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4- 자유로운 삶이란?

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4

- 자유로운 삶이란?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사물의 ‘쓸모’를 질문하는 혜시를 등장시킨다. 『장자』에 등장하는 혜시는 장자의 가까운 친구이지만, 늘 장자에게 한 수 배우는 캐릭터이다. 실제로 혜시는 언어와 이름의 본질을 파헤치는 명가(名家)이다. 한 언어 혹은 이름의 명목과 실질을 따지는데 에너지를 온통 소모하지만, 정작 이런 노력이 인식의 전환이나 해석의 전복으로 이어지지 않아 자칫 궤변론자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래서 장자에게 늘 한 소리를 듣는다. 물론 혜시는 우리가 넘보기 어려운 대학자이다. 저서가 수레 다섯 대에 가득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대학자 혜시조차 세상 사람들이 규정하는, 쓸모 있음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쓸모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쓸모를 판단한다.

 

위왕이 큰 박씨를 주길래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나 5석이나 들어갈 정도의 열매가 열렸소.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가 없고, 돌로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니 납작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소. 확실히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부숴 버리고 말았지요.

─안동림역, 「소요유」, 『장자』, 현암사, 41쪽

혜시에게 박의 용도는 물을 뜨거나 담는 바가지에 한정되어 있다. 큰 박은 물을 담으면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이렇다면 박은 쓸모 없는 사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혜시는 이 쓸모 없는 박을 부숴버린다. 장자는 이렇게 박을 한정하는 혜시에게 다른 우화를 들려준다.




송나라에 솜을 물에 빠는 일을 가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겨울에 빨래를 하다 보면 손이 트기 때문에 그 사람은 손 안 트는 약을 만들어 집안에서 사용했다. 한 나그네가 그 소문을 듣고 약 만드는 법을 백금에 사겠다고 제안한다. 솜을 빨아 버는 돈은 몇 푼에 불과한데 백금이라는 어마어마한 값을 주다니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결국 솜 빠는 사람은 나그네에게 약 만드는 법을 팔았다.


그런데 이 나그네는 놀랍게도 오나라 왕에게 손 안 트는 약을 가지고 유세하여 장군이 된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겨울에 수전(水戰)을 펼쳤을 때, 나그네는 이 약을 군사들에게 사용하여 큰 공을 세운다. 이 공적으로 나그네는 봉읍을 받고 영주가 되었다. 반면에 솜을 빠는 사람은 손 안 트는 약을 만들었지만 다르게 활용할 생각을 아예 할 줄 모른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대로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같은 약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이렇듯 하늘과 땅 차이로 갈린다.


물론 장자가 봉읍을 받고 영주가 된 나그네를 부러워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면 부귀를 얻을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물을 하나로 보지 말라는 말이다. 사물은 다면체이다. 시공에 따라 매우 다르게 펼쳐진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순간 다른 삶의 국면이 열린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자는 큰 박은 쓸모없다고 말하는 혜시에게 박이 하나의 쓸모만 갖는 것은 아니라고 깨우쳐 준다. 인간들에게는 작은 박만 유용하다. 그러나 인간적 관점을 벗어나면 큰 박도 쓸모가 있다. 큰 박을 잘라 호수나 강물에 띄어 타고서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장자는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대하는 혜시를 마음이 꽉 막혔다고 표현한다.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길을 절대로 갈 수 없다. 세상의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것. 그리고 사물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눈을 열고 귀를 기울이기. 이런 것이 사물을 대하는 자유이다. 세상의 쓰임에 속박당하지 않으면 사물에 대해 무수한 변용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


또 혜시가 등장한다. 혜시는 큰 가죽나무를 가지고 고민한다.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가 없다. 길에 서 있지만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큰 가죽나무에 빗대어 장자를 비꼰다. 장자의 말은 이 큰 가죽나무와 같아서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 모두들 외면한다는 것이다.


사실 혜시의 관심은 가죽나무가 아니다. 장자의 생각에 어퍼컷! 혜시를 비롯하여 당대 사람들도 우리처럼 장자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거대하고 황홀하기는 한데 현실에서 써먹기는 어려운 말.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천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사유. 혜시는 장자의 말을 재목으로 쓸 수 없는 거대한 나무와 뭐가 다르냐고 물었던 것이다.


장자는 이렇게 대응한다. “너구리나 살쾡이는 몸을 낮게 웅크리고서 놀러 나오는 닭이나 쥐를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려 죽지요. 그런데, 검은 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큰일을 하지만 쥐를 잡을 수가 없소.”


혜시가 말한 쓸모 있음은 너구리나 살쾡이와 같이 사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장자는 너구리나 살쾡이는 그런 쓸모 때문에 일찍 죽고 만다. 검은 소는 쥐를 잡을 수 없어서 오히려 살아남는다. 만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에게 쓸모없음이 그 만물을 살아남게 하는 쓸모가 될 수 있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집이나 가구나 배를 만들 수 있는 재목감이 되어야만 나무는 가치가 있다. 울퉁불퉁 비비 꼬여서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장자는 오히려 인간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이 베이거나 죽지 않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큰 능력인가? 국가 혹은 사회적 관계 안에 갇힌 인간들은 장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뭔가 거대하고 그럴듯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게는 쓸모가 없다. 왜냐? 국가라는 관계망 너머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여 상상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살아야 할 때 엄습할,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에 벗어날 용기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국가시스템을 넘어서 삶의 비전을 찾으라는 장자의 제안이 그럴듯한, 현실감 제로의 이야기에 불과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른 속도, 다른 리듬, 다른 세상 : 소요유(逍遙遊)


그러나 장자는 혜시의 질문에 다시 대답한다. 울퉁불퉁, 비비 꼬인 가죽나무 그대로를 인정하고 활용해보라고. 나무를 꼭 재목으로만 사용할 필요는 없단다. 나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이다. 나무에 대한 시선을 바꾸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지금 선생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서 걱정인 듯하오만, 어째서 아무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자보지는 못하는 게오.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함께 인용한다. 장자의 그 유명한 말, 『장자』 내편의 1장 제목 ‘소요유’의 ‘소요’란 말이 이 대목에서 출현한다. 장자는 혜시에게 쓸모에 집착하지 말고 가죽나무를 심어놓고 나무 옆에서 아무 일 없이 거닐어 보거나, 나무 그늘에 누워서 유유자적해보라고 제안한다.

 

그런데 장자는 그 가죽나무를 ‘아무것도 없는 땅, 드넓고 드넓은 들판’에 심으라고 한다. 비어 있는 공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전제도 없는 땅이다. 나무에 대한 지배적 관념이 없는 곳. 확대해석해보면 상식도 규범도 통념도 제거된 텅 빈 곳. 삶과 사유에 관한한 아무 제약이 없는 곳. 그러면 나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온몸에 온 정신에 꽉 찬 지배적 관념들을 내려놓고 사물과 만나고, 세상과 만나면 다르게 보인다. 물론 나무에 대한 생각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삶에 대한 비전도 달라진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속도, 다른 리듬으로 다른 세상을 열 수 있다.



할 일 없이 거닐고, 누워서 유유자적하라는 것은 게으르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느리게 살기, 한가하게 살기는 작위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사는 행위이다. 내 몸과 마음을 생기 있게 하려면 수많은 작위적 시스템, 나를 균일하게 다스리는 규범,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작위적 시스템의 속도로 리듬으로 구축된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신체의 속도로, 다른 신체의 리듬으로 다른 세상을 내디디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 저 너머에 다른 세계로 이주하거나 초월하라는 뜻은 아니다. 나무의 지배관념을 버리면 나무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지배관념에서 벗어나면 삶의 속도, 리듬, 방법은 달라진다.


이렇게 보면 소요유의 경지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편안하고 탁 트인 상태다. 대붕이 천지로 내려왔을 때 대붕의 삶은 소요유 그 자체가 된다. '소요유'는 정신적으로 여유롭고 평화로운 상태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현실의 척도에, 현재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삶의 방식이, 정신이 함께 자유로워야 한다. 따로 또 함께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한다는 것은 세상의 지배적인 관념, 습관, 제도들과 싸우는 일이다.


요즈음의 행복지수 즉 학벌, 고수익의 철밥통 직장, 펀드와 주식, 아파트 평수, 화목한 가정의 표상, 풍요로운 레저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다른 세상을 열어갈 수가 있다. 사실 사회적 표상으로서의 행복지수에서 벗어나면 인생은 한결 가볍고 여유로워질 수 있다. 남들의 시선이 싫어서, 내 욕망이 그렇게 움직여서 단지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늘 바쁘고 정신없다. 다 채우면 그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다시 목표를 세우고 그러다 지치고 공허해지기 십상이다. 이 순환에서 탈주하면 소요유할 수 있다. 학교가 배움을 왜곡하고, 하나의 배움의 틀로 우리를 억압하고 차별한다면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버리거나, 학교 교육의 틀을 깨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배움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 소요유다. 학교라는 제도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어야 소요유다. 장자가 이 시대에 산다면 자본주의 속에 살되 자본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길을 소요유의 삶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화폐가 증식이나 축적이 아니라 흐름이 되게 하는 길.


글_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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