였기 때문에 이들은 사실은 위험하게 정치현실에 나서기 보다는 정말 소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그 소박한 삶, 이것이 훨씬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백수적인 어떤 삶에서 어떤 결핍, 이런 것들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건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서 진짜로 시간을 그냥 막 죽이잖아요. 킬링 타임으로 살고 굉장히 소모적으로 살거든요. 그런데 이들은 백수로 살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결핍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런 자신감, 그런 떳떳함,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5.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오는 4명의 백수 선비 중 선생님이 (백수가 되셨을 때) 멘토로 삼고 싶은 사람은 누구이며, 왜 그런지 이유도 말씀해 주셔요.
아, 실은 저도 백수가 되는 걸 되게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제가 공부를 하면서 대학원, 국문과에서 공부를 하고, 사실 고전문학을 전공해서 대학원 박사학위를 받는다 하더라도 사실 취직되는 사람은 대부분 한정적이거든요, 숫자가. 늘상 마음으로 불안해했던 건 뭐냐면 내가 그렇게 취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먹고살고 어떻게 공부를 하지였어요. 그런 마음이 되게 갈등이 심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백수에 대해서 긍정적일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 공포가 저에게는 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백수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상상만 해도 예전에는 굉장히 겁이 났었거든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취직이 안됐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공포를 느낀다 해도 그게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별로 또 그렇게 공포스럽지 않더라구요. 그래, 그럼 내가 노는 사람으로, (저는 늘 백수라고 안 하고 프리랜서라고 사람들한테 말했는데^^) 프리랜서로 살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것들이 저한테 어느 순간 닥친 거예요. 그때 제가 또 처음으로 확인한 건 뭐였냐면 저도 공부를 포기할 순 없었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취직은 안 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는 것, 이것은 굉장히 좀더 수치스럽더라고요. 그러니까 정규직으로, 왜 너는 돈을 못 벌어라고 말하는 주변의 어르신들이 너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오히려 저한테 물었을 때 ‘그러면 논다고 너 공부를 그냥 포기할 거야’ 이렇게 저 자신한테 묻는 그 질문이 오히려 더 수치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면 그래, 내가 조금 벌면서, 무엇을 해도 돈은, 먹고살 수는 있겠지라고 하는 자신감이 어느 순간 솟는 거예요. 아, 그러면 내가 뭐든 해서 먹고 살 수 있다면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게 제일 최우선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신감이 붙고, 공부를 하면서 공포가 사라졌거든요, 저한테 그걸 보여주는 네 분(농암, 성호, 혜환, 담헌)의 삶이 사실 다 그런데, 한 분만 꼽자면 저한테는 담헌 홍대용의 삶이에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집이 부자였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짜 당당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때문에 아예 관직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것에 대한 미련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애초에. 저는 그거는 정말 놀랍거든요. 저는 그럴 수 없는 정말 속물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로 닥쳤을 때 그때야 비로소 저를 볼 수가 있었던 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 사실 이런 것들에 저도 연연했었거든요. 40대까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게 갖춰지지 않으면 나는 조금 소외, 약간 비주류로 밀려나는 게 아닐까 라는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겁을 냈었던 것 같은데 막상 그렇게 오니까, 뭐 애초에 내가 국문학을 했을 때 뭘 그렇게 대단한 어떤 삶의 안정 이런 걸 바랐다고 내가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아예 가지지 않았던 홍대용은 그래서 너무나 부러운 거예요. 어떻게 이 사람은 이런 경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물론 그렇게 걸어갔던, 앞서의 김창협과 같은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막상 그걸 선택했을 때는 분명히 홍대용은 무언가 고민을 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들을 백수라고 이야기할 때 이 사람들도 고민했었을 거라는 거예요. 백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그냥 백수가 된 사람은 없었을 거라는 것. 근데 아마 홍대용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기꺼이 뛰어 든 것 같거든요. 그리고서 진짜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거예요. 정말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누린 사람을 보기가 드물거든요. 과학 공부한다고 다 했고, 정말 혼천의 만든다고 천체 그거 관찰하기 위해서 혼천의 열심히 만들고, 또 수학 공부 열심히 하고. 여행가서는 이 사람은 사실은 그냥 백수 지식인이니까 청나라에 그냥 구경을 가고 싶었던 거예요. 자기가 사신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구경갈 때는 중국어가 필요하구나라고 해가지고 가기 전에 중국어를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해서 여행을 가서 거기 중국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냥 산수자연, 좋은, 멋진 산수자연만 구경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가서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정말 청나라를 속속들이 느껴보고 싶다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미리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디서나 정말 충만하게 산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홍대용이 가장 부러워요.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유의 이분법, 중심과 비주류가 있고, 문명과 야만이 있고, 그래서 여기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장벽이 있다는 데 대해 그런 장벽은 애초에 없는 것이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 문명과 야만이 늘 고정된 것도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언제든지 삶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거라는 것, 이걸 중국에 가서 깨치고 온 사람이거든요. 과학을 공부함으로 해서 그리고 여행을 함으로 해서 완전히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를 확 바꾸어버린 사람이에요. 자유롭게 삶으로 해서 자기의 삶도 바꿀 수 있었고 세계에 대한 어떤 상(相)이나 이미지를 확 바꿀 수 있었던 이런 통찰력,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너무나 부러워요. 놀아서 그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놀아야 되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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