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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와 불교산책

[요요와 불교산책] 건너가기 위하여

by 북드라망 2022. 8. 5.
[요요와 불교산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문탁 네트워크에서 공부하시는 요요샘께서 연재하시는 글인데요, 불경을 읽다 보면 애매한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뗏목을 버려라" "두번 째 화살에 맞지 마라" 등등이요!  멋지긴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요요샘께서 앞으로 차분차분 설명해주실 예정이랍니다. >_<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건너가기 위하여

"너희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처럼 알아야 한다. 법도 응당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금강경』)

 

 
뗏목의 비유
여행자가 있다. 길을 가다가 큰물이 넘치는 강을 만났다. 위험하고 두려운 이편 언덕에서 안온하고 두려움 없는 저편 언덕으로 건너가려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를 도와줄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여행자는 나뭇가지와 풀잎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 계속해서 길을 가야 하는 여행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만든 뗏목을 놓아두고 가려니 아깝다.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가는 건 어떨까?”

불교경전에 나오는 뗏목의 비유다. 이 비유가 설해진 배경은 이렇다. 수행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어떤 수행자가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의견차이로 논쟁하는 것은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도 없으니 수행자들은 서로의 주장의 근거를 대며 네 생각은 틀렸고 내 생각이 옳다고 옥신각신 하지 않았을까?

상황을 들은 붓다는 수행자들을 불러 모아 먼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뜻이었는지를 분명히 알려준다. 그런 뒤 이 비유를 설했다. 그리고 수행자들에게 물었다. ‘여행자가 어떻게 뗏목을 처리해야 하겠느냐?’고. 모두 ‘뗏목을 버려두고 길을 가야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강물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두고 길을 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를 밝히고 승자의 손을 들어주면 그만일 텐데 붓다는 왜 ‘뗏목을 버려두고 길을 가야한다’는 대답을 끌어내는 뗏목의 비유를 설했을까? 그 이유는 이렇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 (『맛지마니까야』 22.『뱀에 대한 비유의 경』)


뗏목은 건너고 나면 집착하지 않고 버려야 하는 것. 여기까지는 알겠다. 자신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수행자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내 가르침을 잊지 말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 벌어진 놀라운 반전. 이 비유에서 붓다는 느닷없이 자신의 가르침도 강물을 건너면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버린다. 옳지 않은 것을 버려야 하는 근거가, 헐! 올바른 가르침도 응당 버려야 하기 때문이라니! 돌연한 비약 같기도 하고 반전 같기도 한 이 느낌은 뭘까? 뗏목의 비유를 그저 멋진 문학적인 수사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이 비유,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올바른 가르침도 응당 버려야 한다고?
뗏목의 비유는 래디컬하다. 왜 래디컬한가? 붓다의 가르침이 응당 버려야 할 뗏목에 비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무조건적인 경배와 묵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베다』나 『성서』, 『꾸란』을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종교 경전은 계시라는 신비로운 후광에 둘러싸여 있고, 경전의 언어는 단 한 글자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신성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에 비해 뗏목의 비유는 붓다의 말씀인 팔만사천법문의 불교경전에 대해 어떤 신비의 아우라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뗏목의 비유는 절대적 진리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상대적이고 방편적인 것이 된다. 방편은 방법과 편의라는 말이니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설한다는 대기설법(對機說法)과도 뜻이 통한다. 뗏목의 비유를 선택함으로써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상대적이고 조건적인 것으로 만들고, 저 높고 신성한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범속한 땅위로, 변화무쌍하고 위태로운 현실 가운데로 끌어내리고 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 비유는 어떤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붓다의 가르침마저 뗏목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불교 어디에도 믿고 기댈 안정된 지반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대체 왜 붓다는 가르침을 굳이 버리고 떠나야 하는 뗏목에 비유한 것일까?

 


붓다의 가르침을 세 가지로 요약한 삼법인 중 첫 번째인 제행무상(諸行無常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에서 출발해 보자. 모든 형성된 것이란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이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명 있는 것과 정신적인 것이 모두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순간도 고정된 것이 없이 늘 변화한다는 것이 제행무상이다. 이 세계가 끊임없는 무상한 흐름이라는 것, 아마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 불변하는 것을 찾아왔다. 플라톤의 이데아,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기독교의 하느님 등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기원을 추론하여 변하지 않는 존재나 원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도 쉽게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대해 변치 않는 본질이나 본성이 있는 것처럼 가정하곤 한다. 가령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탄식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이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같다. 붓다는 그런 기원에 대한 가정이나 영원한 것에 대한 가정을 논의할 가치가 없는 주장, 희론(戱論)으로 간주한다.

뗏목의 비유는 그 무엇도 절대화하지 않는, 무상에 철저한 입장과 태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비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올바른 가르침조차 응당 버려야 한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뗏목에 대한 비유를 그저 멋진 문학적 레토릭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뗏목의 비유는 붓다가 말한 그대로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설해졌다. 건너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강물을 건너기는커녕 이 언덕으로 되돌아오는 반복
그런데 뗏목의 비유를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가르침마저 놓아버리라고 설하는 붓다를 따라 우리도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저절로 일어난 느낌이든 숙고한 결과로서의 견해든-을 아무 집착 없이 가볍게 놓아버릴 수 있을까.

나의 경우를 보자. 그 동안 내가 의지한 뗏목이 그리 훌륭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거센 물결을 만났을 때 좌초하기도 하고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기도 하고 익사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20대에 내가 의지한 뗏목은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적 이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었다. 그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그 꿈을 따라 가시밭길을 자처했다. 그런 만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운동의 후퇴를 마주했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랬던 만큼 다시는 뗏목 같은 것을 믿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몸과 마음에 배인 습 때문인지 아이들을 키우면서 또 다시 대안을 찾아 대안학교라는 뗏목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돌아보면 내가 붙든 뗏목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10년을 가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나도 변하고 내가 마주친 삶의 조건도 계속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기 위해 뗏목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정신차려보면 또 다른 차안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었다.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언덕 주위를 배회하면서도 나는 내가 의지하던 뗏목 내려놓기를 주저하고 망설이곤 했다.

주위를 돌아보면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고 있는 조건과 인연들에 몸과 마음을 활짝 열고 무상한 변화에 자연스럽게 감응하기보다 기존의 생각과 행동의 습속을 고집하고 반복한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는커녕 이 언덕을 떠나지 못한 채 자기에게 익숙한 생각과 행위의 패턴을 고수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감정을 쓰며 산다.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자동적으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로 반응하는 것을 반복하다가는 수많은 인연과 조건들의 무상한 변화를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내가 가진 호오나 선악의 판단기준이야말로 과거의 내가 축적해 온 경험과 습속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붙들고 있는 한 우리는 사유를 멈춘 상태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비슷한 행동과 사고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뗏목의 비유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 보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도, 뗏목을 내려놓는 것도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붓다는 올바른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는데도 각자의 신념이나 견해, 취향이나 기호, 습속이나 익숙한 감정이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놓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을 것이다.

 
버리고 떠나는 공부
뗏목의 비유가 그러하듯이 ‘버리고 떠남’은 거의 모든 불교경전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메시지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무상을 알게 된 자는 무상을 알기 전의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 재가의 삶에서 출가의 삶으로, 혹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건너가기 위하여 인문학 공부를 하며 일상을 꾸려온 지 10년. 이젠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공부가 삶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공부로 인해 야기되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다. 아는 것을 건너가기 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아는 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길 때 자의식이 풍선처럼 부푸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에게서 나타나는 병증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동체가 이런 병증을 숨길 수 없는 최고의 수련의 장이라는 점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열반에 들기까지 45년 동안 붓다가 이끈 공동체 역시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했으리라. 뗏목의 비유 역시 수행자들 사이에서 옳고 그르고를 따지며 논쟁하는 현장에서 설해진 가르침이었음을 기억하자.

공부는 자칫 아는 것을 쌓고 나를 강화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뗏목의 비유는 무상을 통절하게 깨닫는 것이 공부라고 알려준다. 무상하게 변하는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는 집착하고 붙들 것이란 없다고 가르친다. 붓다의 가르침조차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것일 뿐, 붙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진대 하물며 지금 번뇌 가득한 이 언덕에서의 내 생각, 내 느낌, 내 방식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글_요요(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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