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장자, 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 첫 번째 수칙, 회의하는 자만이 존재를 바꾼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가?

 

정치란 말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정치가 정말 인간사회에 필요한가를 질문한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정치에 무관심한 채 살았지만, 정치 자체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본 적이 없다. 물론 진리니 도덕이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입하는 모든 가치에 대해 그 기원을 의심하고 파헤치는 일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많은 가치를 거추장스럽고 답답하게 느끼며 살면서도 정작 그 가치들의 기원을 의심해보지 않았다. 원래부터 혹은 옛날부터 있었던 거니까, 세상이 당연하다고 하니까, 기꺼이 따를 따름이다.

 

어찌 보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가치들이 내 삶에 필요한지, 정말 가치 있는지 감히 물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근본을 묻는 일 자체가 매우 위험하기도 하고, 그 질문으로부터 야기되는 혼란을 맞닥뜨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비겁함과 귀찮음, 책임질 수 없음과 책임지기 싫음의 그 사이에서 이런 겁대가리 없는 질문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이 없는 사람이 다르게 산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가치의 가치를 묻지 않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살던 대로 살 뿐이다.

 

 

기원전 4세기에 활동했던 장자는 참으로 용감하다. 장자는 어떤 가치가 좋은지 나쁜지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가치 자체를 묻는다. 그 가치를 정말 원하는지, 혹은 우리 삶에 진짜 가치 있는지 묻는다. 장자는 적당히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회의하는 자이다. 뿌리부터 회의하면, 결단코 그 가치를 따를 수 없다. 하여, 삶을 탈바꿈하는 첫 번째 수칙은 내 삶의 모든 근저를 의심하고 파헤치는 것이다.

 

장자가 제일 먼저 의심한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였다. 너도나도 천하를 잘 다스리려고 방법을 찾던 시대에 장자는 다스림이란 말 자체를 회의했다. 아니 더 나아가 장자는 다스림이라는 말을 참으로 싫어한다.

 

천근(天根)이 은양에서 노닐며 요수 강가에 이르러 문득 무명인(無名人)과 만나게 되자 물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고 싶습니다.” 무명인이 대답했다. “물러가라. 넌 야비한 인간[鄙人]이다. 얼마나 불쾌한 물음이냐. 난 지금 조물자와 벗이 되려 하고 있다. 싫증이 나면 다시 저 아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이 세계 밖으로 나아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며, 끝없이 넓은 들판에 살려 한다. 너는 또 무엇 때문에 천하를 다스리는 일 따위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려 하는가?”

─「응제왕」


장자가 불쾌하게 여기는 일은 바로 이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믿음이다. 『장자』에 나오는 지인들은 어떻게 하면 천하가 다스려지겠냐고 물어오는 인간들을 야비하다고 여기며, 이 물음 자체가 불쾌할 뿐이다. 천하를 그대로 두면 되는데 다스리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냐고? 다스린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장자에게 “治天下”는 존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들에 대한 속박이자 부자유일 뿐이다. 治에 치를 떠는 장자! 저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다스림을 하찮게 혹은 반자연적인 행위로 보며 다스림 자체가 성립 가능한지를 따진다. 그러나 세상은 천하 다스리는 일을 최고로 여기며, 다스려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이득에 목숨을 건다.

 

서민은 목숨 걸고 利를 쫓고, 士人은 몸을 바쳐 명예를 쫓으며, 대부는 몸을 바쳐 가문을 지키고, 성천자는 목숨 바쳐 천하를 지킨다. 그래서 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은 하는 일이 다르고 명칭도 다르지만, 그 본성을 해치고 자기 몸을 희생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장자』, 「변무」, 250쪽

요임금을 칭찬하고, 걸왕을 헐뜯기보다 양쪽을 다 잊고 도와 하나가 되느니만 못하다.

─안동림 역주, 『장자』, 대종사, 현암사, 187쪽

 

서민과 사인은 이득과 명예에, 대부는 가문에, 성천자는 천하에 목숨을 건다. 이러면 천하는 다스려지고 나는 행복한가? 장자는 근본적으로 질문을 바꾼다. 그리곤 외친다. 천하를 지키고 다스릴 것을 문제 삼지 말고, 자기 몸을 본성대로 살게 하는 방법을 질문하라고. 왜냐? 장자에게 '다스려지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스런] 오는(도래할) 세상을 기다리지 말고 지나간 [태평스런] 세상을 쫓지 말라고 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 모른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장자는 무지 비관주의자다. 평화의 시대는 없으며 세상살이란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이란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시라. 단순한 비관주의자인가? 장자는 쓸데없는 낙관도 쓸데없는 비관도 하지 않는다. 현재를 만들고 구성하는 것은 '나'의 몸이다. 시대의 요구대로 살면, 사회가 요구하는 공통관념(봉상스, 일방향)대로 살면 '상(賞)과 벌(罰)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된다. 일척간두의 위기 속에서 무겁게 삶을 끌고 나간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현재를 좌우한다. 희망적 미래도, 희망적 과거도, 특별히 비관적 현재도 없다는 것. 희망과 비관을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의 태도와 방식 때문이다. 과거도 미래도 나의 현재에서 야기된다. 발 딛고 있는 현재의 지평을 제대로 살아내야 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나를 옥죄는 국가주의가, 이득의 추구가 부질없이 과거와 미래를 꿈꾸게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고 삶의 가치를 다르게 갖추고 다른 방식으로 살면 된다.

 

 

내가 현재 발 딛고 있는 지평을 제대로 살아낼 뿐.

 

 

장자는 시대의 봉상스를 해체한다. 모든 사람이 내달려가는 길에 제동을 걸어준다. 이 시대 사람들이 목숨 걸고 다투는 목표가 진정 내 몸을 위하는 짓인지 질문을 던진다.

 

천하에 지극한 안락이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몸을 살리는 안락이란 있을까, 없을까? 지금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며, 무엇을 피하고 무엇에 머물며, 무엇을 따라가고 무엇을 없애 버리며,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싫어해야 하는가! 대저 천하 사람이 숭상하는 것이란 부와 귀, 장수와 명예이다. 즐기는 것이란 몸의 안락,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예쁜 여자, 황홀한 음악이고, 깔보는 것이란 가난과 비천, 요절과 나쁜 소문이다. 괴로워하는 것이란 몸이 편안치 못함, 입이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함, 몸이 아름다운 옷을 걸치지 못함, 눈이 예쁜 여자를 보지 못함, 귀가 황홀한 음악을 듣지 못함 등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하면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들이 육체를 위해 하는 짓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장자』, 「지락」, 447쪽

부자는 몸을 괴롭혀 가며 서둘러 일해서 재산을 많이 쌓아 놓지만 그 재산을 다 써 버리지는 못한다. 신분이 높은 자는 밤낮으로 옳고 그름을 이것저것 깊이 생각한다. 장수하는 자는 늙어서 정신이 흐려져 오랜 세월 걱정하며 죽지 않고 살아간다. 충렬의 선비는 천하로부터 착하다는 칭찬은 받지만 그 몸을 이것으로 살려 나갈 수 없다. 

─『장자』, 「지락」, 448쪽


우리도 장자가 열거한 바의 것들 때문에 울고 웃는다. 내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른 채 목표치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정작 목표에 도달하면 불안해서 더 심하게 내달린다. 장자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던 봉상스는 여전히 해체되지 못했다. 장자는 현실감 제로 지대에서 놀았던 것인가? 영원히 지속하는, 그리고 너무나도 견고한 국가주의와 시스템 우선주의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벗어나고 싶어도 촘촘한 현실의 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민만 한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장자』에서 정신적 황홀경과 안락함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터. 그렇담 장자가 지목한 이 봉상스는 해체될 수 없을까? 이 봉상스들의 가치를 따진다면, 해체될 거다. 

 

 

성현의 추락! 가치의 전도!

 

『장자』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름은 공자가 아니라 공구다. 장자는 아주 쿨하게 공구라 불러준다. 다른 사람에 의해 공구가 디스되거나, 공구가 공구 자신을 디스하는 방법으로 유학의 진리와 가치를 추방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방식은 공자가 숭배해 마지않던 성인들의 도를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장자는 『논어』에서 그토록 위풍당당하며 감히 범접하기 어려웠던 성인들을 왜소하고 찌질하게 만드는데 선수다.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넘겨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해와 달이 돋아 밝은데 관솔불을 계속 태우다니, 그 빛은 헛되지 않겠습니까?…돌이켜 보건대 나는 도저히 부족합니다. 부디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허유는 대답했다. “그대는 천하를 이미 잘 다스리고 있소. 그런데 내가 그대를 대신하다니, 천자라는 명목을 얻기 위해서 대신한단 말이오? 명목이란 실질의 손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더러 그런 손이 되란 말인가요?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오. 자 그대는 돌아가 쉬시오. 내게 천하란 아무 소용도 없소.”

- 『장자』, 「소요유」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관을 밑천 삼아 월나라로 갔으나, 월나라 사람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하고 있어서 관이 소용없었다. 요임금은 천하의 민중을 다스려 세상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나서 막고야산으로 4명의 신인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분수 북쪽의 도읍으로 돌아오자 그만 멍하니 얼이 빠져 자기가 다스리는 천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 『장자』, 「소요유」

 

공자에 의해 중국 문명의 시작이자, 중국 최초의 문화영웅이었던 요임금의 위상은 장자에 와서 한순간에 보잘것없어진다. 요임금은 허유가 쓸모없다고 차버리는 천하를 한껏 소중하게 여기고, 통치 자체가 소용없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송나라의 어리석은 모자 장사만큼이나 세상에 어둡다. 즉 자기 세상에 갇혀, 다른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세상에 갇혀, 다른 세상은 전혀 알지 못했던 요임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장자는 다스림이라는 말 자체를 불신한다. 다스림은 모든 인위적인 국가제도, 규범, 이념, 진리, 도덕 등을 말한다. 일종의 시스템이다. 천하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존재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장자는 그 어떤 통치 형태도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최선이나 최적의 통치조차, 통치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이라면 존재에 대한 구속이 되기 때문에 조금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장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통치 형태 중에 가장 나쁘고 가혹한 방식의 통치야 너무 명백하게 잘잘못이 드러나므로 쉽게 비판하고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윤리적인 방식의 통치는 더 무섭게 존재를 사로잡으며, 윤리의 그물망 안으로 존재를 옥죄고 포획하는데도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윤리 앞에 인간은 무장해제된다. 이런 점 때문에 공자의 인의는 그 무엇보다 더 위험하고, 더 강압적인 통치방식으로 애초에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천하가 다 그 몸을 희생하고 있다. 그가 인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세상에서는 군자라 하고, 재물을 위해 몸을 바치면 세상에서는 그를 소인이라 한다. 둘 다 그 몸을 희생한다는 짓은 같은데 혹은 군자라 하고 혹은 소인이라 한다.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도척 역시 백이와 마찬가지였다. 어찌 또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을 그 사이에 둘 수 있겠는가?

- 『장자』, 「변무」


순임금은 인으로 민심을 모았지만, 인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차별한다. 또한 다분히 중니(공자)라 짐작되는 중시가 사람들을 교화하려고 내세운 규범과 법도는 거짓에 불과하다. 존재들을 극한의 위기로 내모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희대의 강도 도척이나 세상이 인자라 칭송하는 백이나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같다고 한다. 인의가 우리의 귀한 생명을 해친다면 재물 때문에 희생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더 나아가 재물은 몇 사람만 희생하지만 인의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형벌과 전쟁은 자신은 물론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국가는 대부분 그렇게 성립했다. 만물은 저마다 살길을 찾으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국가나 제도는 오히려 생명을 해칠 뿐이다. 그것이 선의일지라도.

 

 

만물은 저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남해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한다.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났다. 혼돈이 매우 융숭하게 그들을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의논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에게만 없다. 구멍을 뚫어 주자.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 『장자』, 「응제왕」


나에게 좋음이 저들에게 좋음일 수 없다. 나에겐 삶이지만 저들에겐 죽음일 수 있다. 다른 이의 생을 이해하지 않은 채 행해지는 선의는 타자에게 작동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의도하지 않은 폭력, 의도하지 않은 살해. 자신이 내린 혜택이 타자에겐 고통이 될 줄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무심함과 무명(無明)이 이보다 더 잘 그려지긴 어렵다. 치국평천하의 근본 원리가 되는 인의조차 본성에 대한 폭압이요, 생명에 대한 암살자라는 것. 성인의 도가 아무리 좋아도 모든 존재에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무조건 성인의 삶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성인처럼 살라는 말 자체가 억압일 수 있다는 것. 개체들의 다양하고도 생동하는 삶의 의지가 균일화되어버리는 순간, 다른 생의 충동은 모두 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통치는 생명의 근본 원리와 무관하다. 아니 생명의 원리에 배치된다. 장자는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제대로 잘 유지하는 것, 건강하게 살다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흐름에 역행하는 모든 것에 매달려, 도덕이니 통치니 하는 따위의 명분을 덧씌울 뿐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지식을 전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장자를 읽고 난 후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다. 내려놓고 단념하는 수련!


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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