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루쉰, 길 없는 대지』 - 우리가 사는 곳이 인간 세상임을 기억하라

『루쉰, 길 없는 대지』 

- 우리가 사는 곳이 인간 세상임을 기억하라



많은 스승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강조해왔고, 그 어구가 이미 상투어가 되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제 ‘균형 잡힌 시각’은 아무런 의심 없이 갖춰야할 덕목 중에 하나가 된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반화된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그걸 갖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까 어떤 사태, 인물, 현상 등을 두고, ‘하나’로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훨씬 쉽고, 더 선호된다. 그렇게 한번 정리를 하고 나면, 그 ‘하나’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뿐하게 넘어가버리거나, 의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묻어버리고 만다. 


루쉰을 떠올려보자면, 그의 생은 내내 어떤 ‘균형’ 속에 있었다. 그것은 적과 나를 구분한 후에 평균값을 찾아 ‘적당히’ 가운데 어디쯤에 서있는 ‘균형’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진실에, 당파의 득실을 고려치 않고 혼신을 다해 사선으로 선 균형이다.


적과 동지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싸우는 칼날 같은 자리, 그곳에서 휘두르는 비수의 날카로움과 단호함. 하지만 루쉰에게 이런 면모만 있었다면 나는 그를 존경했을지언정 좋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늘 자신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배반당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나는 루쉰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곳이야말로 계몽의 자리가 아니라 전사의 자리이다.

이희경, 「혁명은 어디에 있을까」, 고미숙 외, 『루쉰, 길 없는 대지』, 북드라망, 2017, 186쪽


이편과 저편이 선 곳이 ‘비빌 언덕’쯤 된다면, 루쉰이 선 자리는 칼날의 가운데다. 서 있는 것 자체가 투쟁인 자리. 루쉰을 ‘존경’ 한다면, 바로 기꺼이 그 자리에 서는 그 용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그 ‘균형’을 위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위대함’에는 어떤 영성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쉰은 자신의 의도에 대한 기대마저 내던졌다.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했든, 그걸 할 때는 다만 그에 충실할 뿐이지,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배반’을 하나의 조건으로 삼았다. 사회적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문제는 이 ‘기대’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기대를 뒤집으면 곧바로 집착이 되고, 이 집착은 대개 그 순수했던 의도마저 훼손한다. 말하자면, 찌질해지고 만다. 


루쉰을 읽으며 나는 재차 확인했다. 내 절망은 세계와 타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 기대의 붕괴에서 비롯된 것임을 내가 구축한 환상에 내가 깔린 셈이다.

(중략)

‘나는 사랑한다. 나는 형체없고 색깔 없는, 선혈이 뚝뚝 듣는 이 거칢에 입맞추고 싶다. 진기한 꽃이 활짝 핀 뜰에서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한가로이 거닐고, 두루미 길게 울음 울고, 흰 구름이 피어나고…. 이런 것들에 마음 끌리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나는 내가 인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 루쉰, 『들풀』, 「일각」, 한병곤 옮김, 그린비, 2011, 93쪽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기대’는 일부러라도 피하는 편이 좋다.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아마 어딘가에 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기대가 언제나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기대가 꺾이는 때에 무너질 환상의 크기는 얼마나 크겠는가. 그때 가서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노라고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 세상’이라는 것을. 기대와 의도가 배반당하는 것이 조건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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