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팽창, 페르소나와의 동일시
지 산 씨 (사이재)
나는 왕이다, 짐은 국가다!
AI가 의사를 대신하여 수술을 하고, 기자를 대신하여 기사를 쓰고, 판검사를 대신하여 판결을 내린다. 이미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가 세계적인 바둑기사 이세돌과 대결하여 4승 1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바둑계를 초토화시켰다. 이 세기의 대결은 인공지능 시대의 서막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AI는 이제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AI의 결과물을 판에 박힌 공산품이라 폄하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지능과 독창성과 예술성 그 어떤 방면에서도 인간 못지않다. 아니 인간을 뛰어넘는다. 21세기 인간들은 ‘신과 비슷한’ AI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기술문명의 이 거침없는 도약에 비교할 때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마음은 진보를 모른다. 어쩌면 더없이 낙후하다. 20세기 벽두에 융은 직무와 칭호가 자아인 줄 아는 심리적 현상 즉 ‘페르소나’와 자아의 동일시 현상을 짚어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정신은 칼 융이 분석한 정신의 상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직무도 다양해지고 한 사람이 투잡 쓰리잡을 뛰는 21세기 이 시대에 자신과 자신의 일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검사·판사·기자·의사·국회의원·공무원 등등 소위 전문가 집단들이 ‘나는 왕이다’, ‘짐은 국가다’와 같은 망상에 빠져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툭하면 페르소나 운운하기 때문에 이제는 낡고 상투적인 느낌이 들 정도지만, 이 말이 심리학적 용어로 처음 특정된 것은 융에 의해서다. ‘초인적인’ 혹은 ‘신과 비슷함’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팽창이 심리 분석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임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고대의 연극배우들이 자기 역할을 나타내는 페르소나(가면)를 쓰고 연기하듯 사람들도 사회 안에서 부여받은 역할이나 책임에 따라 특정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융은 이 직무, 역할, 칭호로 형성된 사회적 인격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자아가 외부의 현실과 관계 맺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다. 그러니 어떤 개체도 페르소나로 살아가지 않는 경우는 없다. 페르소나가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누구든 아버지, 어머니, 여자, 남자, 아들, 딸, 특정 직업군 등등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중첩된 칭호를 동시적으로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게 되고 그에 따라 인격이 확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때에 맞는 역할 수행은 자아가 성숙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문제는 페르소나를 자아와 동일시할 때 일어난다. 융은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정신적 팽창’에 주목했다. 당시의 많은 남성들이 직무와 칭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 중 일부는 “자신을 이상하게 확대하여 결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성질을 찬탈해 버린다.” 직무와 같은 ‘밖에 있는 것’이란 타인에 속하든가, 또는 모두에 속해 있든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임에도 그런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해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짐은 국가다’와 같은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인격과 전이』, 37쪽, 솔, 2004)
한계를 넘은 인격의 확대, 즉 ‘부풀어 오름’ 상태는 그래서 위험하다. 개체를 지나치게 훌륭하게도 만들지만, 병적인 자만과 불손한 불만을 키우게 하기 때문이다. 가련하고 작은 인간들이 ‘마술적 위신’의 가면 뒤에 숨어 한계를 모르고 날뛸 때, 개인도 위험하지만 사회도 위험하다. 본래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가련하고 작다. 그런데 ‘마술적 위신’에 의탁하여 홀로 존재하고, 전지전능하고, 무엇을 해도 되는 것인 양 자아를 크게 부풀린다. 융에 의하면 이런 잘난 척하고 훌륭한 척하고 아는 척하는 자아의 내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거창한 겉치레 뒤로 가련하고 작은 것이 밀려나 그림자로 자리잡는 것이다. 내면의 열등하고 소심하고 편협하고 졸렬한 그림자는 타자에게 투사되어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업무에는 매우 나이스하지만 타자에 대해서는 매우 치졸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원로원의 의원은 덕 있는 사람이지만 원로원은 야수다”라는 융의 풍자적 예시가 예시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재현되는 작금의 현실!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큰 단체는 도덕성과 지능의 측면에서는 우둔하고 포악한 짐승을 닮은 경우가 있다.”(『인격과 전이』, 50쪽)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전문가 집단의 현실은 융이 묘사한 것과 싱크로율 100%다. 급기야는 전문가 집단의 해체와 몰락을 촉구하며, 차라리 마음 없는^^ 의지 없는^^ AI가 전문가를 대신하는 때가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인간처럼 살지 않기를 꿈꾸는 것이 진짜 훌륭해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인간을 AI로 대체한다고 삶이 더 나아질지 몹시 의심스럽지만 나라는 중생은 그 이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정말 진보를 모른다.
페르소나의 역설 : 분리와 타협, 드러냄과 감춤
깨어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페르소나를 자아로 전유하는 전문가들의 모습에 분노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기는 참으로 쉽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여 무언가에 사로잡히지 않거나 홀리지 않거나 종속되지 않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느새 방일, 방심하여 탐·진·치의 혼침 상태에 빠져서 흐르는 대로 살고 있는 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외부의 압력이 거세게 들어왔을 때 잠시 화들짝 깨어나기는 한다. 그러고는 다시 혼침 상태. 반복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직 통찰하고 분석할 뿐이다. “통찰은 자신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것이고, 분석은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통찰과 관련이 있다면, 분석은 그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어떤 상황을 예로 들자면, 통찰은 자신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번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분석은 그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라마 글렌 저, 조원희 역, 『붓다의 마음이 되는 명상법 : 로종』, 186쪽, 파랑새미디어, 2024) 이런 면에서 융의 정신분석은 불교의 명상법과 마주치는 지점이 있다. 융 또한 우리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통찰하고, 분석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아 용맹정진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융은 페르소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면이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관찰한다. 그리고는 원시 사회로부터 가면의 기능과 가면을 쓰는 복합심리를 이렇게 정리했다. 원시 사회에서는 인격의 격상이나 변신에 이바지하는 실제적 가면이 있었다. 가면을 씀으로써 출중한 개인은 집단정신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페르소나와 동일시하는 데 성공하면 실제로 집단정신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이런 격리가 바로 마술적 위신이다. 집단적 존재였던 ‘출중한 개인’은 가면의 마술적 위신으로 인해 집단과는 분리된 ‘개인’으로 솟아오른다.
원시 사회에서는 개인과 집단정신이 분리되지 않았다. 공동체 사회 속에서 개인은 굳이 개인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개인의식을 따로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가면을 씀으로 해서 집단과 구별되는 ‘개인’이 되었다는 것. 페르소나persona에서 현대적 개념의 개인적personlich이라는 말과 인격personlichkeit이 유래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개인을 요구한 장본인이 바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권력 의도가 이 행위의 동인처럼 보이지만, 독특한 주체처럼 보이게 하는 이 퍼포먼스는 언제나 집단적인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사회조직체가 마술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사회는 한 개인의 권력의지에의 요구와 많은 사람의 복종 의지에의 요구를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하여 그로써 개인적 위신이 실현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집단의 산물이지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인격과 전이』, 47쪽)
그러하니 페르소나에 자아를 동일시하는 건, 집단의 정신과 의지를 빌어 자아를 부풀리겠다는 속셈이며, 동시에 부풀려진 위신으로 집단의 복종을 얻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페르소나는 개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하면서 집단의 의도를 감추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복종하면서 복종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그 이름이 말하는 대로 다만 집단정신의 가면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 개별적이라고 믿게 만드는, 마치 개성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가면이다. 사실은 집단정신이 그 속에서 발언하는 연기된 역할일 뿐이다. 가면을 벗기게 되면 개성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집단적인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참다운 것이 아니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하는 것에 관한 개체와 사회와의 타협의 소산이다. … 이 타협에서는 흔히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가상이며, 농담 삼아 말하자면 2차원적인 현실이다.(『인격과 전이』, 56쪽)
‘드러내고 감추는’ 페르소나의 역설, 그 메커니즘을 꿰뚫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포획될 뿐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유능한 사람인 양 뽐내면서 사회에 복종하고,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일을 당연한 듯 행사할 것이다. 방법은 페르소나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정신의 팽창을 직시하는 것, 가련하고 작은 인간을 부정하지 않는 것일 텐데 과연 가능한 것일까?
페르소나의 해체 그리고...
융에 의하면 인간은 집단성에 압도된다. 개체가 되는 것, 본래의 자기가 되는 길보다 집단을 위해 자기 포기를 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인격과 전이』, 76쪽) 한술 더 떠 융은 비관적인 진단을 내놓는다. 인간은 집단의 의도에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보다 종속될 능력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인간의 탁월한 모방 능력, 이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인간은 집단의 의도에는 대단히 유용하고 개성화에는 대단히 유해한 하나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모방이다. 모방 없이는 대중의 조직체, 국가, 그리고 사회질서도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를 만드는 것은 법률이 아니라 모방이다.”(『인격과 전이』, 53쪽) 암시, 피암시, 정신적 전염까지 포함하는 모방이 인간을 만들고 사회를 만든다. 법이 아니라 모방이 사회질서를 만든다. 개성을 외치면서 차별화된 나를 찾겠노라 열심히 시도했건만 그 또한 모방이었음을 알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개성 추구 또한 기획된 의도에 의한 것이었음을 자각한 경우는 얼마나 많았던가. 그 배신감이란.
융에 의하면 페르소나의 해체는 자아가 집단무의식을 향한 통로를 열 때 가능하다고 한다. 외부 현실에 치우친 자아에게 방향 전환의 기회를 주는 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불균형을 참지 못한다.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으니 ‘원형의 상’으로 암시할 뿐이다. 알아차리는 건 자아의 몫이다. 집단정신을 향해 통로를 여는 것은 개인에게는 삶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페르소나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는 건 집단정신이다. 자아가 집단정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큰 가치를 버리지 않는다면 자아는 이 집단정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페르소나는 해체된다.
융은 꿈이나 환상으로 드러난 원형 상징을 드라마처럼 이야기한다. 마술적 위신에서 벗어난 자아는 큰 진리, 궁극적 인식의 행복한 소유자가 되려 한다. 또는 개혁자, 예언자, 순교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인간은 개체의 한계를 벗어나 팽창하고 싶어 한다. 현실에서는 위신을 갖춘 페르소나로, 무의식에서는 현실을 거스르고 새로운 흐름을 일으키는 반동적 존재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요즈음 예언자, 순교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왜 검사, 정치인들과 손잡고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고 광적으로 난리법석을 떠는 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이들은 쌍둥이나 형제처럼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고 있다. 가련하고 작은 인간을 감추고자 정신 팽창에 이른 이들이 동질감과 동지의식을 느끼는 건 당연한 듯하다. 이들이 보상 관계로써 서로에게 밀착해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정신 팽창의 한 쌍으로 묶여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융은 참으로 유머러스하다. 무의식의 작동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실감나게 풀어준다. 무의식은 의식의 수준을 안다. 자아를 꼬시기 위해 타협도 불사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무의식도 의지를 내며, 눈높이 선생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예언자의 초인간적 책무를 버거워할 것임에 틀림없는 자아를 위해 맞춤형 인격을 제시한다.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자의 제자다. 예언자가 ‘위엄 있는 불쾌함’을 감수해야 한다면, 제자는 ‘달콤한 위엄 없는 평안’을 누리기 때문이다. 제자는 예언자의 발밑에 앉아서 자기 고유의 생각을 삼간다. 제자에겐 정신적 게으름은 미덕이 되고 적어도 절반은 신이 된 것 같은 기쁨이 허용된다. 모든 책무는 스승 쪽으로 전가되므로, 제자는 스승을 부추겨 격상시킴으로써 은연중에 자신의 가치도 격상시킨다. 자아가 동일시하기에 용이하게 보이지 않는가?
자신은 단지 제자일 뿐이지만 스승이 발굴한 큰 보배의 공동관리자이기도 하다. 제자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비방중상하며 개종자를 모집하고 인류에게 오직 하나의 빛을 던져주는 일을 최고의 의무요, 도덕적인 필수성이라고 본다. 예언자의 제자들은 겉으로는 겸손한 페르소나 뒤에 숨어 있다가 집단정신과의 동일시에 의해서 팽창되어 갑자기 세계의 무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다.(『인격과 전이』, 73쪽)
예언자와 예언자의 제자들 덕분에 페르소나가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자아는 집단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집단정신을 자아라고 착각하는 또 다른 환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자아는 예언자, 혹은 예언자의 제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개체가 예언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아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아와 예언자가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타자를 새롭게 해석하고,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 새로운 현실 속에서 개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융은 개체가 고유하고도 특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유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한다. 개체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융은 개체가 별도로 실체처럼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의식의 자아가 외부의 집단성과 상호작용하고, 내면의 집단성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개체가 만들어질 뿐이다. 실체적 개체가 별도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외부와 내부의 길항 관계 속에 개체가 떠오른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융이 자아ego와 자기Selbst를 구분한 이유는 실체로서의 나를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체는 구성된다. 단일한 나는 없다. 나가 있다면, 자신을 주체로 착각하는 의식의 자아가 있을 뿐이다. 고유한 중심이 있다면 외부와 내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평형을 맞추는, 의식과 집단정신의 마주침 속에서 끊임없이 개체를 구성해가는, 객관화가 불가능한, 오직 작용만 하는, ‘자기Selbst’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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