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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만인의 무정부주의 (2) : 뉴욕과 엠마 골드만

by 북드라망 2017. 3. 31.

연애, 만인의 무정부주의 (2) : 뉴욕과 엠마 골드만



100년 전, 몰매 맞을 각오로 자유연애와 산아제한을 외쳤던 여성운동가들이 오늘날 세계 각국 대도시에서 연애 행각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야말로 ‘자유’가 흘러넘치는 광경이 아닐까? 1890년대에 엠마 골드만은 뉴욕에서 만인이 콘돔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미친 마녀로 몰렸다. 1990년대에 태어난 나는 이제 골드만이 부르짖었던 자유를 무료로 배급받고 있다. 포장지에 ‘NYC’라고 적힌 무료 콘돔이 뉴욕 시내 전체에 종류 별로 쌓여있다. 파트너 선택의 폭이나 관계의 형태도 퍽 다양해졌다. 고리타분한 한국조차 국제 커플, 동성 커플, 연상연하 커플, 불륜 커플, ‘돌아온 싱글’과 ‘영원한 싱글’까지 사회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뉴욕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다. 그렇다면 오늘날 모던 도시는 자유로운 사랑의 공간으로 ‘진보했다’고 (아니면 최소한 ‘진보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할렐루야!



여체(女體), 연애-감옥이 되다


할렐루야는 무슨.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우는 아이를 안고 쩔쩔매며 수업을 듣는 미혼모 학생을 보면 내가 다 한숨이 나온다. 솔직한 심정으로, 저 진보 시나리오에 도저히 공감이 안 된다. 오늘날 연애가 참되게 자유롭다면 연애를 포기한 한국의 삼포세대와 일본의 사토리세대가 등장할 리가 없다. 뉴욕의 싱글 부모가 참된 자유연애의 결과라면, 편부모의 극심한 고생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의 상처와 분노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거 혹시 소비자에게 책임을 다 몰아가는 악덕 기업의 수법 아닐까?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사생활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며 팡파르를 울려대지만, 사실은 그 선택을 빌미로 하여 모든 문제를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자유의 값을 치르라면서.


골드만이 살아있었다면 역시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녀는 자유연애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어설픈 진보주의자들에게 항상 경고했다. 자유를 양이 아니라 질로 측정하라고. 자유는 똑같은 권리를 최대한 여러 명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고유한 성격의 질(質)”[각주:1]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새 인생을 개척할 때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통찰력을 빌리면 자유연애의 허점이 훤히 드러난다. 중매결혼보다 자유연애·연애결혼이 더 자유롭다는 주장은 결국 선택의 양(옵션의 개수)을 근거로 든다. 가령, 예전에는 부모가 자식의 반려자로 A를 점지했지만, 이제는 각 개인이 A, B, C, D……를 차례로 경험한 후에 스스로 반려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식이다. 혹은 남자든 여자든 이제는 결혼 전에 데이트와 섹스를 여러 번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양과 질은 다른 문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연애할 권리가 보장되고, 점점 더 많은 범주의 사람을 연애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연애의 질(質)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다. 단 한 번의 연애를 해도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나답게 하는 게 중요하다. 수많은 연애가 동일한 판타지와 동일한 트러블로 채워진다면 그 사회의 연애는 여전히 저질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연애는 ‘무늬만 자유’다. 자유연애의 부자유를 근본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여성의 몸이다. 더 까놓고 말하면 임신이다. 연인이 성생활을 한다는 것은 항상 임신의 가능성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생 수준의 생물학 상식만 있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정말로 아기가 생기면 젊은 청춘들 대부분은 연애의 주도권을 잃어버린다. 혼비백산하여 남의 말을 따르거나, 아기를 버리거나, 서로를 버린다. 어떤 선택을 해도 당당하기가 힘들다.


임신을 연애의 ‘실수’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임신도 점점 주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중이라고. 사전피임, 사후피임, 중절수술이라는 옵션이 보급되고 있다고. 콘돔을 무료로 배포하는 뉴욕시가 겨냥하는 목적도 바로 이것이다. 뉴욕에서는 사후피임약도 편의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2013년 CDC(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리포트를 보면 뉴욕시의 중절수술 비율은 전체 임신의 60%에 임박하고, 미국 전체 중절수술의 8분의 1도 뉴욕 주에서 행해진다. 연애의 도시답다. 그러나 이 숫자가 정말로 뉴욕의 자유를 증명할까? 이것 역시 임신 확률과 사생아 탄생을 최대한으로 줄여보겠다는 양적 자유에 불과하다. 태아를 ‘돈 먹는 기계’ 혹은 원치 않은 짐으로 간주하고, 여성의 자궁을 아이를 탄생시키는 ‘위험 구역’ 취급하고, 남성의 성기를 ‘사고치는 흉기’로 낙인찍는 배치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연애가 개개인에게 부과하는 ‘질적 구속’이다. 자유연애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것이 몸이라니,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연애의 질적 자유를 측정하려면 그 사회가 여성의 몸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보면 된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작년에 행정자치부가 ‘가임기 여성지도’를 배포했었다. 오, 대한민국! 이 나라는 여성의 몸을 ‘노동인구 생산 기계’로 취급한다.) 여성의 몸은 사회와 자연의 불일치가 실제로 부딪히는 장소다. 연애 담론이 몸의 현장은 지우고 껍데기만 남은 로맨스와 섹스를 부추길수록 소외된 생명의 무게는 여성의 몸에 고스란히 전가된다. 여성의 몸이 억압될수록 여성과 함께하는 남성도 번뇌에 시달린다.


뉴욕은 어떨까? 여성의 몸, 여체(女體)는 21세기 뉴욕에서도 연애-감옥이다. 20세기 내내 이 도시는 성의 자유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다. 여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가 사회적 시선에 용감히 맞서며 성적 자유와 권리를 요구했다. 그렇게 이 위대한 도시에서 여성들은 투쟁 끝에 감옥 문을 여닫는 열쇠(콘돔, 피임약, 중절수술, 자유연애)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감옥을 부수지는 못했다.



몸의 법은 모든 법 위에 군림한다


골드만의 정신은 뉴욕으로 다시 소환되어야 한다. 1889년에 전통적인 가정을 버리고 뉴욕으로 도주한 뒤, 세간이 욕하든 말든 죽을 때까지 자유연애를 고집했던 ‘센 언니’의 노하우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녀는 말한다. 문제는 연애를 하느냐 안 하느냐,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 아이를 낳느냐 안 낳느냐가 아니다. 우리의 몸이 몸 본연의 자연스러움에서 동 떨어져서 사회 시스템에 포획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시스템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신체가 된다는 것. 이것이 진짜 문제다. 자유의 가면을 벗은 연애의 실체다.


골드만은 몸을 장악한 이 시스템을 ‘정부’라고 부른다. 근대 국가는 기본적으로 생명 정치를 실행한다. 모든 국민이 평생 동안 국가의 관리 시스템을 따라 생로병사를 겪기를 강요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명 정치는 인구부터 장악한다. 인구를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성행위를 컨트롤해야 하고, 연애(성)의 총체적 활동도 감시해야 한다. 따라서 연애는 ‘사회적 통념’이라는 명목 아래 몇 가지 인위적인 단계로 나뉜다. 만남, 데이트, 결혼, 그리고 ‘합법적’ 임신과 ‘합법적’ 인구생산. 자유연애는 이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지막 단계를 보류한 채 앞 단계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생명 시스템은 진실로 ‘생명’을 위한 게 아니다. 새 생명이 등록되면 제도는 이를 평생 관리한다. 균질화된 교육, 소외된 노동, 병원에 의존하는 건강……. 이 홈 패인 회로는 언제나 자본의 운동을 촉진시킨다. 결국 정부가 개인의 연애에 감 놔라 대추 놔라 끼어드는 건 자본을 배 불리기 위해서다. 골드만이 시니컬하게 말했듯이 “국가는 오직 재산과 독점을 유지하거나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각주:2]


가난한 연인의 고통 따위는 국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하지 않고는 제도적 삶에 접근하기 힘들게 만들고,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끔 몸을 무력화 시키면서, 동시에 ‘시스템 사용료’는 매년 올리는 그런 만행을 저지르는데 어떻게 생명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19세기 말, 하루 12시간씩 공장에 갇혀 일하던 어린 여공들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거리의 남자들과 어울리다가 매춘부나 미혼모로 전락했다. 이 상황은 여공들의 ‘부주의함’이 초래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제도적으로 저지른 범죄다.


아나키즘은 바로 이 지점에 투쟁의 깃발을 세운다. 국가가 계획한 대로 순순히 내 몸을 내주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무정부주의’라는 뜻 때문에 아나키즘을 무조건 법(法)을 거부하는 테러리즘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아나키즘은 법 자체를 부정한 적이 없다.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국가의 법을 부정할 뿐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사람이 국가 바깥에서 스스로 ‘잘 사는 법’을 고민하고, 창조하고, 실천해야하며 또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철학이다.


여기서 골드만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녀는 개인이 해방되는 길은 몸에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자연법은 말 그대로 자연의 법, 즉 남녀노소의 몸이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법(法)이라는 것이다.


자연법(A natural law)은 외부의 강제에서 벗어나서, 또 자연적 요구와의 조화 속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여기는 인간이 갖는 원동력이다. 예를 들면 영양 섭취, 섹스의 희열, 빛, 공기, 운동에 대한 요구가 바로 자연법이다. 그러나 자연법을 실행하는 데에는 곤봉도, 총도, 수갑도, 감옥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자발성과 자유로운 기회가 필요하다. (…….) 따라서 블랙스톤의 말은 옳다. “인간의 법은 효력이 없다. 자연의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각주:3]


그렇다면 연애는 아나키즘의 알파요 오메가다. 연애야말로 매 순간마다 “자연법”을 소환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까닭은 몸에 내재되어 있는 성(性) 에너지 덕분이다. 성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또 미스터리한 에너지이다. 이 힘은 생명을 창조해낼 뿐만 아니라 육체적 쾌락, 타인과 연결되려는 욕망, 생활의 창의력 등등 자유롭게 변주될 수 있다. 골드만은 성욕을 고유한 개성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근대인이 성욕을 억압하며 살아간다는 프로이트 이론에도 (당시 최신 이론이었다) 반대했다. “창조성은 억압된 성적 본능을 해소해주는 약이 아니라, 성적 본능이 얼마간 표출된 것이 바로 창조성이다. (…….) 성이 없다면 모든 것이 없다는 말이다.”[각주:4] 연애를 한다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 이 어마어마한 자연의 힘을 ‘통째로’ 경험하는 것이다.


임신은 이 경험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임신은 성의 목적도 수단도 아니며, 성이라는 폭발적 창조력이 표현되는 하나의 방식이다. 따라서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 관계가 꼭 연인 관계여야 할 필요는 없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 몸과 마음을 섞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생활을 창조하는 것,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 우리 몸에서는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자연법을 실천하는 사회라면 이 유연한 신체성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누구도 그 어떤 이유로도 이 집합적 활동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서, 혼자라서, 소수자라서, 사회적 시선이 두려워서 연애를 포기하거나 아이를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이 자연법은 무시된 지 오래다. 그래서 골드만에게 자유연애는 국가의 법에 대항하여 자연법을 실천하는 투쟁이다. 자연법은 그 자체로 자유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명 종(種)이다. 자연은 생명 종에게 번식의 본능과 일탈의 가능성을 둘 다 주었다. 모든 진화는 창의적으로 활용했던 개체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몸’이라는 열린 차원에서는 모든 사건이 가능하다. 혼전 임신이 뭐가 문제인가? 이성애자가 열심히 사랑하다가 일어난 사건인데. 동성애가 뭐가 문제인가? 성욕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인데. 아기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아예 혼자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세상에는 본능에 개의치 않는 그런 별종도 있어야 한다. 문제는 딱 하나다. 몸을 지배하는 국가 시스템이 이 신체적 자발성(spontaneity)을 포기시키는 것이다. 아,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호모 사피엔스로 살아가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싸워야 하다니!


에세이 ‘진정한 아나키즘은 무엇을 위하는가’에서 골드만은 아나키즘의 적으로 국가, 종교, 사유재산을 꼽는다. 국가의 법, 종교의 법, 재산의 법 이전에 몸의 법이 있다. 생명을 낳고 기르고 나누는 성(性)의 힘이 있다. 내 몸이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살아갈 때, 내 성욕이 공동체의 비전과 통합될 때 거기에 진짜 자유가 있다. “아나키즘은 삶의 통합(unity of life)을 가르치는 스승이다.”[각주:5]



아나키즘, 감옥을 부수는 사랑


골드만은 여성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스스로를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라고 칭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여성 운동의 목표는 성 해방인데, 성 해방은 곧 몸의 해방이고, 몸의 해방은 존재의 총체적 해방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답은 사회 혁명 뿐이다. 골드만은 이 답을 그대로 따랐다. 그녀는 집회란 집회는 다 쫓아다니면서 남자 경찰의 다리 사이를 걷어찰 만큼 용감무쌍한 투사로 살았다.


아나키즘은 가장 순수하고 또 가장 실현하기 힘든 이념이다. 만인이 ‘철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독립적으로 사고해야 하고, 스스로 이상을 세워야하며, 직접행동에 나서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고행에 가까운 길이다. 이렇게 얻는 자유가 시스템에 순응하고 편히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을까? 골드만은 그렇다고 답한다. 아나키즘은 감옥을 부수는 사랑이다.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자유는 일회용 자유일 뿐이다. 주체성은 선택하는 순간에만 딱 한 번 자유롭게 발휘된다. 그 선택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저절로 창출해내는 사회적 의미와 현실의 굴레에 대해서 내가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냥 굴레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진짜 사랑은 사랑할 환경을 만들어내는 사랑이다.


아나키즘 사랑이 ‘감옥’을 부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피임과 중절수술에 대한 성교육을 제대로 받자. 산아제한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지만 여성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장치다. 둘째, 개인의 신체를 지배하려고 드는 “신이나 국가, 사회, 남편, 가족 등등의 종이 되기를 거부”[각주:6]하자. 감옥을 만들어낸 사회적 배치를 바꾸기 위해서 장기 투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상대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진정한 자유는 연인마저도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다. 힘껏 사랑하되, 상대가 떠날까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자유는 그녀가 자유를 획득할 힘을 펼치는 딱 그만큼 펼쳐질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내면의 갱생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편견, 전통, 관습과 절연하는 것 말이다. 삶의 모든 직업에 있어서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옳고 또 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생명에 가장 필수적인 권리는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권리다. 사랑받는 것, 연인이 되는 것, 어머니가 되는 것이 노예나 하위 주체가 되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각주:7]


그래서, 골드만 자신은 연애를 잘 했느냐고?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골드만의 카리스마에 기가 팍 죽었던 나로서는 약간 위안이 되었다……ㅎㅎ) 현실은 언제나 책보다 어렵다. 골드만은 첫째 전략과 둘째 전략까지는 잘 수행했는데, 셋째 전략에서 엎어졌다. 애(愛)가 곧 고(苦)가 된다는 동양적 통찰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자유연애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살신성인하여 길을 개척해 준 덕분에 우리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연애대장 골드만이 도시 빈민 연인들에게 전해주는 팁을 간단히 체크해보자.



감옥 탈출 ① 너의 육체를 팔지 마라

골드만의 최대의 적은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매춘부로, 혹은 포주로 전락시킨다. 육체를 팔아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혼 또한 인적 물물교환으로 간주한다. 남편은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할 부담을 갖고, 아내는 그 대가로 인생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자존심 상하는 관계에서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골드만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내면까지 자본주의에 팔려버리는 상황이었다.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다가 ‘경제적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 그 당시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여성 운동이 목표로 삼은 것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었다. 여성 독립, 여성 평등, 여성 해방은 남성처럼 돈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드만은 묻는다. 남성이 국가 시스템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산다면,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져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골드만은 여성이 남성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신체적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신체를 해방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데,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여성의] 독립이란, 결국 여성의 본성, 사랑의 본능, 모성의 본능을 무디게 만들고 억눌러 버리는 지난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 여성 독립과 여성 해방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개념, 사회적 지위가 동등하지 않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이 그녀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불안, 모성의 기쁨 혹은 애정이 그녀가 전문직을 수행하는데 단지 방해가 될 뿐이라는 공포. 이 모든 것이 모여 해방된 근대 여성을 강요받는 시녀로 만든다.[각주:8]


이 통찰에는 별 다섯 개를 줘도 모자라다. 21세기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똑같은 소외를 겪기 때문이다. 남녀 모두 맞벌이로 뼈 빠지게 일해도 아이를 키우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이제는 남성도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 이것이 남녀평등인가? 남성과 여성 모두 평등하게 자본주의 앞에 “강요받는 시녀”의 정신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사는 현실을 피할 수 없을지언정, 사랑하는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감옥 탈출 ② 타인의 육체에 중독되지 마라

골드만의 두 번째 적은 사랑의 중독성이다. 상대방에게 너무 빠져 든다면 스스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가 있다. 이는 골드만 자신이 생생하게 경험한 것이다. 골드먼의 여러 남자친구 중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은 벤 리트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교통사고와 같았다. 리트먼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이상적인 사랑의 파트너는 아니었다. 골드만의 강연 매니저로 일했는데, 능력은 있었지만 욕망의 자제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골드만에게 기대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서 그녀를 상처 입혔다. 


골드만 같은 여자가 왜 이런 남자를 차버리지 못했을까? 리트먼이 골드만으로 하여금 “자연의 절대적이고 본능적인 힘 (…….) 형언할 길 없는 환희를 맛보게”[각주:9]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야생적인 남자였고, 성병 의사였던 만큼 성적으로 아주 개방적이었다. 골드만의 성욕을 끌어내는데 최고의 파트너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녀는 리트먼에게 감정적으로 구속되었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사랑이 스스로 감옥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조심하자.


감옥 탈출 ③ 진짜 이기주의자가 되어라

골드만은 어떤 연애를 하든 항상 승자가 되는 비법을 알고 있다. 연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남자친구와 헤어지더라도 연애 자체는 남는 장사가 된다.


골드만의 애인 리스트를 보면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인사들이다. 아나키스트 버크만은 혁명 정신을, 화가 페쟈는 예술적 감수성을, 유럽인 브래디는 유럽 문학과 요리를, 리트먼은 육체를 일깨우는 법을 골드만에게 가르쳤다. 또, 골드만은 상대방의 능력을 은근슬쩍(?) 아나키즘 활동에 써먹기까지 했다. 버크만과 함께할 때는 암살 작전을 수행했고, 페쟈와는 아나키즘 모금 활동을 했으며, 브래디가 마련해준 아파트는 아나키스트들의 아지트로 써먹었다. 마지막으로 리트먼은 강연 매니저로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남을 해치지 않는 진짜 이기주의다. 연애를 잘하려면 호모-쿵푸스가 되자!



언제나 ‘싱글’


21세기 뉴욕의 연애는 겉보기에만 자유롭다. 연애는 여전히 가정-자본-국가의 삼각형 덫에 갇혀 있다. 유색인종 이민자의 ‘없는 집 자식들’은 제도 밖을 전전하다가 덜컥 아이를 갖게 되어 생계를 꾸리는데 급급하고, 맨해튼의 ‘있는 집 자식들’은 유리한 결혼 조건이 세팅될 때까지 몸을 사린다. ‘중간에 낀 자식들’은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라 결혼적령기가 고무줄처럼 줄어들었다 늘어났다한다. 이반 일리히의 말마따나 근대인은 자기 몸을 국가에 상납하고 자본을 수혈 받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될 운명이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 완벽한 자유는 없다. 골드만은 말했다. “네, 나는 여자에요. 틀림없는 여자이지요. 그것이 내 비극입니다. 여성인 나와, 결연한 혁명가인 나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서 나는 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각주:10] 만약 이 세상이 자연법을 실현하는 유토피아였다면 골드만의 사랑과 인생이 쉬워졌을까? 거기에는 또 다른 구속과 불행이 있었을 것이다. 골드만은 자유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나아갔기에, 역설적으로 이 사랑의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녀가 불완전하게나마 만들어낸 자유다.


뉴욕에 연애의 자유는 없지만, 이 자유를 만들어낼 자유가 있다. 무정부주의의 미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가 될 것이다. 사람이 오고 가는 이 싱글의 도시에서 사랑을 하는 것은 용감한 행위다.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는 것은 더욱 용감한 행위다. 이 도시는 몸의 본능을 거부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 자신의 파트너와 아이까지 한 명의 ‘싱글’로 존중해주는 지혜로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잠재적 미혼모로 여긴다. 불운한 미래를 원해서가 아니다. 아이를 낳는 내 몸을 사랑하지만, 아이 때문에 한 남자에게 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사랑을 하는 주체로서 온전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 이 욕망이 도착하는 곳은 아나키즘일 것이다.


글_김해완

  1. Emma Goldman, ‘The Tragedy of Woman’s Emancipation’, , Diactic Press, p.83, 2013 [본문으로]
  2. Emma Goldman, Alix Kates Shulman Edit, ‘Anarchism: What It Really Stands For’, , Open Road Media, 2012, p.69 [본문으로]
  3. Emma Goldman, Alix Kates Shulman Edit, ‘Anarchism: What It Really Stands For’, , Open Road Media, 2012, p.70 [본문으로]
  4. 재인용,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219쪽 [본문으로]
  5. Emma Goldman, Alix Kates Shulman Edit, ‘Anarchism: What It Really Stands For’, , Open Road Media, 2012, p.60 [본문으로]
  6. 재인용,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185쪽 [본문으로]
  7. Emma Goldman, ‘The Tragedy of Woman’s Emancipation’, , Diactic Press, p.88, 2013 [본문으로]
  8. Emma Goldman, ‘The Tragedy of Woman’s Emancipation’, , Diactic Press, p.84, 2013 [본문으로]
  9. 재인용,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193쪽 [본문으로]
  10. 재인용,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10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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