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에서 활동하는 성민호 샘의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는 편집자인 저에게 특별히 인상적인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초고인 글과 지금 책으로 나온 모습이 굉장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초고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것이 특히 초보 필자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한땀 한땀 공들여 나아간 원고를 건넨 민호샘을 편집자로서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응원하면 다음 글까지 내처 달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친구들과 함께하는 응원이 역시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체 네트워크의 청년샘들에게 함께해 주시겠냐고 물었고, 기꺼이 함께하겠다는 답변을 모두 열 분에게 받았습니다. 열 명의 리뷰어 가운데 두 분은 장년 분들입니다. 특히 강민혁 선생님은 정말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리뷰를 맡아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리뷰를 써주시지는 못했지만, 진심이 담긴 응원을 보내주신 선생님들도 계십니다. 청년 저자가 더 나아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 명의 공동체 분들이 전하는 응원도 꼭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강민혁 선생님의 글로 응원을 시작합니다.
『청년, 루크레티우스와 만나다』 리뷰 ①
“마주침”은 영원하다―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이 선사한 새로운 삶
강민혁(은행원철학자,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처음 내가 연구실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이미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해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척 개성 넘치고 독특한 에너지를 내뿜는 젊은이들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캐릭터를 리얼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들은 뭔가 ‘진짜’를 찾겠다며 ‘가짜’ 세계에서 탈출하여 휘휘 돌며 방황하는 나침반 같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느 순간 방향이 결정되면 가공할 위력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학술제나 세미나에서 어떤 친구들의 글을 보면, 그들은 소름 끼칠 정도의 아름다운 직관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 아직 글을 생산하지 못한 경우에도, 가만히 들어보면 글 쓰는 손이 머리 돌아가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라고 여겨졌다. 아무튼 나는 그때 이 친구들이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민호의 이 글(『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에는 예전의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나 다른, 어떤 막막함이 가득하다. 그는 폐쇄적인 시골 개척교회에서 자랐다. 교회 규칙에 따라 아버지, 어머니와 따로 떨어져 살았다. 어머니는 가끔 식당에서 마주칠 뿐이고, 아버지는 주일날 예배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가 아버지와 그곳을 떠나 들어간 고등학교는 기숙형 대안학교였다. 그는 대학 전공이었던 환경공학과를 알아가면 갈수록 사슴벌레 한 마리도 살릴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처음 시작한 인문학이 자신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처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 공부를 하니 전공을 넘어서 과학까지 회의하는 단계에 이른다.
나는 그의 삶에서 숨이 막힐 듯한 불안과 공포를 보았다. 결국 이 땅에서 삶이란 불안과 공포를 쌓아 올리는 일. 어머니는 삶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신앙의 벽을 쌓아 올리고, 저자는 불안과 공포를 다스리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곳이 불안과 공포를 더 쌓아 올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이내 그곳을 나온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15년 전 내가 연구실에서 보지 못했던 젊은 친구들의 불안과 공포가 여기서는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 책은 젊은 영혼의 두려움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죽음, 해체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생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뒤로 갈수록 더욱 강해진다. 31, 47, 92, 99, 101, 140, 201, 211, 228, 234, 242, 252, 254, 263, 264, 266쪽)
저자는 이 탐구에서 출발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전체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불안과 공포라는 정념과 싸우는 무기로서 원자론의 자연학이다. 사실 기존 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저자처럼 본격적으로 자연학을 정념을 다스리기 위한 무기로 보고 루크레티우스 텍스트를 세밀하게 살피고 자기 생각을 전개한 것은 드물다. 저자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전체를 샅샅이 뒤져 이 정념과 자연학의 관계를 정리해낸다. 이 글을 읽으면 원자론의 자연학이 인간주의적 정념을 넘어서서 일종의 ‘자연-되기’임을 강렬하게 깨닫는다.
나는 은행원이다. 평생 꽉 짜인 시스템에서 살아왔고, 현재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엄격한 상하좌우 관계, 완벽한 효율. 이 안에서는 이것들과 헤어질 일은 없다. 그게 좀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기를 상상하기보다, 나 자신의 사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마음이 쏠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고, 그 사적인 세계란 게 불안과 공포로 휩싸인 허구란 걸 알게 되는 시점에 나는 연구실에 갔다. 사실 그런 시점이 되면 누구든 가족부터 회사까지 별별 문제가 다 터지고, 누구나 기존엔 생각도 못할 온갖 기묘한 일을 겪기도 한다. 아마 연구실에 제 발로 찾아간 것은 어차피 난감한 일을 겪어야 한다면 뭐라도 해보고 쓰러지자는 심리가 있었을 것이다(아무튼 안 하는 것보단 낫다, 는. 어쨌든 나아가야 한다면, 몸부림이라도 쳐보자, 라는).
연구실은 그러니까, 내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피난한 쉼터였거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교차로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원자론의 핵심이 ‘원자’라기보다 그 원자가 운동하는 ‘허공’이라는 점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존재론과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허공을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비어 있음)이라고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효하다. 아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있는 허공 속에서라야 운동한다. 허공이 있어야 원자들의 결합, 배치가 허용되어 세계의 새로운 구성이 가능해진다. 그러고 보면 불안과 공포로 상처 난 삶이 어쩌면 나름대로 자양분이 가득한 것이었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도 된다. 지금까지도 살면서 또렷이 기억나는 건 왠지 이 부정적인 세계인데,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이 부정적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던 ‘허공’, 바로 연구실이다. 연구실은 나 같은, 그리고 성민호 같은 주체들이 결합하고 새로 배치되던 ‘허공’이다. 여기가 교차로가 되어 저자도 미래를 새로 만들어 갈 것이 틀림없다.
나도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에 매혹된 사람이라, 그들의 글과 관련해서 여러 편의 글을 써보았다. 글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 중 하나는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끄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점이다. 내게 철학적인 글의 재미는 허구적인 이야기도 아니고(문학), 인간 군상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사회)도 아니며, 사물들의 현상적 법칙(과학)을 기술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나의 사유가 나아가는 곳을 관찰하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내 자신을 바꾸는 일이라는 점에 있다(나는 오로지 이것을 믿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나는 글쓰기 대상 자체가 ‘나’라는 이 사실이야말로 철학적인 글이 다른 글과 크게 다른 점이라고 생각해 왔다(누군가 문학의 1인칭 시점이 그러지 않느냐,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 자기이지, 저자 자신의 실질적 자기가 아니다. 철학은 초월적 주제를 다룰 때조차 자기를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철학적인 글의 문장 하나하나마다 나의 밑천을 전부 털어놓지 않고서는 탄생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성민호의 글은 자신의 밑천을 모두 밀어 넣은 분투의 글이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고대 철학을 전공한 학자라면, 저자가 정리한 원자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새로울 게 없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원자와 허공을 ‘있는 것’(원자)과 ‘없는 것이 있는 것’(허공)으로 존재론적으로 정리하고, 에피쿠로스파에서 원자가 나눌 수 없음에도 ‘부분’을 가지는 것은 모순인데, 저자는 그것을 ‘최소-부분’으로 정리해내며, 원자가 스스로 운동하는 출발로 ‘무게’를 상정하는 것, 그러나 운명적 경로를 벗어나려면 무게로는 안되고, 결국 클리나멘이 나와야 한다는 점 등등 그동안 원자론자들이 원자론이 갖는 모순을 돌파해 왔던 장면을 젊은 눈으로 잘 정리해 보여 준다. 아마도 내가 저자의 정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성민호의 분투와 원자론의 분투, 그리고 원자 자체의 분투가 서로 겹쳤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세계의 구성과 해체를 설명하는 고대 원자론에 늘 동감해 왔고, 앞으로도 틀림없이 계속 그것에 터 잡아 생각해나갈 것이다. 이 사유가 아니라면 어떤 사유로 안경 삼아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게 원자론은 사유의 사유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주의적 주체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이라는 해체 이후 ‘나’라는 주체 감각이 사라지고, 더 이상 그 전의 합성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로 다시 눈을 뜨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나’를 잊어버린 ‘다른 나’란, 사실 그 ‘나’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저자는 루크레티우스를 통해서 아주 새로운 돌파를 보여 준다. 루크레티우스는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2:293) 끊임없이 균열이 발생하여 비껴남이 일어나고, 따라서 “사물들의 총체는 항상 / 새로워지고 필멸의 존재들은 서로 차례 바꿔 산다.”(2:75-76)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문구를 벼리 삼아 이렇게 말한다. “이 우발적 국면 전환이 마주침이다. 늘 만나던 것들이 아니라 미지의 것들을 만나는 사건이자, 동시에 스스로 미지의 것이 되어 버리는 사건.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이어져 온 비껴남과 마주침이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232쪽). 그는 순식간에 루크레티우스의 핵심, 그러니까 원자와 허공만 영원하다는 명제를 아주 다르게 뒤집어 버렸다. 마주침이라는 사건 자체가 영원하다! 모든 것은 가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원자 차원에서부터 미지의 것을 만나기를 갈구하고, 나아가서 스스로가 미지의 것이 되기를 갈구한다. 우리는 의식 이전에 이미 마주침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되면 불안과 공포와 같은 두려움의 정념은 마주침을 기대하는 욕망의 전조(前兆)가 아닌가. 저자가 발견한 루크레티우스의 자연학은 인간주의적 주체의 욕망을 넘어서서 우리들에게 스며든 자연의 욕망을 깨닫게 한다. 두려움은 자연의 욕망이 남겨놓은 전조이다.
그것은 자연이 욕망과 불안의 합성체라고 할 만한 징표이기도 하다. 자연은 해체되고 구성하는 욕망을 출현시킬 때 늘 불안을 품는다. 불안은 기존의 것을 애도하고, 미지의 것을 욕망하는 시점에 출현하는 새로운 합성체의 전조이다. 성민호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자연학이 왜 삶을 설명하는지를 통찰하게 한다.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행위, 심지어 내 자신의 삶과 고민을 꺼내어 철학적인 글을 쓴다는 일은 어쩐지 창피한 일이다. 나는 글을 쓰다 보면, 마치 내 마음 속을 벌거숭이로 남들 앞에 내던지게 되어 상당히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 부끄러움을 단숨에 넘어 자신의 새로운 통찰을 다듬어 내놓았다.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이제 새롭고 아름다운 사유의 합성체가 탄생하려는 것이니까. 다시 되새겨보지만, 원자는 오로지 계속 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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