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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불교가좋다] 무언가를 하되 원하지 않기

by 북드라망 2021. 12. 17.

무언가를 하되 원하지 않기


 

질문자: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내용이 어떤 부분인가요?
공부하다 보면 좀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공부하다보니깐 뭔가 공부도 하나의 집착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해결이 되면 좀 더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요. 부처님의 생애를 이렇게 보다 보면, 출가하신 후에 6년 정도의 고행과 수행 기간에 있어서 “이 방법이면 안 되겠다.”하시면서 무언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셨다는 걸 알고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그 깨달음을 얻고 나서 세상의 모든 진리에 대해서 알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이 어떻게 보면 제일 핵심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저의 마음에서 이런 집착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책도 찾아보게 됐는데요. 틱낫한 스님이 쓰신 『붓다처럼』 이라는 책은 그 순간을 소설 같이 묘사를 해주셨어요. 우주의 원리부터 쭉 설명을 해 주시고 또 어떤 경전들을 찾아보면 여러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하고 이런 부분이었나 생각 하는데요. 이제 질문을 드립니다. 그 깨달음의 순간에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과연 어떤 부분인지 정리가 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화스님: “우선 고행을 한다.”라는 말은 특별한 신체가 되기를 훈련하는 것. 이것과 같은 신체 기능을 갖고자 하고 저것과 같은 신체 기능을 갖고자 해요. 그런데 그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신체를 특별한 기능체로 만들 이유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전에 해 놓은 고행이 있잖아요. 고행을 통해서 생각만 바뀌면 그런 기능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기능을 쓸 수 있는 신체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그 전에는 특수한 신체를 더 특수한 신체로 계속 만들려고 하는 그런 것으로 만드는… 신체를 특수한 기능을 가진……깨달음이 체화되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기본 인식이 전제 돼야죠. 원하지 않는. 그러면서 익혀야죠. 익히는 것이 심지어 되는 거예요. 그럼 쓸 수가 있어. 그래서 부처님은 신체화된 기능이 굉장히 극대화 되었어요. 그런데 대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마음이 아직 안 갖춰진 거지. 깨닫기 전엔 “부처란 특수한 신체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집착이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 해 해보니깐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일주일 동안 사유체계에서 기능을 갖되, 예를 들어 아들·딸을 갖되, 아들·딸한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마음이 일주일 동안 딱 생성된 거예요. 기능이 있는 거예요 부처님이. 선정 가운데서 이제 원하지 않는 마음을 체화시키기 시작한 거죠. 이미 기능이 있으니깐, 깊은 선정을 하니깐 그 선정 가운데서 그와 같은 맥락을 만들어낸 거지요. 그 선정 가운데서 일주일 안에 부처의 신체가 된 것이지요. 아무 것도 집착 하지 않는 신체가 되는 거예요. 그 전에는 부처라 하면, 훌륭한 기능인을, 고행은 주로 기능인거예요. 그래서 짧은 시간 속에서 될 수 있었죠. 단 6년 고행이 굉장히 도움이 된 것은 사실 이예요.

질문자: 그런데, 스님. 이러한 경전에 이렇게 엄청난 사건 이후에 엄청 많은 말씀을 보면 사성제라든지 팔정도라든지… 중생들을 위해서 설법을 많이 해 주셨는데 그 순간에 얻은 깨달음에 대한 그런 구체적인 방금 전에 말씀하셨던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이런 개념에 대해서 그 모든 경전에서 얘기하고 있는 게 깨달음에 다 포함돼 있는 건가요?

정화스님: 아 그렇죠. 전적으로는 초지에 이르면 “삶이란 온갖 인연이 중첩되어서 만나 사건, 사물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바꿔 말해서, 무슨 말과 똑같은가 하면, 내가 이런 것을 원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원이 이뤄지는 조건 속에 온갖 인연들이 개입을 해요. 원하든 원하지 않던. 바꿔 말하면 내가 원해서 할 수는 있지만 원 대로 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많지 않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일어났다고 본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모든 일을 내가 주체적으로 행할 수 있다.”라고 착각을 갖고 있는 것이죠. 연기법이라고 하는 말은 원해서 할 수는 있지만, 그 일에 여러 가지 인연이 개입하여, 자신의 과거도 개입 되고, 다른 사람의 과거도 개입 되고, 사회적 인지적 개입이 되면서 어떤 일 또한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원해서 하되 발생 자체를 가지고 자기 원을 규정하지 않는 습관이 돼야 되요. “우리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왜 이렇게 안 돼?”하면서 자기 탓을 할 수 없는 거야. 내가 원해서 됐어. 그렇다고 그것을 자기 능력으로 삼을 수 없는 거야. 그런 의식과 그런 의식에서 일어나는 걸음걸음마다 그런 의식에서 후퇴 하지 않는 것이 초지야. 초지. 그런 생각의 지도가 내부에서 관점이 딱 잡혔는데, 생각은 그냥 생각이라고 하는 그 우연의 일이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강력한 기억으로 남으려면 단백질이 단단해져야 돼요. 뇌라는 단백질이. 그래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하면은 그런 생각을 내는 통로의 단백질들이 단단해지면서 그 일을 쉽게 해요.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단백질이 아직까지 강력히 안됐다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아까 말한 대로 기능인이 아니고 사유인 이죠. 반야의 중심이라고 하는 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이 허망한 것은 온갖 인연이 중첩돼서 어떤 사건, 사물이 일어나니깐 그 사건들이 “내 원대로 갈 수 있다.”가 안 되는 것이죠. 이걸 볼 때, 빨리 그렇게 볼 수 있는 의식 통로가 완전히 경부고속도로처럼 자리 잡은 거예요. 열심히 하되 때 거기서 끝나는 거야. 자기 제자들한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온갖 것을 해. 근데 깨달음이 안 일어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걸 보고 괴로워하고 화내는 거예요. 이 사람에게 부처님 도움이 하나이지, 좀 강력한 도움이지만, 부처님 도움만 가지고 이 사람의 개체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 이 연기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내가 화를 낸다는 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하는 짓인 거죠.


질문자: 스님. 저희가 보통 괜찮다가도 번뇌가 생기고, 마음이 편안하다가도 갑자기 좀 어떤 일이나 원인에 대해 더 힘들어지기도 하는데, 여기 보면 부처님의 6년간의 고행을 통해서 어떻게 보면 약간 단련이, 어느 정도 수행 경지가 다다른 상태인데, 저희가 보통 명상수행도 하지만 이런 고행도 어느 정도 필요할 수도 있는 건가요?

정화스님: 아~그렇죠. 왜냐 아까 말한 대로 고속도로를 만들려면 적당한 정도의 고행, 그것이 필요한 거죠.

질문자: 제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저희가 이렇게 이런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아까 제가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 인연담이나 이런 부분이 사실 좀 와 닿지가 않더라고요. “이거 나랑 상관없네?” 이런 부분들이 많고 하는데… 이런 새김을 유지하려면 명상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까? 그것을 유지하려면요?

정화스님: 명상 이전에 삶을 이해하는 사유가 중심 이예요. 불교의 수행을 사유수(思惟修)라고 불러요. 사유는 생각이에요. 명상을 통해서 어떤 기능을 성취하려고 하는 사유가 전제되면 그것도 괴로움을 만드는 거예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익히긴 하되, 되면 좋고 안 되도 즐겁고 하는 사유가 전제되어야 돼요. 이것이 수행의 가장 첫 출발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첫 출발인 삼법인이라 하는 게 무슨 말이냐면, 무아라는 말이 무엇이냐면 독단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인연의 자아만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 앞에 갔는데 아버지가 내 뜻대로 존재하기를 바랄 수가 없고, 아버지 앞에서 내가 아들이 아니기를 바랄 수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 딱 서는 순간 이미 우리 인연은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을 규정하는 여러 조건들이 틀려 있어요. 아버지를 규정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틀려 있어. 이것을 전제로 서로를 보면 괴로운 것이 되는 거고, 그렇게 전제로 하지 않고 보는 훈련을 하면 괴롭지 않은데, 제가 해본 것 중에서는 뭐 여러 가지가 다 좋은 일이 인연이라고 말하지만, 처음 하는 사람은 그냥 앉아가지고 몸을 세우고 자기가 어떤 상태 있는지를 자각하면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좋은 방법이에요.

특별한 것을 하려고 하면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닌 이유가,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의식만을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이건 말씀드릴 때마다 항상 말하죠. 지금 엉덩이 한번 느껴보세요. 자, 엉덩이 다 느꼈죠? 제가 이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엉덩이 못 느꼈어요. 그 엉덩이의 느낌이 지금 제가 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하고 안에서 무의식에 똑같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제 이야기를 기울여 듣는 순간 엉덩이의 느낌을 파악하는 인지가 발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특정한 것에 주의를 안 기울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것들이 지 맘대로 올라갔다 해. 엉덩이도 생기고, 뭐 옛날이야기도 나오고 막 나와.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안에서 온갖 잡념이 일어난 것처럼 돼요.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가 특정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까 다른 잡념들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 모든 잡념들이 같은 강도를 가지고 의식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그 순간에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는가의 차이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화두’같은 것은 특정한 것에 주의를 강력하게 기울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하라는 말이고. 예를 들면 그냥 관찰하시오, 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런 생각이 일어났으면 좋겠네. 저런 생각이 일어났으면 좋겠네.”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그냥 관찰하라는 거예요. 둘 다. 사물, 사건을 제대로 보는 대로 유도하는 사건들인 것이죠. 그래서 돌이켜보면 주시,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보다, 전체적으로 보니까 가만히 이 상태만을 자각하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길더라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 아까 같은 그런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우리가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일부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에서는 외부를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를 본다고 말하거든요. 요즘은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전부 다 해석된 세계를 보는 것이지 외부를 본다고 말을 안 해요. 내부에서 만드는 내부 영상을 외부라고 본다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딸이 괴로운, 자기를 괴롭히는 일을 했어요. 자기를 괴롭히는 딸을 보는 게 아니고, 그 일에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을 딱 붙여가지고 저기를 괴롭히는 거예요.

이것을 요즘은 뇌가 전부 다 해석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어. 이런 과정들을. 이런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지. 세상을 보는 게 아니고. 내 안에 갖춰져 있는, 온갖 이미지를 만드는 자·모음들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내부인양, 외부인양 보도록 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부처님의 경우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경험했죠. 이것을 최종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음이 만드는 환상이라고 하는 것이 최종 해석이에요.

질문자: 그럼 마음이 만드는 환상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거잖아요?

정화스님: 버릴 수가 없어요. 환상이 환상인 줄 아는 것이지, 환상을 버릴 수가 없죠. 환상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에요.

질문자: 그럼 우리는 환상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냥 살아가는 겁니까?

정화스님: 그러니까 우리가 환상인 줄 아는 것은 약하고, 그것을 실제라고 여기는 인지의 힘은 강해요. 두 번째는 환상도 외부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질문자: 그런데 이제 만약에 제가 이해력이, 자각 인식력이 높아져서 “내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해석이고, 환상이다.” 그게 되면 다시 자기 주장할 게 없잖아요. 그죠? 그러면 결국 삶의 방식은 바람 따라 물 따라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흘러가야 됩니까?

정화스님: 네. 바람 따라 물 따라 사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것을 고집하지 않으면 자기 걸음걸이에 가장 알맞는 인연을 현상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자기를 고집하면 어떤 특별한 일에는 100% 딱 맞는 것처럼 보여서 “맞아. 내 생각이 맞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드물긴 하지만 일어나죠. 자기 생각이 적어지면 많은 곳에서 마치 자기 삶처럼 만날 수가 있어요.

질문자: 나름대로 그 다음 단계에서 처세법이 생기네요?

정화스님: 그렇죠. 세상을 살아가는, 번뇌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체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거예요. 그것이 불교에서는 초지, 2지니, 3지니 이렇게 단계를 정해놓은 것이죠.

질문자: 버리면 오히려 많이 얻는 거네요?

정화스님: 그렇죠. 그냥 딸을 좋아하면, 그냥 24시간 딸이 좋아. 마음에 들 때 좋아하면 하루에 한 건이라도 일어날지 말지 해. 나머지 모든 것은 괴로워. 선택을 괴롭게 해 놓고 딸만 변하면 안 괴로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무지죠. 딸은 네 인생 네가 살라고 유전자로 전해줘 놓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은 맞을 수 있는 확률이 적은 것이지. 우리 엄마 세대들은 그렇게 살아가지고 막 계속 그렇게… 그 이유는 아까 말한 대로 유전자가 3분의 1을 빈칸으로 만들어 놨어요.


학습한 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받았어. 엄마한테, 무슨 엄마의 학습을 받은 거지. 학습 받은 걸 가지고 딸한테 하는 거야. 이것이 괴로운 일을 발생시키는 학습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학습대로 하는 거예요. 이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라고 하는 거예요. 업.

서로 부모 자식들 간에 서로 잘해 주면서, 서로 괴로워 해. 서로 잘해 주면서, 서로 괴로워 해. 자식 괴롭히려는 부모가, 신문에 나는 이상한 사건 말고, 대부분 자식 괴롭히려고 하지 않는 부모고, 자식도 부모 괴롭히려는 자식 없어요. 그런데 하다 보면 서로가 잘해 주려고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는 일을 대를 물려주면서 계속 하는 것이죠.

불교가 말하는 윤회의 첫대목. 무명이죠. 무지, 무명. 이것을 무지, 무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괴로운 일을 엄마도 경험했고, 딸도 경험했고, 손자도 경험했는데도 또 그 일을 증손자, 고손자 계속해서 물려주는 것이죠.

 

정리_월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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