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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역량이 우주를 만든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

by 북드라망 2017. 6. 27.

읽기의 역량이 우주를 만든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



영화 《컨택트》는 언어에 대한 성찰이 듬뿍 담긴 이야기이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평하고 간혹 ‘영원회귀의 영화’라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감독이 그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무튼 영화 내내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 루이스는 언어학자이다. 또한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heptapod)[각주:1]가 사용하는 언어가 화면 전체에 표기될 때면 영화를 보는 내내 언어는 물질이라는 느낌이 강렬해져서, 내 신체 안에 거주하는 언어는 어떤 질감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물음마저 스스로 던지게 된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 중 하나는 외계 생명체들이 언어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매개체이다. 그들은 공간에다 뿌리는 방식으로 언어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언어 매체는 공기다. 우리가 언어를 표기하려면 종이에 글로 써야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공기를 매개로 글을 쓴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연출상의 특이함일 뿐이다. 사실 우리도 소리로 언어를 표현할 때는 공기를 매개로 상대에게 전달하지 않는가.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그 소리가 물질적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마 우리도 말을 할 때 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 언어를 공기에 내뿜고 있을지 모른다. 그 물질이 공기를 매개로 상대의 귀에 다다를 것을 상상하면, 적어도 언어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헵타포드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대의 급진적인 개혁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뜻밖에도 이런 언어의 물질성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졌다. 의료나 교육 전문가들을 비판하고, 자본에 가려 숨을 못 쉬는 빈민들의 삶을 복원하려 고군분투했던 그의 전 생애를 생각하면 의외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변화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던듯하다. 


이반 일리치



그의 글들을 보면 이미 그는 영화 《컨택트》의 주제를 문명사적인 차원에서 확장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현재의 우리’가 알파벳이라는 기법으로만 말을 기록할 수 있고, 그리고 그 기록을 말로 표현할 때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고 묘파한다. 즉 우리는 문자문화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일리치는 이렇게 표현한다. “저는 알파벳의 섬에서만 편안함을 느낍니다. 읽고 쓸 줄 몰라도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저처럼 문자문화적인 많은 사람과 이 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각주:2]

 

사실 알파벳은 다른 기호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다. 표의문자나 상형문자는 읽으려면 발음하기 전에 문장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알파벳은 그것 자체가 말소리를 시각적 형태로 기록하기 위한 테크닉이므로 당연히 그 테크닉의 목적에 맞게 뜻을 몰라도 읽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알파벳뿐이다.


그래서인지 알파벳이 탄생한 이후 2천년이 넘도록 ‘읽기’는 언제나 낭독이었고, 언제나 작은 소리를 내며(아마 중얼거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읽는다는 뜻이었다.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소리내지 않고 읽기인 ‘묵독’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고 하니, ‘읽기’의 개념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읽기 그 자체가 세월이 흐르며 혁명을 겪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리치는 후고(Hugues de Saint-Victor)[각주:3]의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가르침)이라는 책을 해설하면서 중세의 읽기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후고 그 자신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배웠기 때문이겠지만, 일리치는 후고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푹 젖어 있다고 말한다. 후고는 스승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텍스트를 읽고, 또 읽고, 필사했다. 사실 후고에게 읽기와 쓰기는 공부(스투디움, studium)의 양면인 셈이다.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다”라는 후고의 첫 문장에서 ‘지혜’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는 지식으로서의 지혜일 수가 없다. 후고에게 지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름없이 지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각주:4] 


그리고 그것은 읽는 자를 치유하는 약(레메디움, remedium)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후고는 읽기를 존재론적인 치료 테크닉으로 인식하고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일리치가 소개하는 후고의 책,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의 부제도 “데 스투디오 레젠디(de studio legendi)”는 “읽기 공부에 관하여”이다.



여기서 우리가 일리치나 후고가 기독교 전통에 있기 때문에 속류적인 니체류의 비판에 따라 그들을 비판해야 한다면 큰 오류가 생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유명한 헤겔주의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일리히를 보면 위대한 비주류 철학자 니체를 떠올리게 되지만 좀 다르다고 말한다. 니체는 현대의 혐오스러운 주제들-이를테면 평등, 고통에 대한 관심-이 기독교적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일리치는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테일러는 니체주의자 미셸 푸코가 일리치의 주장과 상당 부분 겹쳐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각주:5]


다시 말하면 현대의 문제를 니체는 기독교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리치는 똑같은 문제를 기독교가 타락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묘파한다. 결국 일리치는 서양 근대성의 시작을 가톨릭 세계의 돌연변이로부터 찾는다. 여기서 돌연변이란 기독교적인 생활과 사회적 질서를 교회의 권한 아래 두고, 신앙의 요구에 철저히 복종케 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신을 깨닫고, 스스로 체화하는 경험을 무시하게 되고, 단지 시스템이 만들어낸 거짓 경험에 따라서만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만남은 실제 신을 만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일리치의 신앙은 규칙 이면에 있는 실질적이고 신체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 실감이 무너졌을 때 신앙은 타락하고, 현대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 의미에서 본다면 후고가 읽기를 통해 도달하려는 지혜가 그리스도라고 했던 것은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인격체를 교회라는 시스템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으로 실감하는 것을 말한다. 읽는 자는 읽기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후고가 생각할 때 부른 배에서는 섬세한 감각이 나올 수 없으므로 익숙한 고향에서 배부른 채 있는 사람은 진정한 공부, 실질적인 읽기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완벽하게 읽고 싶은 사람에게는 모든 세계가 외국 땅이 되어야 한다. “읽는 사람은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각주:6]


수도원 활동으로서의 읽기 공부(스투디움 레젠디)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후고에게 이것은 치유의 약, 예수 그리스도였다)를 향해 올라가는 가파른 길에 모든 것을 투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얼거려 혀를 훈련하고, 자신의 중얼거림을 스스로 열심히 들어 귀를 훈련함으로써 기억을 강화해야 한다. 이렇게 기억을 강화하면, 기억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체 안에 ‘이스토리아(historia)’라는 내적 시공간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새로운 시공간인 이스토리아에서 생성된 사건들을 유추(아날로지아, analogia)하고 해석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사건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사건들로 구성되면서 어떤 신비를 깨닫게 된다(아나고지아, anagogia). 궁극적으로 읽는 사람이 자신의 신체 안에 구성된 이스토리아에 통합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각주:7]이것은 고대의 건축적 기억 훈련을 소생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체 안에 새로운 시공간을 탄생시키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니까. 


이 의미에서 읽기는 자연이라는 대우주와 신체 안의 소우주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면서 그것을 통해 새로운 땅으로 떠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읽기를 통해 자연의 시공간 중 하나를 잘라내 내 신체 안에 구축하고, 다시 그 신체안의 시공간 안으로 통합되어 ‘기존의 나’가 사라지고 ‘새로운 나’가 생기는 것이다. 읽기의 역량은 존재론적인 사건을 만드는 역량인 듯싶다. 언제나 고향을 떠날 수 있는 역량 말이다.  



일리치는 현대를 ‘인간을 불구화하는 전문가 시대’라고 명명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각주:8] 대중들은 그저 ‘문제’만을 갖고 있고, 전문가들이 ‘해결책’을 소유하고 있는 시대 말이다. 어쩌면 전문가들의 전지전능이라는 환상은 일리치가 지적한 ‘읽기의 역량’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겨난 환상이 아닐까. 이런 읽기의 역량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생애 3분의 1 동안이나 필요한 교과를 공부하고서도, 또 나머지 3분의 2 동안을 더 보수 교육을 받고서도 그저 시장의 소비자로만 서게 된 것이 아닐까. 아마 이런 역량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읽을거리가 많아도 정신은 갈수록 궁핍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가 헵타포드어를 배우자 미래를 보는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는 SF적인 스토리보다, 루이스가 언어를 통해 헵타포드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고투하는 장면이 더욱 영화다웠다. 언어를 통해서 헵타포드와 의사소통하려는 그녀의 고투에서 마치 읽기를 통해서 자연의 우주를 내 신체로 이전시키려는 중세 수도사들의 모습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고투를 거치고 나면 미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신체 안에 구성된 ‘과거-현재-미래’ 즉, 이스토리아(historia)에서 다시 살아갈 것이므로 전혀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읽기의 역량이 우주를 만들 것이므로.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영화에서 사람들이 외계생명체에 붙인 임시 이름이다. 그리스어 어근 'hepta-'는 ‘7’을 의미하고, 'pod'는 ‘발’을 의미한다. 문어같이 생긴 외계생명체가 7개의 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본문으로]
  2. 이반 일리치 지음,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권루시안 옮김, 느린걸음, 2013, 252쪽. [본문으로]
  3. 1115년경 독일의 니더-작센 출신으로 파리 근교 생-빅토르(St. Victor)에 위치한 아우구스티누스 신수도원 학교에 입학한 후고 수도사를 말한다. 생-빅토르 출신의 후고라는 뜻으로 표기를 Hugues de Saint-Victor라고 한다. 독일어로는 후고(Hugo), 불어로는 위그(Hugues)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이반 일리치 지음, 『텍스트의 포도밭』, 정영목 옮김, ㈜현암사, 2016, 24쪽. [본문으로]
  5. 데이비드 케일리 엮음, 『이반 일리히의 유언』, 이한·서범석 옮김, 이파르, 2010, 7쪽. [본문으로]
  6. 이반 일리치 지음, 『텍스트의 포도밭』, 정영목 옮김, ㈜현암사, 2016, 33쪽. [본문으로]
  7. 이반 일리치 지음, 『텍스트의 포도밭』, 정영목 옮김, ㈜현암사, 2016, 81쪽. [본문으로]
  8. 이반 일리치 외 지음, 『전문가들의 사회』, 신수열 옮김, 사월의 책, 2015, 1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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