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뉴요커, 우주의 그로테스크한 우연 (2) : 뉴욕과 스티븐 제이 굴드

by 북드라망 2017. 1. 20.

뉴요커, 우주의 그로테스크한 우연 (2)

: 뉴욕과 스티븐 제이 굴드



<나는 상륙했다(I Have Landed)>의 서문에서 굴드는 날짜놀이를 한다. 그의 외할아버지 파파조가 뉴욕에 처음 상륙했던 날은 1901년 9월 11일이다. 그리고 굴드 가(家)의 도미 100주년인 2001년 9월 11일, 테러가 터졌다. 굴드는 사색이 되어 외친다. “이 극적인 악마의 사건 때문에 파파조의 기쁨과 희망이 연소되어서는 안 된다.”[각주:1]


스티븐 J 굴드


굴드의 글쓰기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과학책이 이런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굴드는 우연적인 사건에 의미부여 하는 일을 좋아한다. 별 연관 없는 주제를 송이송이 연결하는 데 대단한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결코 허풍을 떨거나 길을 잃는 법은 없다. 그의 마음에는 유물론의 과학으로 완성된 ‘GPS’가 있기 때문이다. 이 GPS는 의미의 과학적 위상을 표시한다. 가령, 파파조의 뉴욕 상륙은 굴드라는 개체의 규모에서는 대서특필 감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규모에서는 이민 사례와 폭력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지구의 규모에서는 호모 사피엔스 종이 늘 벌여온 ‘뻘짓’에 불과하며, 우주의 규모에서는 먼지만큼의 의미도 없다. (상륙하든지 말든지!) 

  굴드는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오히려 당당하다. 


“여전히 나는 이 숫자적 우연들이 정확하게 환상적이라고 주장하리라. 왜냐하면 이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반적인 의미나 우주적 의미를 자랑하지 않지만 (…….) 그 덕분에 우리가 수여한 별나고 사적인 의미만을 체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2]

 

과학의 GPS로 찾는 ‘뉴요커’의 좌표


이 에피소드는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과학자의 독특한 포지션을 한 큐에 보여준다. 우주는 절대로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굴드는 과학과 휴머니즘의 경계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있다. 그는 물질세계의 궁극적 무의미를 긍정하면서도 결코 인간적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공존 가능하다고 낙천적으로 주장한다. (파파조의 뉴욕 상륙 작전은 우주적으로 무의미하지만, 그것이 굴드가 자신의 열 번째 에세이 책의 첫 장을 파파조에게 헌사하는 것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이 오묘한 줄타기는 ‘뉴요커’로서의 지혜이기도 하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뉴욕은 사람을 두 번 놀래킨다. 뉴욕 땅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문화의 이름으로 개인을 짓눌러왔던 당위성의 굴레는 해체된다. 탈주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로 돌아간 개인은 도시의 착취 시스템 안에 다시 처넣어지거나, 정체성이라는 표상에 발이 묶인다. 포획이다. 이 모던 도시에서 근대적 자유와 근대적 감옥은 동시에 작동한다. 자유를 찾아 자발적으로 도시에 왔지만 그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자유시간 없이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 혹은,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를 정의할 자유가 생겼지만 그와 동시에 극도로 세분화된 카테고리(인종, 민족, 국적, 성별......)를 따라 매번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물론 뉴욕을 ‘순수한 자유의 땅’이라고 믿는 게 도리어 순진한 일일 터이다. 굴레 없는 인간 사회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뉴욕의 사정은 좀 더 별나다. 이민생활을 통해서 사람들은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의미 뒤에는 항상 무의미의 심연이 아른거린다. 백인은 유색인보다 기득권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더 고급스러운 언어로 인정받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내 일상은 뉴욕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 통렬한 깨달음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감정으로 나타난다. 동기부여로, 무기력으로, 불안으로, 투쟁으로, 꿈으로, 삶의 의지로…….


참, 인간으로 살기가 힘들다. 과학의 우주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더니, 또 인간 사회에서는 주체의 의미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데 괴로워한다. (도대체 인간에게 번뇌 없는 유토피아 상태는 있을까? 의식은 인간의 형벌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굴드는 이 번뇌의 덫에서 자유롭다. 그는 마취제 없이 ’평범한 뉴요커’로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의 해결책은 과학이다. 과학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진정한 방법을 가르쳐준다.


과학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별 대단한 의미 없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자연은 우리의 욕망과 열망, 꿈과 희망에 무관심하다.”[각주:3] 인간뿐만 아니다. 현재 존재하는 생명체는 전부 “생명의 테이프를 처음부터 다시 재생해본다면”[각주:4] 간택되지 못했을 우연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우연은 정말 무의미일 뿐일까? “그로테스크한 우연”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이 우연의 끝자락에는 내가 내 의지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우연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세상에 불변하는 의미가 있다는 본질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고 나면, 오히려 불완전하나마 새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규모의 효과”[각주:5]를 이해하는 것이다. 시공간의 규모는 인간의 의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인간은 지질학의 규모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하지만, 박테리아의 규모에서는 영원하고 장대한 서식지다. 규모를 다르게 설정하면 개체의 단위부터 인과관계까지 모두 달라진다. 따라서, 의미를 끌어낼 때에는 이 의미가 실제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지는 규모와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 종이 스스로의 의미를 가꿀 수 있는 시공간의 규모를 ‘제대로’ 실감해야 한다.


그러니 과학의 GPS를 켜고 뉴욕을 바라보자. 뉴욕에 층층이 쌓인 시공간의 여러 규모를 더듬어보자. 푸코는 주체와 주체의 의미는 이를 둘러싼 배치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의 관점은 자연의 개체에도 적용된다. 뉴욕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인생을 알기 위해서는 이 종(種)을 탄생시킨 자연의 좌표를 찾아야 한다. 내가 “그로테스크한 우연”의 산물이라면 그 우연의 좌표를 보여 달라. 어느 우연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주었는지, 지금 나에게 무슨 우연이 허락되었는지 말이다. 소환, 굴드맵(Gould-Map)! 이제 길 찾기를 시작한다.



자연: 우연으로 ‘풀하우스’


굴드의 4차원(시간+공간) GPS의 최댓값은 명확하다. 장소는 지구다. 시간은 생명체가 태어난 때, 지금으로부터 장장 41억 년 전이다. 


그가 이렇게 시작점을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에드먼드 헬리 다시 읽기’라는 에세이에서 굴드는 지구의 역사를 가늠할 표지판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토로한다. 대기나 바다 같은 물질은 규칙적으로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평형상태를 이루기 때문에 변화에 걸린 시간이 수십억 년인지 수천 년인지 알 도리가 없단다. 역사의 표지판은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이어야 하지만, 오로지 그때 그 시절에만 존재했다는 특이성이 있어야 한다. 답은? 생명이다.


“역사의 표지로 가장 좋은 것은, 몹시 복잡한데다가 예측 불가능한 우연의 그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일단 사라진 상태는 정확히 같은 형태로 다시 생겨날 수 없는 그런 대상들이다. 진화하는 생명은 지구의 어떤 현상보다도 확연하게 이러한 반복 불가능의 복잡성을 지닌다.”[각주:6]


이 인용구는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하다. 생명이 시작되면서 지구의 역사에도 ‘의미’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명의 시작은 철저히 우연이었다. 지구의 원시 수프에서 어느 날 ‘우연히’ 화학 분자 몇 개가 모여 만들어낸 아미노산은 그저 물질이었다. 그러다가 이 물질덩어리가 전혀 다른 벡터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합집산을 반복하다가 박테리아가 된 것이다. ‘한낱 물질’은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자를 대물림하고, “외부 환경에서 오는 물리적 신호들을 생물체 내부에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정보로 변환시키”[각주:7]는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


굴드의 단속 평형 이론을 공부하면 이 우연의 ‘의미’는 더 심오해진다. 단속 평형 이론이란 생명 종은 지질학적 단속의 순간에 시작되며 그 다음 단속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단속의 결정권은 생명에게 있지 않다. 자연에게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최초의 기원만 우연인 게 아니다. 박테리아에서 출발한 생명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풍성한 가계도를 이뤄냈는데, 이 계통 발생은 모두 우연이었다! 진화 메커니즘을 나름대로 설명하는 “보편적인 기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기조가 사건들을 일으키는 내재적 과정의 기반임에 틀림없지만, 사건 자체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각주:8]


계통의 멸종도 우연의 손에 달려있다. 멸종은 급작스러운 지질학적 변화 때문에 일어난다.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하여 공룡이 싹 멸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서 다윈의 대표적인 개념인 ‘자연선택’이 나온다. 자연선택은 자연이 우월한 종과 열등한 종을 꼼꼼히 따져서 골라내는 합목적적 작용이 아니다. 오히려 앞뒤 안 가리고 대형 살상을 저지르는 자연의 변덕이다. 이 변덕에 운 좋게 적응할 수 있으면 생존하는 것이고, 운 나쁘게 유연성이 떨어지면 멸종이다. 굴드는 이를 “대규모 복권”[각주:9]이라고 했다. 다들 복권표를 사놓긴 하지만 누가 당첨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처럼 지구의 출렁이는 운동에 따라 모든 “종은 독특한 ‘탄생’과 함께 독특한 ‘죽음’을 맞”[각주:10]이하고, 한 번 멸종된 종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생명 종 하나 하나는 지구 역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이유 없이 생겨나고, 이유 없이 사라진다.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는 또 다시 다양한 생명이 폭발한다. 그렇다면? 41억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생명의 본질은 언제나 우연이었다.


플라톤식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우연은 거슬리는 단어다. 우연은 보편적인 법칙을 부정하는 잘못된 예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더 명징한 철학, 더 과학적인 기술일수록 더 많은 변수를 통제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굴드맵’이 그리는 세상은 정반대다. 우연은 세상(최소한 지구)의 본성이다. <주역(周易)>의 전제는 옳고도 옳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이 변한다는 것뿐이다. 물론 변화 자체에는 목적도 까닭도, 원칙도 방향성도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를 ‘우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좌우간 자연이 이런 식으로 잘 작동하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이것을 우아한 기법이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하여간 일은 제대로 되는 기법인 것이다.”[각주:11]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설명은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연이 무의미하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자연의 규모에서 우연은 커다란 역할을 했다. 바로 다양성이다. 우연이 없으면 다양성도 없다. 다양성은 단순히 ‘여러 종류의 개체를 묶어놓는 정지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변수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운동 상태다. 변이를 허용하고 또 최대한으로 실험하고 있는 장(場) 전체가 다양성이다. 자연에서 이 실험은 너무나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눈과 피부로는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이 실험 덕분에 생명이 생겨날 수 있었고, 생명 덕분에 지구에는 순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화살의 이야기(불가역적인 역사)도 생겼다. 이야기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 년 내내 흥행 중인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게도 다행이다.


“여러분들은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변이 variation 그 자체>로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각주:12]



생명: 종-생(種-生)의 운명


자연의 규모에서 스케일을 한 단계 낮춰보자. 지도를 줌인(Zoom-In)해서 들여다보면 또 다른 시공간의 규모가 나타난다. 생명의 규모다. 여기서 주인공은 ‘종(種)’이다. 자연의 우연에서 태어난 이 존재들은 허락된 우연 안에서 최선을 다해 대(代)를 이으려고 노력한다.


생명은 단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리듬이 있다. 동아시아 철학은 이를 압축해서 ‘생장소멸(生長消滅)’이라고 부른다. 종-생에도 비슷한 리듬이 있다. (인간의 생을 인생이라고 부르니, 종의 생을 종-생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생(生)은 종의 분화다. 지질학적 단속 때문에 환경에 변화가 생기면 “선조 군집에서 개체군이 독립해나감으로써 분리와 분할이 일어나는 현상”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394쪽, 2012

이 촉진된다. 장(長)은 종의 연속성이다. 몇 천 년에 걸쳐 분화에 성공한 종은 몇 백만 년 동안 안정적으로 존속한다.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유해한 돌연변이들에 대항하여 현재 잘 작동하는 조합을 지켜내는 일”[각주:13]을 매일 해야 한다. 소(消)는 그 다음 지질학적 단속과 함께 찾아온다. 지구가 급작스럽게 변했으나, 그 동안 대대로 유지해온 신체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다. 그 다음 스텝은 자명하다. 멸(滅), 즉 멸종이다.


어느 종도 이 스텝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스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밟느냐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이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각각의 종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가령, 선조 집단에서 갈라져 나오는 ‘진화’는 종 스스로 결정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규모에서 벌어진 사건이 계기가 된다. 가령 천재지변 때문에 섬이나 타 지역에 고립되면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식이다. 하지만 이때 선조 집단과 구체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종의 몫이자 선택이다. 수만 가지 옵션이 가능하고, 종은 스스로 선택한다. 여기서 우연이 또 다시 중요하게 작동한다.


굴드는 진화를 생명의 몸 상태가 A상태에서 B상태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A에서 B로 넘어가는 중간 상태에서는 몸이 제 기능을 못할 텐데, 어떻게 생존하겠는가? 자기 목숨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몸에 변화를 꾀하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어떤 기관이 꼭 특정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사고방식을 버리는 것이다. 어렵게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간단하다. 우리는 입 하나로 밥 먹으면서 동시에 말하고, 똑같은 뉴욕 메트로카드로 지하철도 타고 잠긴 현관문도 딴다. 마찬가지다. 기관은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고, 여러 기관으로 한 가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기관을 ‘우연히’ 새 역할을 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새 역할이 원래 역할을 밀어내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방식으로 파충류의 턱뼈는 포유류의 귀뼈가 되었다!


자기 몸을 재발명(재발견)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해진 생장소멸의 스텝을 밟아가면서도 변신을 꿰하는 것은 가능하다. 왜? 생명의 신체는 생각보다 엉성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생명을 탄생시킬 때 그렇게 사려깊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테리아는 대단한 효율 덩어리다. 절정의 기량을 지닌 단순한 세포로서, 그들 내부에는 프로그램들이 있고 쓰레기나 찌꺼기 따위는 말끔히 내다버렸으며 필수 유전자들은 하나씩만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생명이 첫 화석 기록을 남긴 35억 년 전 이래 지금까지 죽 박테리아였다. (...) [반면] 창조성에는 엉성함과 중복이 필요하다. 약간 넘치는 게 있어야 그걸 잘라서 버리는 대신 다른 일에 쓸 수 있다. 약간 과잉인 게 있어야 잉여 일손을 추가적인 역할로 차출할 수 있다. 여러 작업을 담당하되 각각 어딘가 모자란 면이 있게 처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각주:14]


엉성함과 중복성. 이것이 생명의 규모에서 우연이 갖는 의미다. 기관의 기원과 실제 역할 사이에는 아무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는 개로 태어나고, 새는 새로 태어난다. 이건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다. 하지만 하나의 종을 하나의 개체로 보는 생명의 규모에서 보면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나중에 어떤 창의적인 실험이 벌어져서 새로운 종이 생겨날지 모르는 일이다. 변수는 늘 있다. 이 변수가 종-생의 진짜 ‘운명’이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 이야기(경향)를 발명한 생물


지도의 스케일을 한 단계 또 낮춰보자. 이제 거의 다 왔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규모가 보인다. 그렇게 근사해 보이지는 않는다. 지구의 규모에서 생명은 전무후무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생명의 규모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생명의 가지 끄트머리에 있다. 쇠락해가는 유인원 가문에 속해 있고,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 같은 친척도 다 잃었다. (개의 종이 진돗개만 빼고 몽땅 멸종했다고 생각해보라. ‘개’라는 종이 얼마나 초라하게 보일 것인가.)


그런데 이 초라한 생명체 호모 사피엔스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뇌를 키워서 신경망을 정교화하는 쪽으로 진화가 진행되었는데, 그 바람에 ‘우연히’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렇다, 이런 변수가 종-생의 운명이다!) 생존에 딱히 필요하지 않은 활동까지 그만 시작하게 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글을 쓰고, 도시를 건설하고, 음악을 만들고, 종교를 맹신하고, 도덕을 질문하고, 무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능력들”은 원래 “인간 뇌의 기원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각주:15]. (그리고 이 기원 없는 능력이 지금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휘젓고 다니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게 또 다른 반전이다.)


진화의 부작용. 이것이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다. 그런데 가장 불행한 부작용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유한성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처럼 자신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생물 종은 없다. 이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의미’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세상은 무한한데 나는 유한하다면, 이 사이의 간극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이야기다. 이야기가 내포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 경향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은 ‘존재의 의미’다. 이야기-경향성-의미의 삼박자는 이제 호모 사피엔스에게 먹고 자는 생존만큼이나 중요해졌다. 뉴욕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떤 평범한 사람이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존재론적 고민이 숨어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이 만들어낸 특이한 변수 중 하나다. 그리고 문화는 그런 호모 사피엔스의 특이성이다. 그러나 자연과 문화는 같은 메커니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증가하는 반면, 문화는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변수가 사라지게 된다. 점점 더 예상가능한 패턴에 생명과 삶이 묶인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다움’을 강조할수록, ‘문화인’이 되어갈수록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거의 변하지 않는 물리적 우주, 경향성 없이 우연을 흩뿌리는 생명의 차원, 필연적인 경향성을 만들어내려 애쓰는 문화의 차원. (굴드는 이를 물리적 우주, 다윈식 변화, 라마르크식 변화로 명명한다.) 이 삼중주 위에 지금 우리의 인생이 놓여 있다. 드디어 찾았다. 여기가 우리의 좌표다.



뉴요커: “그로테스크한 우연”으로서 사는 법


좌표를 찾았다. 이제는 이 좌표를 바탕으로, ‘마음대로’ 살 계획을 짜면 된다. 뉴요커처럼 말이다. 뉴요커는 노바디(Nobody)다. 뉴욕의 자유는 노바디(Nobody)가 되는 자유다. 뼛속까지 그런 감각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것은 어쨌든 축복이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변화를 꿰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의 규모 내에서다. (호모 사피엔스에서 다른 새로운 종으로의 진화도 상상만으로 흥분되는 일이지만, 내 대(代)에서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ㅠㅠ) 세상, 지구,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규모에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거기서 ‘우연의 전략’을 베껴와야 한다. 자연의 다양성과 생명의 중복성, 그리고 변이를 좋아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을 우리의 문화 영역으로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이런 활기가 없다면 뉴욕의 다양성은 위선에 불과하다. 다인종/다문화는 다양성이 아니다. 개체 사이를 오가는 변이와 변수가 진짜 다양성이다. 내 생명의 힘을 저하시키는 국면을 만났는데 ‘반드시 그렇게 되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밀어붙여서 국면의 변화를 꿰해야 한다. 문화보다 더 근본적인 우연의 힘을 믿어야 한다.


우연… 우연… 우연…


그리고 우리는 생명 동네의 한 일원으로서, 멸종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생각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든 종의 99%가 멸종했고 또 멸종해갈 것’이라는 사실에서 환경파괴를 해도 괜찮다는(?) 괴상한 주장을 끌어낸다. 그러나 뉴욕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으니, 인디언/흑인노예/노동자를 학대하다가 단명시켜도 된다고 생각했던 무식한 사람들이 과거 뉴욕에 있었다.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익지도 않은 사과를 가지에서 떼어내어 땅에 패대기치는 일처럼 비도덕적인 일이 있는가? 자라는 생명의 힘을 일부러 꺾어버리는 것처럼 자연에서 슬픈 일은 없다.


뉴욕의 장점은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규모 감각이 생긴다. 이제는 내 좁은 시야에 갇혀서 의미를 축소/확대하거나 엉터리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실수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슬며시 내 숨통을 조여오는 뉴욕 생활 앞에서 고개 숙이며 ‘어쩔 수 없이 힘들다’고 불평하지 하지 않으련다. 자연이 품은 우연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의 변두리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이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다윈은 우선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험적 주장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러한 종류의 인간적 허영에 대해 다재다능한 자연이 최종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각주:16]


글_김해완

  1. Stephen Jay Gould, , Harvard University Press, Location 26, 2011 [본문으로]
  2. Stephen Jay Gould, , Harvard University Press, Location 49, 2011 [본문으로]
  3.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과학과 휴머니즘>, 김동광 역, 현암사, 8쪽, 2016 [본문으로]
  4.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318쪽, 2012 [본문으로]
  5.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55쪽, 2012 [본문으로]
  6.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253쪽, 2012 [본문으로]
  7.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과학과 휴머니즘>, 김동광 역, 현암사, 188쪽, 2016 [본문으로]
  8.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과학과 휴머니즘>, 김동광 역, 현암사, 89쪽, 2016 [본문으로]
  9.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318쪽, 2012 [본문으로]
  10.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과학과 휴머니즘>, 김동광 역, 현암사, 30쪽, 2016 [본문으로]
  11.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208쪽, 2012 [본문으로]
  12. 스티븐 제이 굴드, <풀하우스>, 이명희, 역, 사이언스 북스, 14쪽, 2010 [본문으로]
  13.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571쪽, 2012 [본문으로]
  14.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138~139쪽, 2012 [본문으로]
  15.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과학과 휴머니즘>, 김동광 역, 현암사, 77쪽, 2016 [본문으로]
  16. 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 돼지>, 김명남 역, 현암사, 164쪽, 2012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