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낭송 경기도의 옛이야기』 - 저 죽일 놈에 대한 다양한 해석

『낭송 경기도의 옛이야기』 

- '저 죽일 놈'에 대한 다양한 해석


넉넉한 살림에도 마부 하나만 두고 사는 대감이 있었는데, 한양으로 여행을 나섰어. 마부더러 말을 끌게 하며 당부했지.

“얘야, 서울은 눈 없음 코 베어 먹을 세상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박효숙 풀어읽음,  『낭송 경기도의 옛이야기』, 「저 죽일 놈이」, 북드라망, 93쪽부터


한양 1894


옛날부터 서울은 그랬나보다. 20년 전에 부모님 없이 처음으로 혼자 서울에 왔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토요일 저녁의 신촌이었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그런데 그 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눈 없음 코 베어 먹을 세상’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런 낯섬,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타인인 ‘도시’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한참을 가다 점심 때가 되어 마부에게 점심을 사 오게 시켰지.

“뭘 사올까요?”

“팥죽 한 그릇만 사 오너라.”

사람은 둘인데 한 그릇만 사 오라니? 괘씸하지만 별수 있나. 마부가 팥죽을 사오는데 대감이 가만히 보니 마부가 팥죽에서 손가락으로 뭘 건지고, 건지고 하거든.

“너 뭘하는 게냐?”

“아, 가져오다 그만 코를 빠뜨렸습니다.”

“에이, 이놈의 새끼! 너나 먹어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부는 팥죽을 낼름 먹었지.


- 같은 책, 같은 이야기


이 이야기는 그냥 단순히 보자면 베푸는데 인색한 양반을 골탕먹이는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마부’가 착하길 기대하는데, 이 마부는 결코 착하지 않다.(물론 잘못은 ‘대감’이 먼저 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교활하게 느껴진다. 마부는 팥죽이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배가 너무 고파서? 그보다는 대감의 괘씸함이 문제였다.


대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이 교활한 녀석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의심은 가지만, ‘실수’ 혹은 ‘무능’을 두고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저 화 한번 내고 말았다. 대신에 어떻게든 이놈을 돌려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대감은 배도 고프고 속이 상해 마부를 어떻게든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 이튿날 대감은 볼일을 보러 잠깐 다녀오기 위해 마부에게 말을 맡기며 말했어.

“내 저기 잠깐 볼일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꼭 말을 잘 붙들고 있도록 해라.”

“예.”

돌아와 보니 마부 녀석이 땅에다 코를 틀어박고는 고삐만 붙들고 엎드려 있는 거야.

“너, 말 어쨌니?”

“아 이거 봐요. 코 배어 간다기에 코를 붙들고 이렇게 엎드렸더니, 어느 놈이 말을 잘라 갔어요.”

“저런 죽일 놈, 저놈을 어쩔꼬!”


- 같은 책, 같은 이야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부놈이 말을 잃어버렸다. 문제는 이 낯선 도시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했던 말이 되돌아와 버린 것이다. ‘코 베어 간다기에 코를 붙들고 엎드렸’더니, 말을 잃어버렸다. 말하자면, ‘코’는 ‘이득’의 은유였던 것. 대감이 괘씸했던 마부는 ‘일부러’ 대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버렸다.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윗사람을 골탕먹일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순진한 척하며 스스로 융통성을 제거하는 방법 말이다. 이 이야기에 ‘담배’를 대입해 보면 어떨까? 국가는 금연을 권장하면서 담배를 팔고 있다. 세금을 듬뿍 먹여서 말이다. 국가의 권장대로 모든 흡연자가 진짜로 금연을 해버리면 국가는 몹시 곤란하겠지.


‘옛날 이야기’가 갖는 매력은 참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바로 ‘열린 해석’이다. 학교 교육 덕분에 권선징악, 해피엔딩 등등의 고정된 이미지들이 있는데, 직접 읽어본 결과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저렇게 뒤집어 볼 수 있고, 이런 저런 해석을 덧붙여볼 수도 있다. 요지는, 상상력을 최대치로 발휘해 볼 수 있는 텍스트라는 것이다. 사람 많고, 낯선 도시에 당도한 시골 사람의 마음이나, 옛 이야기에 비춰본 오늘 날의 모습이나, 불현 듯 끌려나오는 ‘나’의 기억까지, 한계가 없다.


좀 더 나아가서 보자면, 이 ‘옛날 이야기’들을 비틀고, 굴려서 새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길고 긴, 근·현대의 이야기들도 사실은 이 이야기들의 반복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무언가, 상상하고 싶은 이에게 이 여백 많은 이야기들을 권한다.


낭송 경기도의 옛이야기 - 10점
박효숙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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