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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장자』, 마이너리티의 향연

중년에, 『장자』 다시, 새롭게 읽기

by 북드라망 2017. 3. 9.

『장자』 다시, 새롭게 읽기

 

 

1. 중년, 그 미혹의 시기

 

『장자』를 이야기하려면 나의 40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를 읽었던 그 40대는 공자님이 말씀하신바 ‘불혹(不惑)’의 시간대가 아니었다. 40대는 그야말로 미혹이었다.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평정심은 여간해서 유지하기 힘들었고, 오히려 심하게 흔들리는 갈대로 한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40대를 겪어보니 미혹이 심해서 공자님 같은 성인만이 불혹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

 

40대 이전, 나는 희망에 가득했다. 20대, 30대를 열심히 살면 40대는 당연히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20대, 30대에는 큰 이변 없이 정규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나아갔다. 학자를 꿈꿨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박사를 착실하게 이수했다. 또한 20대 후반에 결혼해서 별 이상 없이 가정을 꾸렸다. 외형상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아이들을 때맞춰 학원에 보내며, 더불어 정규직을 얻기 위해 성실하게 일했다.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쥐고서 그야말로 불철주야 뛰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40대에 다 보상을 받겠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 자체가 오만이고 착각임을 그때는 몰랐다. 막상 40대를 넘어서자 마음먹은 대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성실하게 살았으니 목표를 달성하리라 확신했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이 늘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가정생활은 행복하지도 않았고 평안하지도 않았으며, 정규직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필수 코스가 아니었다. 왜 나만 안 되지, 왜 나만 불안하지, 왜 나만 고통스럽지? 이런 질문을 입에 달고 지냈다. 급기야는 열심히 살았는데 사회와 주변이 안 따라줘서 그렇다는, 그 유명한 불치병, ‘남 탓 병’에 시달렸다. 당연히 생활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40대에도 남 탓, 세상 탓을 하며 미혹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믿음이건만 어찌하여 그때는 그토록 확고했는지.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과연 그런가? 40대가 되면 누구나 다 목표를 이룰 수 있는가? 40대는 안정기라고 누가 정해놓았는가? 인생에 있어 탄탄대로는 어떤 것이며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어떤 일의 인과가 그렇게도 딱 맞아 떨어지는가? 그럴 수 없음을 몰랐다. 그러니 불평불만으로 점철된 40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는 게 못마땅하고 결핍감에 시달렸던 상황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진 것은 못 보고 갖춰야 할 목록만 올려다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생기 없고 우울한 중년으로 ‘늙어가는’ 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의 공부는 한낱 지식일 뿐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처음엔 공부가 중요했는데 이즈음에는 공부해서 얻을 결과에만 연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공부를 즐기는 학자가 아니라 학자라는 직업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했던 것이다. 게다가 40대는 안정을 구가하며 누려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망상에 시달리며 한정 없이 가라앉았으니 꼴불견도 이런 꼴불견을 어디서 볼 수 있으랴. 이런 성찰이 가능했던 계기는 순전히 『장자』라는 텍스트로 인해서였다.

 

 

2. 다시 만난 『장자』

 

나는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던 그 40대를 거치면서 『장자』를 다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불안정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장자』를 찾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장자』를 읽은 적이 있고, 한문을 조금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자』를 강독할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내 기억 속의 『장자』는 재미는 있지만 황당하고, 알 듯 모를 듯 거대하면서 몽롱하고, 아름답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를 담은 이야기였다. 이 기억 때문에 『장자』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설 뿐 별도의 호기심이 일지는 않았다. 다만 곤고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청정무구 원시의 세계로 잠시나마 도피해보리라는 알량한 기대감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40대에 읽은 『장자』는 예전 어설프게 읽은 그 『장자』가 아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원문을 짚어가며 『장자』의 내편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바, 『장자』에 관한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나 버렸기 때문이다. 『장자』 어디에도 현실의 장에서 도피하라는 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현실 저 너머의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상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다르게 살기를 아주 강렬하게 전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유토피아를 담은 이야기로 가득했던 『장자』를 다시 만나다.

급기야 『장자』는 내 머릿속의 온갖 관념들에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절대적으로 옳고 타당하다는 판단 기준,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념과 삶의 방식들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장자』는 미혹에서 헤매던 나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내가 미덕으로 여긴 일종의 신념과 양심 그리고 삶의 목표와 상식 따위를 한 번에 조롱하고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동시에 일종의 불 뚝심, 반항심과 더불어 한 판 싸워야 할 것 같은 전투심이 일어났다. 뭐, 어쩌라고?

 

그랬다. 『장자』 속의 온갖 이야기들은 싸움을 걸어왔다. 아니 싸움을 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의 삶에 대해 불만만 가득할 뿐 회의도 질문도 없는 나를 몰아치면서 코너로 몰아갔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안간힘을 다해 뻗대 보았다. 물론 ‘장자’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주인의식이라고는 없는 내가 자신을 온전히 가꾸는 대자유인 ‘장자’를 어떻게 당한단 말인가?

 

 

3. 『장자』, 냉정과 열정 사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장자』는 도가의 3대 경전 중 하나이다. 당나라 때 이르러 『노자』, 『장자』, 『열자』는 도가의 삼대 경전으로 격상했다. 삼대 경전의 주요 화두는 자연(自然), 무위(無爲), 양생(養生)이다. 물론 삼대 경전은 주제 상의 변주도 변주지만, 이 주제를 언어화하는 방식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장자』를 예측불허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읽기 편한 우화 모음집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자』보다는 격이 낮지만 『열자』보다는 심오한 책으로 취급한다. 물론 『장자』는 『노자』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쉬우면서, 『열자』 만큼 재미있고 기상천외한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장자』는 생각처럼 쉬운 책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송할 정도로 해독이 어렵다. 우언에 담긴 뜻을 한참 고민하고 따져봐야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자』를 이해하는 방식도 천양지차이다.

 

보통 『장자』는 현실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철학책으로 취급된다. 현실과 대결할 만한 대안을 주지는 못하지만, 현실의 부조리와 속박으로부터 잠시 도피할 수 있는 정신적 황홀경을 주는 책! 『장자』를 읽고 나서도 이렇게 이미지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중국의 일부 학자는 루쉰의 소설 주인공 아Q의 ‘정신승리법’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아Q는 현실과 제대로 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번번이 패배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스스로 이겼다고 합리화하는 최강의 자대(自大) 캐릭터이다. 아Q에 비유할 때 『장자』는 한없이 무지하고 나약하고 비겁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 결과 『장자』는 저항과는 거리가 먼 책, 영혼에 피난처를 제공하지만 현실적 힘은 전혀 없는 책이라는 낙인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내가 다시 읽은 『장자』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비된 몸과 마음을 깨우는 책이었다. 정신을 마취시키고 마비시키는 데 지나지 않는 책이라면 도대체 『장자』를 왜 읽는가? 과연 그런 책이 고전일 수 있는가? 시대를 거듭하며 살아 있는 책, 시대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책이 고전이 아니던가? 『장자』는 우리들의 지치고 닳은 몸과 영혼을 위로하는 그런 착하고 친절한 책이 아니었다. 장자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냉정했다. 왜 몸과 영혼을 그렇게 지치게 만들었는지, 힘들다고 하면서 왜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지 준엄하게 묻고 따졌다. 오히려 따끔거리고 아팠다. 영혼을 쉬게 하는 게 아니라 몽롱한 영혼에 찬물을 끼얹었다.

 

‘장자’는 현실의 나를 명징하게 보도록 세차게 자극하며 의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열정적이었다. 장자는 우리가 믿는 모든 의지처를 깨뜨리는 데 도사였다. 『장자』는 근원을 회의하는 책이자 기원을 의심하는 책이었다. 조금의 여지도 없이 가열차게 물고 늘어져서, 온 사회가 보편타당하게 여기는 온갖 가치들을 가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너무나 뜨겁게 우리의 실체를 발가벗기고 그 지점에서 다시 삶을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세상과 자신을 성찰할 때는 냉정하게, 질문과 의심은 열정적으로. 장자는 냉정과 열정의 사이를 오고 갔다.

 

이런 점에서 장자는 현실과 무관한 삶을 살거나 현실에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세차게 비판하며 그 현실과는 다른 삶의 지평을 개척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현재 속에서 다른 현재를 만드는 것! 그래서 현실을 피해 은둔하는 신선은 장자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이다. 장자는 현실을 안이하게 바라보거나 적당히 봐주지 않았다. 가혹할 정도로 자신의 시공간을 파헤쳤으며, 그 ‘현재와 현장’이 삶을 지키는 데 적합지 않다면 과감하고도 즉각적으로 새로운 ‘현재와 현장’을 구성하기를 촉구했다. 어찌나 냉정하고 어찌나 화끈하게 질문하고 돌아서는지, 전국시대의 고전으로 사실 이보다 더 센 텍스트를 찾기 어렵다. 이토록 신속하고 근원적인 삶의 ‘해체와 구성’을 보여주는 텍스트를 또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장자는 도피한 적이 없다. 다만 해체하고 탈주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구축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살지 않는 방식으로 살기를 시도한 자, 그가 장자이다.

 

       

4.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장자』를 강의할 때마다 부딪치는 질문이 있다. 나도 『장자』를 읽으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질문이었다. 장자는 자기 시대의 국가와 사회 시스템, 진리, 윤리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았다. 그럴 때 그 자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현재와 다른 삶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 구체적 매뉴얼은 무엇인가? 장자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장자에게 삶에는 하나의 길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들은 자기만의 삶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도달하면 또 질문한다.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다른 삶이 가능한가? 이미 구축된, 그리고 다수에게 승인된 사회를 벗어날 길이 과연 있는가? 그럴 수 있는지 없는지 장자는 답하지 않는다. 그건 존재들의 욕망에 달린 것이다.

 

이런 질문을 자꾸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보다 훌륭하고 의지할 만한 어떤 것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처가 없으면 우리는 불안하고 두렵다. 그래서 계속 믿을 만한 대상, 나보다 위대한 무엇을 찾고 기대려 한다. 그러면서 자유롭기를 원하니 형용모순의 극치이다. 장자는 거대한 사회도, 위대한 인물도, 훌륭한 진리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삶을 바꿔주지 않음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삶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장자』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의 절대적인 삶의 표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삶의 표상이란 게 없다. 더불어 위대한 삶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는 하나로 체계화된 대안적 삶을 거부한다. 우리는 서로가 마이너일 뿐이다. 주류 대 주변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따로 또 같이 가는 소수자로서의 ‘마이너’. 그래서 『장자』 안에는 자기 시대를 자유롭게 살아낸 ‘마이너’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다. 모든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마이너’로서 유쾌하고 자연스러운 잔치에 동석한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우주와 이 시대의 주인으로 각자의 생명을 지켜낸 존재들을 우리에게 환기해준다. 어떤 것에도 기대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40대에 읽은 『장자』는 이렇게 달랐다. 정말 그런지 『장자』라는 고원을 한 걸음 한 걸음 찬찬히 탐험해 볼 생각이다. 장자는 말했다. “길은 걸어서 이루어진다! (道行之而成)” 다시 읽는 『장자』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있기를.   


길진숙 (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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