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색함을 벗고 크게 함께하라
天火 同人 ䷌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貞.
동인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넓은 들판에서 하면 형통하니,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고, 군자가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이롭다.
初九, 同人于門, 无咎.
초구효, 문을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하니, 허물이 없다.
六二, 同人于宗, 吝.
육이효, 자기 집안에서만 사람들과 함께하니, 부끄럽다.
九三, 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구삼효, 병사를 수풀에 감추어 두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엿보지만 3년 동안 일으키지 못한다.
九四, 乘其墉, 弗克攻, 吉.
구사효, 담장에 올라가지만 공격하지 못하니 길하다.
九五, 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
구오효, 사람들과 함께하는데 먼저 울부짖다가 나중에 웃으니, 큰 군사로 이겨야 서로 만나게 된다.
上九, 同人于郊, 无悔.
상구효, 교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니 후회할 일이 없다.
천화동인 괘를 볼 때마다 대학생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최근 17년의 징역형이 확정된 전(前) 대통령의 재임 당시, 통상 정책과 관련해 온 나라가 들끓고 있었고 수많은 인파가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앞으로 집결했다. 그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 세상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막혀있다는 느낌, 직접 행동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연함 같은 것들이 나로 하여금 난생 처음 여의도 땅을 밟게 했다. 실제 현장에 가보니 아주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고 깊은 감명을 느꼈는데, 바로 친구나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온 개인들이 시위 참여자의 대부분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장소와 시간만을 전달받고 홀로 지하철을 타고 와서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는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가 헤어졌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플랫폼이 아수라장이 되어 발바닥이 땅에 닿지도 못한 채 인파에 하염없이 떠내려갔던 그때가 아직도 생각난다. 각자가 다른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이 하나의 마음을 품고 거대한 군중을 이루어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고 놀라웠다.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함께하는 “동인”의 장면은 이렇게 내 기억 속 한 자락과 겹치며 새로운 인상으로 다가온다.
천화동인(天火同人) 괘의 괘상을 살펴보면, 하늘과 불이 함께 하는(天與火) 모습이며, 하늘은 높은 곳에 있고 불 역시 늘 위로 솟아오르려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서로 나아가려는 방향이 일치한다. 여기서 동인(同人), 즉 함께 같은 곳으로 나아가고 연대한다는 괘의 뜻이 나온다. 동인 괘 바로 앞 순서를 차지하고 있는 괘들은 지천태(地天泰)-천지비(天地否) 커플인데, 태평성대의 세월(지천태)을 지나 모든 것이 꽉꽉 막히고 통하지 않는 시절이 바로 천지비다. 비(否)의 시절을 타파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이 불통의 시대를 바꿔보겠다는 굳은 뜻을 가지고 모이는 사람들의 힘이며, 이것이 천화동인이다. 어려울수록 함께 공부하는 벗, 같은 비전을 가진 붕우와 나아가라는 말은 주역에서 항상 제시하는 중요한 험난 극복의 방편 중 하나다. 그런데 천화동인 괘가 가진 독특함은 이 “함께함”의 범위를 완전히 확장 시켜 버린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자. 험난한 시대가 들이닥쳤고, 함께해야 할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나와 친한 가족들? 그동안 정치관이 나와 잘 맞았던 친구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동료는 내 곁에 있고 내가 잘 아는 누군가일 터다. 놀랍게도 동인 괘가 경계하는 함께함이 친한 사람과 함께하는 동인이다. 육이효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인우종, 린(同人于宗, 吝). “자기 집안에서만 사람들과 함께하니, 부끄럽다!”
그렇지만 좀 이상하다. 동인 괘의 육이는 하괘의 가운데(中)를 차지했고, 자리도 올바르다. 위로는 구오와 짝을 이루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을까? 충분히 길하다는 뜻이 나올 법도 한데, 정작 효사는 길(吉)이 아니라 린(吝), 인색한 상황이라고 간주한다. 효가 처한 조건은 정말 좋은데 왜 그럴까? 바로 동인의 범위를 넓히지 못했기 때문에 육이가 인색해지는 것이다. 종(宗)이란, 가족과 교파, 파벌을 뜻한다. 육이에게 있어서 가장 쉽게 종(宗)을 이룰 수 있는 이는 바로 구오효다. 그래서 가장 친할 수 있는 짝을 이미 갖춘 육이효에게 경고 딱지가 붙는 것이다. 특히 동인 괘에서 육이효가 관계에서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평소보다 더 ‘통 크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이유는 다섯 개의 양효들이 모두 하나의 음인 육이와 친해지려고 몸달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삼과 구사효는 군사를 매복시키고 담장에 뛰어올라 언제든 육이를 낚아챌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강건한 자들이다. 이런 때에 육이가 구오하고만 딱 붙어 친해지면 그것이야말로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게다가 천지비의 흐름, 불통의 시대를 전환 시켜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 시대가 바로 천화동인 아니던가. 많은 사람들과 동인하려면 천생연분 배필이 곁에 있다 하더라도 더 넓은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괘의 시절인연과 만나면 가장 좋은 조건에 있는 효사의 위상과 역할 역시 살짝 달라져 버린다. 주역의 괘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신묘함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비롯된다.
인색하다는 표현이 재밌는데, 주역에서 말하는 린(吝)은 “스스로의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인색함과는 조금 다른 뜻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하고만 친해지려고 하는 사심이 천화동인 괘에서 가장 큰 허물임을 육이효를 통해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육이는 짝인 구오하고만 어울린다면 동인을 제대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따끔한 질타를 받는 셈이다. 이렇듯 동인 괘는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중의 자리를 차지하는 육이와 구오의 조합은 좋다’는 일반적인 주역의 문법을 살짝 비켜나간다. 이런 색다름이 괘가 가진 메시지를 더욱 부각시켜 주기 때문에, 서로 뜻을 모아 함께한다는 동인 괘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다. 바로 “대동(大同)”하라는 것이다. 천화동인 괘 다음으로 오는 괘는 화천대유(火天大有) 괘인데, 이 대유(大有의) 대(大)와 동인(同人)의 동(同)을 합쳐서 나온 말이 바로 이 대동(大同)이다. 크게 함께해야만 크게 얻을 수 있다! 주역에서 클 대(大)자는 하늘 천(天)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함이다. 하늘을 닮은 거대함은 익숙하고 편한 관계를 떠나 낯선 이들과 완전히 새로운 연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군자의 비전임을 내세운다. 난세에 필요한 것은 몇몇만 즐겁고 재밌는 친목의 연대가 아니라, 더 큰 범위로 확장될 수 있는 군자들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시위를 참여하던 날, 여의도로 떠나고 싶어하는 나를 가장 망설이게 했던 것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시위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며, 역에서 내린 후 어디를 가고 또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아는 것이 전혀 없으니 혼자 가는 게 어찌나 두렵던지. 그렇지만 이런 걱정들이 모두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방향이 일치한 사람들이 모일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장의 리듬 같은 것들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반갑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현장의 부분을 이루면 되었다. 같이 갈 사람 있으면 함께하자고 펜으로 대충 휘갈겨 쓴 종이를 당당히 들고 있는 사람을 따라가기도 했고, 마스크를 꼭 써야 얼굴 채취가 되지 않는다며 어느 중년 여성에게 여러 시위 노하우(?)를 전수 받기도 했다. 물폭탄을 맞고 온몸이 다 젖은 생쥐 꼴로 어쩔 도리가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 다가와 나를 잡아주고 갈무리해 준 여럿도 있었다. 이들 전부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인,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내 삶에서 이렇게 낯선 이들과 오롯이 함께 행동한 하루가 있었던가? 그 자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라면 동료가 되고 동인(同人)이 되었다. 상대를 얼마만큼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짧은지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 연대가 가능한 것이 인간의 또 다른 능력이라는 걸 그곳에서 배웠다. 너무나 내성적이고 음울했던 대학 시절의 내게 사람이나 관계에 대한 자신감이랄까, 새로운 감상을 심어준 것이 바로 이 현장이다. 가장 강렬한 연대를 느꼈던 순간에 내 옆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은 내 절친도, 가족도 아닌, 내 삶의 한순간을 스쳐 지나간 이름 모를 누군가들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종(宗)을 떠나 동인했을 때 만들어지는 새로움이란 이런 것일 터다. 천화동인 괘의 비전은 보이지 않는 온라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이야말로 종(宗)과 파벌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동인을 생성해낼 수 있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 큰 함께함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물어야 한다. 지금 나를 인색하게 만드는 종(宗)은 무엇인가?
글_오찬영(감이당 장자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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