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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아기가왔다 1

아빠가 딸에게서 배운 것

by 북드라망 2018. 7. 27.

아빠의 배움, 자유의 능력



모든 ‘배우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이다. 재능은 그 뒤를 따른다. 아빠에겐 타고난 재능 몇가지가 있다. 눈치도 빠르고, 손재주도 좀 되는 편이라 어떤 일이는 후다닥 배우고, 금방 평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 주어진 일을 후딱 해치우는 데 특화된 재능인데, 그래서인지 성실함하고는 꽤 거리가 멀다. 그 재능 덕분에 취미도 꽤 많았다. 음반도 모으고, 기타도 치고, 만년필도 모으고, 글씨도 쓰고 등등. 다른 말로 하면 이것 집적, 저것 집적,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재미난 무언가를 발견하면 확 덤벼 들어서 질릴 때까지 해버리곤 다른 재미난 것들을 찾아온 셈이다. 원래 있던 재능을 그저 발견하는 수준에서 거의 모든 일이 끝나버리곤 했다. 우리 딸은 아빠의 이런 패턴, 일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 집의 일과는, 여느 아기 키우는 집이 그렇듯, 아기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딸이 일어나는 아침 6시 무렵부터 잠드는 저녁 8시 반 무렵까지 딸의 세끼 밥, 두 번의 간식, 그 사이사이의 낮잠으로 채워진다. 딸이 태어난 작년 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다. 당연히 딸의 주양육자인 아빠의 생활도 그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오늘과 내일이 같고, 내일과 모레가 같으며, 모레와 글피가 같은 생활이다. 평생 이런 생활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쓰려고 했는데 있기는 있다. 어딘가 하면 ‘군대’다. 매일매일이 똑같고,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며, 아무 할 일이 없어도 내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꽤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군대에선 나 스스로를 양육한데 비해, 여기선 우리 딸을 양육한다는 점이 다르다. 군대에서 무슨 양육인가 하겠지만, 징병제에 반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군대야말로 스스로를 양육하기에 맞춤한 곳이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되는 스트레스 한계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딸을 키우는 일도 그와 비슷하다. 육아의 과정에서도 매번 스트레스 한계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더구나 15개월쯤 되어서 자신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유아를 기르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딸과 의견충돌을 일으키다 보면 순간순간 폭발 직전까지 간다. 그럴 때면 울며 떼쓰는 딸을 내려놓고 가만히 심호흡을 한다. 그때 아빠는 딸을 달래기보다는 아빠 자신을 달랜다. 아기에겐 감정의 잔여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빠가 웃겨주거나 재미있게 해주면 금방 자신이 화났던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일단 아빠가 그 순간 쌓인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 심호흡도 좋고, 딸과 아빠의 관계(결국엔 아빠가 현실의 강자라는 사실)를 깨닫는 것도 좋다. 감정을 결절을 해소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떠올려 깨닫는 수밖에 없다. 지난 15개월간, 딸이 부지런히 신체능력과 자아를 성장시키는 동안 아빠는 그런 식으로 아빠의 내면을 성장시켜 왔다. 단조롭지만 몹시 강렬한 하루하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감정의 잔여물이 거의 없는 아기, 우리 딸이 생생한 참고가 되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 화나고 짜증나고 마음대로 안 돼서 속상한 일은 바로 1초 전에 일어난 일일지라도 결국은 ‘과거’의 일인 것이다. 거기에 사로잡혀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 딸도 결국엔 아빠처럼 온전하게 현재를 사는 법을 까먹고 말 테지만, 부디 그 간격이 아빠보다는 훨씬 적은 사람이 되기를 아빠는 간절히 바란다.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모자랄 것 없이 살길 바라는 것보다도 그때그때의 현재를 강렬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더욱 바란다. 그런 사람이 된다면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 딸이 부디 지금의 그 ‘자유’를 원형에 가깝게 보존해 가길. 지금 아빠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제 능력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이 되길.


- 아빠


*만 1년간 연재했던 <아기가 왔다>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시즌 1을 끝냅니다. 1년쯤 아기를 키우다가 또 전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쌓이면 “짠-”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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