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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반쪼가리 자작』 - '완전한 인간'은 누구인가?

by 북드라망 2017. 4. 11.

이탈로 칼비노,『반쪼가리 자작』 

- '완전한 인간'은 누구인가?



때때로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가 젊기 때문이다.

-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반쪼가리 자작』전집2권, 114쪽


아직 젊기 때문인지 우습게도, 가끔씩, 정말로 아주 가끔씩 나는 왜 천재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가끔이 아니라 자주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못할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글을 못 쓰지', '나는 왜 이렇게 읽은 책이 없지', '하필 나는 왜 이런 아시아의 변방에서 태어난 거지', '왜 우리집은 부자가 아니지' 등등. 다시 말해 삶 전체가 온통 '결여'로 가득차 있었던 셈이다. 어쩔 수 없는 '젊음'의 극단성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면 20대 초입에 들어서고 나면 '세계'가 의식 속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읽는 책들이 달라지고, 보는 세상이 넓어지고, 온갖 사람들의 말이 들려온다. 이 와중에 평생을 좌우할 '세계관'이 형성되고, 그 세계관에 적합한 지식들을 흡수해 가는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것이 튀어나오고, 들어도, 들어도, 봐도, 봐도 새로운 들을 것, 볼 것이 튀어나온다. 


당연하게도 '세계'는 압도적이고 나는 초라하기만 하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아주 작은 '확신'이 한방울만 주어져도 곧장 극단주의자가 되고 만다. '극단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무결함'에 대한 강박이다. 99%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도 단 1%의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만다. '극단주의'의 주변은 황폐함만이 남는다. 


본문 페이지가 100페이지 조금 넘는 '긴 단편' 소설이다. '긴 단편'은 칼비노 본인의 표현.


칼비노의 소설 『반쪼가리 자작』은 '인간'과 '인생'에 관한 은유들로 가득차 있는 소설이다. 아버지로부터 '자작' 작위를 물려받은 '메르다노'는 전쟁에 참가하고,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반쪼가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먼저 돌아온 것은 '극단적인 악'만 남은 '반쪽'인데, 이 악한 메르다노는 보이는 것마다 '반쪽'으로 가르며 돌아다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만이 남는다. 영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관용 따위는 없다. 


메르다도는 피오피에르와 그 일당들에게 약탈죄로 교수형을 선고했으며, 또한 약탈당한 편에게는 밀렵죄를 물어 그들 역시 교수형에 처하라고 선고했다. 그리고 수비대에게 역시 너무 늦게 현장에 당도하여 밀렵꾼들의 실책도 산적들의 실책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내렸다.

- 30쪽


그의 '악'를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분열되어 '악'만 남은 메르다노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는 순간 이야기 속의 다른 캐릭터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대목이 아주 인상적이다.


내가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트렐로니, 피에트로키오도, 위그노들 그리고 문둥이 같은 반쪽짜리 인간의 표식을 지닌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하고 있는 주인은 바로 메다르도 자작이었고 우리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 57쪽


환자를 돌보지 않는 의사 트렐로니, 사형대를 만들면서도 '기계' 자체에만 몰두하는 목수 피에트로키오도, 성서를 잃어버린(교리를 잊은) 종교공동체 위그노 교도들, 하루하루의 감각적 쾌락에만 몰두하는 문둥병자들까지 '반쪽 인간 메르다노'를 통해 비춰본 세계는,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반쪽투성이 인간들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반쪽'이 지배적인 세계에서 '온전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반쪽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온전한 인간'과 '반쪼가리 인간'의 운명은 확연하게 대조된다.  메르다노에게 작위를 물려준 아이올포 자작은 '절망' 속에 죽는다. 메르다노 가문의 모두를 키워낸 유모 세바스티아나는 문둥병자로 낙인찍혀 영지에서 추방 당한다. 악한 메르다노에게 청혼을 받은(평생 갇혀 살 것을 요구받은) 양치기 소녀 파멜라는 동굴로 도망가 자기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온전한 인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절망', '추방', '유폐'였다. 


모두가 공포의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악한 메르다노'의 영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반쪽, 선함만이 남은 반쪽이 귀환한 것이다. 그는 '악한 반쪽'이 손상시킨 동물들을 치료해주고, 나그네에게 선행을 베풀고, 이야기의 화자인 (메르다노의) 외조카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영지의 사람들은 '선한 반쪽'에게 기대를 건다.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가고, 세상과 격리되어 자신들만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위그노들조차 그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나름의 '환대' 마저 행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그의 '선행'을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선행'은 너무나도 '무결'한 것이어서 (조금 극단적으로 보자면) 종래의 '나'를 해체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 이르러 '순수한 악으로서의 메르다노'와 '순수한 선으로서의 메르다노'가 분열된 채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악한 메르다노'는 외적인 공포의 기호로서 사람들에게 작용하고, '선한 메르다노'는 내적 공포의 기호로 작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고, 후자는 이렇게 사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윤리'가 문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우연히 네가 반쪽이 된다면 난 너를 축하해야겠다. 얘야, 온전한 두뇌들이 아는 일반적인 지식 외의 사실들을 알게 될 거야.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 57쪽

이건 반쪽짜리 인간의 선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물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 그들 나름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지. 내가 성한 사람이었을 때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머거리처럼 움직였고 도처에 흩어진 고통과 상처들을 느낄 수 없었어. 성한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지. 반쪼가리가 되었거나 뿌리가 뽑힌 존재는 나만이 아니야, 파멜라. 모든 사람들이 악으로 고통받는 걸 알게 될 거야.

- 84쪽

재미있는 것은 양쪽 메르다노 모두 어떤 '앎'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한 메르다노'는 '일반적인 것을 뛰어넘는 앎'을 화자인 외조카에게 약속한다. '선한 메르다노'는 세상 모든 이의 고통에 대한 앎을 선언한다. 이 두가지 앎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극단주의들 간의 대립이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는 주장에 근거한 인간적 폭력,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스스로를 구원자로 여기는 종교적 광신까지, 두 '반쪼가리'의 말들 속에는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극단성' 내지는 '순수성'에 대한 강박들이 마치 결정처럼 맺혀있다. 


이제 어떤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과연 완성된 인간이란 어떤 것일까? '순도'로만 놓고 보자면 반쪼가리 메르다노들은 그 어떤 인간들보다 '순수'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인간의 '완성'을 표상하는 존재들일까? 작품의 결론에서 칼비노는 메르다노를 말 그대로 합친다. '순수한 것들'을 '불순하게' 만드는 셈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순하다. '삶'이 가능하려면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 앎에만 몰두하는 인간은 가책없이 남의 삶을 망가뜨린다. 순수하게 도덕만을 추구하는 인간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차라리 너무나도 불순해서 모든 것에 섞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자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외삼촌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 114쪽

그러나 이미 배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나는 여기 이곳, 의무와 도깨비불만이 가득 찬 우리의 세계에 남아 있다.

- 116쪽

누구도 '우리의 세계'에서 떠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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