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한 땐 말보다 행동!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대인배로 살기(3)
이야기 둘. 기원전 480년, 역시 춘추시대 중국. 공자의 제자 자로는 위(衛)나라 집정대부 공회의 읍재였다. 위나라 군주는 출공(出公)이었는데, 이 무렵 위나라는 심각한 내부 분열 중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 추방중이었던 출공의 아버지 괴외가 귀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위나라 세자였던 괴외는 계모였던 남자(南子)를 죽이려던 계획이 실패하여 아버지 위령공에 의해 국외 추방(망명)중이었다. 그러던 중 위령공이 사망하면서 위나라의 군주 자리는 손자인 출공(첩)에게 이어졌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 해도 권력을 앞에 두게 되면,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 개인간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괴외(폐세자)를 따르는 세력과 출공을 따르는 세력 사이의 권력 싸움이기 때문이다. 결국 괴외는 국내외 세력을 모아 권토중래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때 위나라 내부에서 괴외를 도왔던 세력이 자로의 주군 공회였다.(괴외가 자신의 누이이자 공회의 어머니였던 공백료를 앞세워 공회를 붙잡고 협박하여 일을 성사시켰다고도 한다)
자로에게 이 사건은 어찌됐건 형식적으로 명백한 쿠데타였다. 괴외가 아버지이긴 했지만 출공은 할아버지 위령공으로부터 정식으로 군주권을 승계한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로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괴외의 정예부대는 위나라 도성을 장악했고, 출공은 국외로 도주한 상황이었다. 사실 출공의 가신이 아니었던 자로로선 딱히 조처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자로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도성을 향해 달려갔다. 가는 길에 같은 공문의 제자이자 자신이 위나라로 데리고 왔던 후배 자고를 만났다. 자고는 도망쳐 나오는 길이었다. 자고는 자로를 붙잡으며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났으니 일단 몸을 피하고 훗날을 도모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자로는 자고의 손을 뿌리치고 도성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위나라에서 녹(祿)을 먹고있던 관료로서 나라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망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자로는 승리자(?) 괴외를 향해 자신의 주군 공회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반란에 동조하는) 공회를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그는 필요 없는 인간이니 제가 잡아다 죽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자로의 등장과 더욱 예상치 못한 자로의 일갈에 어쩌면 괴외는 매우 놀랐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괴외로서는 응할 수 없는 요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로는 괴외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들이 올라가 있는 대(臺)에 불을 지르려 덤벼들었다. 자로는 자신을 공격하는 괴외의 부하들에게 머리를 맞았고 이때 갓끈이 끊어져 나갔다. 자로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뻗쳐 모자를 찾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지. 군자는 항상 관을 벗지 않는 법이라고…’ 노나라 야인(野人) 건달 출신이었던 자로는 이렇게 군자로서 삶을 마쳤다.
위나라의 쿠데타 소식을 들었을 때, 노나라에 있던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자고는 돌아올 것이고, 자로는 죽겠구나. 결국 자로의 시신은 오랜 시간이 걸려 공자 문하로 송환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따르면 자로의 시신은 소금에 절여진 참혹한 상태였는데,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공자는 집안에 있던 모든 소금에 절인 음식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자로의 죽음 이후 공문에서는 소금에 절인 음식을 먹지 않게 되었다.
자로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평소의 자로처럼, 무모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군자란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누구보다도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을 테니깐. 이미 출공조차 도망친 형세가 아니었던가. 그런 상황에서 반란군(괴외)이 장악한 도성 안으로 굳이 뛰어들어야 했을까. 경솔+직진 자로? 그 순간 자로는 혹시 ‘환난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어야 군자’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던(따르고 실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힘으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쯤은 자로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마지막 순간까지 자로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당장의 안전함과 타협하라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소인의 목소리(소인-됨)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군자는 모두가 길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한 발을 내딛는다. 그곳이 길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평소 뜻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자로의 죽음은 군자의 삶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최저의 경우는 정반대다. 충직한 가신이자 동곽녀의 오라비였던 동곽언이 자신들과 최저 가문은 모두 제나라 강씨의 후예이기 때문에 동성 결혼은 안된다고 반대했을 때 그의 충언과 걱정을 모른체 했다. 진문자가 시초점 점괘를 풀어 동곽녀와의 혼인이 흉하다고 경고했을 때에도 최저는 자기 입맛에 맞게 억지로 뜻을 구부렸다. 동곽녀가 자신의 아들로 최저의 권력을 승계하도록 함으로써 본처 소생의 두 아들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남겼고, 끝내 정적 경봉에게 빌미를 주어 몰락했다. 그러고 보면 소인에게는 모든 게 길처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짓도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것도 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최저의 소인됨이 어디에 기인했는지 알겠다.
이렇게 보면 곤괘 육삼효가 주는 메시지가 한결 엄중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론 분명해 보인다. 한 마디로 그것은 흉한 때일수록 소인에겐 출구가 없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얼핏 들으면, 이 말은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선 말세일수록 소인들이 득세하는 것 아닌가, 권력에 아부하고 사사롭게 축재한 인물들이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는가…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잠깐의 동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 더 길고 깊은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결국 크고 곧은 방향이 바뀌거나 멈추거나 꺾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백 번 양보해서 ‘소인들의 시대’에 기회를 얻고 승승장구하게 된다고 해보자.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 때문에 ‘성공(?)한 소인’들은 더욱더 자신들의 소인됨을 돌이키거나 살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된다는, 스스로 최악의 곤궁한 상황에 놓였을 뿐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소인의 길 위에 선 채로는 결국 구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인으로 살게 되면 이름이 치욕스러워질 뿐 아니라, 몸도 위태로워진다. 이쯤만 해도 엄청난 경고라는 걸 알겠다. <주역> 대표 흉괘라는 말이 빈 말은 아닌 듯도 하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 군자 소인 문제를 다루는 핵심이 있다. 곤의 때에 소인에겐 출구가 없고, 이름은 욕되고, 몸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 다 맞고 옳다. 그런데 누가 소인인가. 누가 소인이 되고 싶어 소인이 되는 걸까. 누군들 군자로 이 곤경의 때를 대처하고 싶지 않을까.
군자(혹은 대인)란 누구인가. 공자에 따르면, 곤궁할 때 자신을 지키는 이가 군자다. 소인은 누구인가. 곤궁해지면 참람해지는 이가 소인이다. 그런가 하면 곤의 때에 소인은 군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군자의 길을 방해하는 이들이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군자와 소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군자의 길을 막는 이가 소인이다. 한 가지 더! 소인이니 군자니 하는 것은 내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다. 곤괘 육삼효를 다시 보자. 아무도 나로 하여금 그러한 위험에 나아가도록 만들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소인이 되어서야 기어이 자기 안의 군자됨을 방해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있을 뿐이다.
대인(군자)이란 영웅이거나 특출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내 안의 소인됨을 발휘하지 않는 것, 그것이 대인이다. 소인이란 특별히 삿되거나 나쁜 마음으로 무장된 사람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대인의 마음을 외면하거나 방해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것, 그것이 소인(소인-됨)이다. 스스로 군자가 되려는 걸 포기하는 것이 소인이고, 반대로 소인의 마음이 가로막아도 스스로 사명감(命)을 갖고 뜻을 굽히지 않고 이루어가는 사람이 대인(군자)이다. 어렵고 곤란해지는 때가 오면 일단 대인부터 되려고 해야한다. 그리고 이때의 대인은 말보다 행동이다. 대인으로 살고자 하는 뜻이 어디 환난의 때에만 귀할 일이겠는가마는! (끝)
글_ 문 성 환(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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