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2

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 두 번째 수칙, 벗어나는 자만이 존재를 바꾼다

 

 

무-질서한 말하기!


장자가 다스림이라는 제도, 인의라는 규범을 버리는 이유는 자신의 본성을 해치지 않으며, 온전히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 문제는 <장자>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지만, 내편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소요유>와 <응제왕>에서는 느닷없이 하나의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흔들고 멈칫하게 하고 멍하게 만든다. 여기서 제시된 하나의 세계와 그 세계 내적 존재는 이 세상과는 사뭇 다르며,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그런 것이다. 그 세계는 유토피아(없는 공간)가 아니라 차라리 헤테로토피아(다른, 이질 공간)라 명명할 만한 세상이다. 우리의 질서를 교란하는 무-질서! 우리에겐 황당한 모습이요, 허튼소리로 느껴지지만, 장자에겐 그것이 실재 세계요, 진짜 소리다.


우언은 열 가운데서 아홉이고 중언(重言)은 열 가운데서 일곱이며 치언(巵言)은 말마다 생겨나서 시비를 초월한다. 열 가운데 아홉의 우언은 다른 사물을 빌려 도를 말한다. 아버지가 제 자식의 중매인이 되지 않음은 아버지가 자식을 칭찬하는 일이 아버지 아닌 남이 칭찬함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 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이다. 자기 입장과 같으면 따르고 다르면 반대하며 자기 생각과 같으면 옳다 하고 다르면 잘못이라 한다. 열 가운데 일곱의 중언은 언쟁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고 노인의 말이면 옳다고들 하기 때문이다. 나이만 들었지 올바른 사리와 순서를 헤아리지 못한 채 공연히 나이에만 의지하는 자는 선각자가 아니다. 연장자이면서 남에 앞서는 덕을 갖추지 못했으면 사람의 도를 잃은 자이며 사람의 도가 없는 자를 부패(陳腐)한 사람이라 한다. 날마나 생겨나는 치언은 시비를 초월하고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면서 자적하여 그 천수를 다하기 위해서이다. 시비를 말하지 않을 때 사물은 조화를 지닌다. 조화를 지니는 일과 시비를 말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때문에 "시비를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언, 673쪽


장자는 보편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언어,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는 세상의 가치를 의심하고 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식과 통념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사람들이 언표화해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그에 걸맞은 언어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빗대어 말하는 우언이요, 믿을 수 있게 말하는 중언이요, 자유롭게 말하는 치언이다. 이 언어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증도 아니요, 기준을 제시하는 명령도 아니다. 어찌 보면 허구 같고 황당하고 얼토당토 되지 않는, 말 같지 않은 말. 혹여 정신 나간 사람들의 헛소리 같은 언어. 장자는 이런 무-질서, 무-논리의 말 속에서, 언어도단의 그 끝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아가기를 원했다. 세상의 시비를 초월하고, 명령이 아니라 통찰하고 스스로 삶의 방법을 깨닫게 하는 언어. 장자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탈주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사람들, 다른-세계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논리 너머의 언어로 보여줄 뿐이다. 그 세계, 그 소리에 공감해서 통념을 깨고 나가는 건, 우리들의 몫이다.



존재의 전환 : 곤(鯤)에서 붕(鵬)으로의 변화


장자는 자신의 새로운 언어와 문법으로 유가의 성인이 아니라, 장자적 인간형(물태)을 창조한다. 이름하여 성인이요, 지인이요, 신인이다. 이 인간형을 사물적 감각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대붕(大鵬)이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힘을 다해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를 말한다." 

『장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로 변화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곤 물고기가 붕새로 변하고, 붕새는 북명[북해] 지역에서 날아올라 남명[남해] 지역으로 이동한다. 장자는 곤이 왜 붕이 되려 했는지, 붕이 왜 고향인 북명을 벗어나 남명으로 옮기려 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아주 간명하게 곤이 붕이 되는 엄청난 변이의 현장을 먼저 기술한다. 곤붕의 우언을 통해 장자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장자는 어떻게 곤이 붕이 됐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곤이 무엇을 꿈꿨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곤이 갑자기 붕으로 탈바꿈했다. 그 어떤 의지나 행위나 고난도 없이 곤은 붕이 된 것일까? 곤이 붕이 되는 서사에서 생략된 빈자리를 채워보자.


곤이 붕이 된 사연이 뭘까?

 

곤 물고기는 바다 너머를 상상한다. 곤 물고기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살게 한 북명의 바다에서 자기 한계를 본다. 곤 물고기는 바다 그 너머를 미리 보았다. 고정된 채 살아가기 싫다. 바다에서 상식적으로 살기 싫어진 것이다. 곤은 바다 밖을 나갈 수 있는 존재로 변하기를 꿈꾼다. 곤에게 바다는 곤의 생생력을 위축시키는 곳이다. 곤은 바다 너머를 넘보며 바다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심연의 존재, 곤 물고기가 지상 밖 저 너머를 상상하지 않았다면, 그 세계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면 붕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곤은 붕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곤이 붕이 되는 비약 속엔 자신의 존재를 다 던져 노력했을 곤의 몸부림이 생략되었을 뿐이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곤이 붕이 되는 일은 없다. 끊임없이 조금씩 나아가다가 한 번에 비약적으로 변한다. 이전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혁명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로 비약적으로 변신하는 과정에도 마찬가지의 꿈틀거림이 필요할 것이다.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조금씩 조금씩 꿈틀거리다, 한순간 나비로 비약한다.


장자는 이 비약적인 변화를 化라고 했다. 化는 질적인 전환이다. 깨달음은 어느 한순간 찾아오지 않는다. 깨치기 위한 어마어마한 노력과 의지 끝에 깨닫는다. 깨달음은 공부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과 다르다. 어느 한 순간 몸의 리듬과 인식의 장이 비약적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존재 전부를 다 던져야 깨달음은 온다. 적당히 노력한다고 오는 게 아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다 던져야, 존재의 전부를 불살라야 온다. 장자는 곤과 붕의 존재를 통해 편협한 인간 세상을 뚫고 나와 우주와 우주 너머의 세계까지 보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변화하는 존재만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대붕의 비상 : 지상적 존재의 초월

        

장자는 곤이 대붕이 되는 데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대붕은 북해 주변을 비상하는 생활에 만족하지 않는다. 심연에서 지상의 존재로 전이된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곤붕에게 삶은 변화 그 자체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제해라는 이는 괴이한 일을 아는 사람이다. 제해의 말에 의하면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수면을 삼천리나 치고서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9만 리까지 올라간다. [북쪽 바다를]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난 뒤에야 비로소 쉰다.”  

존재 전이를 한 대붕은 북해에서 남해로 날아가려고 한다. 대붕이 된 것으로 끝이 아니다. 대붕은 다시 변이를 꿈꾼다. 이번엔 터전을 바꿈으로써 자신을 바꾸려 한다. 곤이 붕이 되는 비약적 변화만큼이나 이 길 또한 쉽지 않다. 대붕이 되어 수면을 삼천리나 치면서 바람을 타고 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멋지고 굉장하다. 대붕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하지만 대붕은 북녘 바다 주변을 날아오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대붕은 9만 리까지 날아올라야 남쪽으로 갈 수 있는 힘든 여정을 선택한다. 더구나 쉬지 않고 6개월 동안을 난 뒤에야 한 번 쉬는 고행을 기꺼이 감수한다. 대붕은 북해 주변을 날아다니는 존재로 안주하기보다는 견디기 힘든 여정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대붕은 북해 주변을 비상하는 거대한 새로 명명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다. 그 모든 명성을 뒤로 한 채, 북해 주변의 안락한 삶을 완벽하게 버리고 대붕은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비상을 선택한 것이다. 대붕은 낯선 길을 간다. 고향의 익숙함을 버린 자만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이를 꿈꾸는 대붕의 삶

 


그런데 물이 괸 곳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이 없다. 그러니 한 잔의 물을 마루의 패인 곳에 엎지르면 지푸라기는 떠서 배가 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바닥에 닿는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바람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 만한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리나 올라가야 [충분한] 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쌓인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붕은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짊어진 채 아무런 장애도 없이 바야흐로 남쪽을 향하게 된다.


북명에서 남명으로의 자리바꿈은 대붕에게 일대 사건이다. 곤이 붕이 되는 변신만큼 어렵다. 존재 전부를 걸지 않으면 남명으로의 이동은 가능하지 않다. 바람이 불면 가능할 듯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저절로 불어오는 바람이 대붕을 남명으로 갈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은 존재의 변이가 아니다. 대붕이 큰 날개를 띄워 남녘 바다로 가려면 대붕 스스로의 힘으로 구만리까지 바람을 쌓아야 한다. 바람이 구만리까지 깔리지 않으면 날개는 힘을 잃고 대붕은 추락한다. 바람은 저절로 쌓이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오르지만, 날개를 띄울 바람을 모으는 건 순전히 대붕의 힘찬 날개 짓뿐이다. 구만리까지 날아갈 수 있는 바람이 깔리도록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 바람이 대붕을 남쪽으로 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존재의 혁명적 변화와 세계의 혁명적 변화는 어떻게 맞물리는가?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세계가 구조적으로 변해도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진정 혁명의 시대와 혁명의 세계를 사는 게 아니다. 혁명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다. 저절로 바뀌는 것은 없다. 더구나 혁명의 순간을 감지하고 포착하려면 나는 끊임없이 현재와 다른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혁명에 가까운 일상을 살아내야 어느 순간 혁명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고 몸과 마음은 고정된 채, 현실에 붙박인 채 산다면 혁명 할아버지가 와도 내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미래를 꿈꾸는 게 아니라 꿈꾸는 그 미래를 현재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바람을 모으는 대붕의 끊임없는 날갯짓이 없었다면 남명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세계일뿐이다. 대붕의 날갯짓 속에 남명은 이미 도래한 것이다.


글_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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