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삶을 살펴보라는 메시지
땀을 급히 내면 수명을 단축시킨다.
〇상한병에 땀을 내려면 표리와 허실을 살펴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실시해야 한다. 만약 순차적으로 하지 않으면 잠시는 편안하다고 하더라도 오장을 상하게 하여 수명을 단축시키게 되니 어찌 귀히 여길 만하겠는가?
옛날 남조(南朝)의 범운(範雲)이 진무제(陳武帝)의 속관(屬官)이 되었는데, 상한병에 걸려 구석(九錫)의 영예를 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서문백(徐文伯)을 청하여 급히 땀을 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문백이 말하기를 “지금 당장 낫게 하는 것은 아주 쉬우나 다만 2년 후에 일어나지 못할 까 염려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범운이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는데, 어찌 2년 후의 일을 가지고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문백이 곧 불로 땅을 태운 다음 복숭아 잎을 펴고 자리를 마련하여 범운을 그 위에 눕혔다. 얼마쯤 있다가 땀이 푹 난 다음 온분(溫紛)을 몸에 뿌려주니 다음 날 병이 나았다. 이에 범운이 심히 기뻐하였다. 그러나 문백은 “기뻐할 일이 못됩니다”라고 하더니 2년 후에 과연 범운이 죽었다.
- 『동의보감』, 「잡병편」, 寒(下) 1130쪽
예나 지금이나 높은 벼슬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운이 트이고 시절인연이 맞았을 때에나 문득 다가올 수도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남조 시대의 범운(範雲, 451~503)은 높은 관직에 임명받고 이제 곧 출사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는 이름난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다. “재사(才思)가 뛰어나 ‘붓을 대기만 하면 뛰어난 문장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다. 남조의 한 축을 이루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 4대에 걸쳐 두루두루 높은 관직을 쭈욱 역임했다. 지금은 진무제(陳武帝)로부터 다시 벼슬을 받게 된 행운아.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는 갑자기 병을 얻었다. 바로 상한병(傷寒病)
상한병은 겨울의 한기에 적중되어 몸이 상하는 병인데 주 증상은 심하게 열이 나는 것이다.기본적인 처방은 땀을 내는 것. 땀을 내어 한기가 풀리게 한다. 그런데 땀을 낼 때는 신중해야 한다. 『동의보감』에선 땀을 피와 다름없이 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내면 피가 손실돼서 기가 허해지고 적게 내면 치료가 안 된다.
땀을 낼 적에는 손발이 다 축축할 정도로 두 시간 정도 내는 것이 좋고, 땀이 물처럼 뚝뚝 떨어질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 (중략) 땀을 낼 때 허리 위는 평상시와 같이 덮고 허리 아래는 두껍게 덮어야 한다. 그것은 허리 위는 땀이 질벅하게 나더라도 허리 아래로부터 발바닥까지는 땀이 약간 나서는 병이 끝내 낫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리에서부터 다리까지는 땀이 푹 나도록 해야 한다. (잡병편 한 1009쪽)
땀을 많지도 적지도 않게 낸다는 것은 손발이 축축할 정도로 천천히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2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땀은 상체에서 많이 나는데 효과를 보기 위해선 하체, 발까지 나야 하기 때문에 허리 아래는 두껍게 덮으라는 주문까지 하고 있다. ‘3일 안에 두 세 번’ 내라고도 하고 있다.
그러나 범운은 3일 혹은 2시간도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의사 서문백에게 땀을 빨리 내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면. 물론 그렇게 해봐도 안 나았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는 병이 몸 겉에 있는지(표) 안(리)에 있는지, 몸이 허한지(허) 병의 기운이 넘치는지(실) 분명하게 살펴서 적절한 시기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범운에게 그 때를 기다릴 여유가 어디 있으랴? 당장 임명장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이 순간을 놓치면 영광은 간 곳 없을 텐데.
서문백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비상시에 빨리 땀을 내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한증법이다. 급히 땅을 데우고 눕혀 천천히 내야 할 땀을 빨리 빼는 것. 이 방법을 쓰면 임시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동의보감에선 경고한다.“이 방법은 병이 위급할 때는 괜찮지만 조심하고 두 번은 쓰지 말아야 하는데, 명을 재촉하기 때문이다”(잡병편, 하, 1010쪽)라고.
온분은 흐르는 땀을 멈추게 하는 처방이다. 땀이 얼마나 빠르게 많이 났으면 인위적으로 멈추게 하겠는가? 한꺼번에 피를 많이 흘린 셈이므로 수명이 단축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때 그의 나이 52세였으므로 이미 기력이 쇠약해진 시기였다. 이 나이에 쓰기에는 위험한 처방이었다. 서문백이 2년후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공자의 말씀을 들먹이며 “아침에 도를 들으면….”운운하면서 멋있게 호기를 부렸지만 병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병은 나의 삶을 살펴보라는 메시지이다. 잠시 멈추어서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해보라는. 범운이 그랬다면 관직은 내버렸을지라도 우리에게 시 몇 편은 더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붓을 대기만 하면 문장을 이루는 그였기에.
글_박정복(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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